네스토리우스와는 반대로, 알렉산드리아의 퀴릴(Cyril of Alexandria)의 제자였던 유튀케스(Eutyches 378년경-454년)는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연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두 종류의 본성을 소유하고 계신 것에 대한 부정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235.1)
 5. 칼케돈 공의회의 결론
 마침내 이 논쟁을 결말짓기 위해 칼케돈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다(451년). 이 공의회에서는 한 존재 안에 두 본성이 거한다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네스토리우스의 견해와 유튀케스의 견해는 둘 다 정죄되었다. 이 회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그분 안에 두 본성을 소유하고 계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심을 “혼동 없이, 변함없이, 분열 없이, 분리 없이” 고백하라고 가르쳤다. (235.2)
 “두 본성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는가?”라는 그리스도론에 관한 질문이 칼케돈 회의의 정의에서 그 답을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회의가 기여한 것은 네 종류의 부정적 가설이 등장한 것 말고는 없었다. 그 정의는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현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실재성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위격(person)”“본성(nature)”이라는 용어가 현대 영어의 그 상당어구들과는 의미가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 용어들이 그것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용어들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회의에 참석한 교부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데 역설기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언어로 성육신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 회의에서 채택된 신조는 여전히 양 진영 모두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몇몇 지역에서는 단성론(Monophysitism)과 단의론(Monothelotism)과 양자론(Adoptionism)을 지지하는 각 그룹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계속되었다. (235.3)
 B. 중세
 중세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리의 의미를 확대시키는 일에 별로 이바지 한 것이 없다. 그들은 니케아 성명과 칼케돈 성명의 권위를 받아들이긴 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자아의식, 그분의 지식, 그분의 독립성, 그분이 행한 선행, 고통을 참는 능력, 하늘 아버지에 대한 종속성 등과 같은 문제에 관해서는 매우 사변적 혹은 추상적인 반응만을 보였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354-430년)에 의해 예수에 관한 몇몇 특정한 부분들이 강조되었으며, 이것들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년)가 더욱 발전시켰다. 아퀴나스는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의 양태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면서 “본성(nature)”“위격(person)”을 정의하고 그 둘을 구별하고자 시도하였다. (235.4)
 1.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맞춤
 중세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위격보다는 그분의 사역, 더 구체적으로 그분의 속죄 사역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관련해서 오랜 기간 지배적이었던 견해, 곧 그리스도의 죽음이 마귀에게 지불된 속전이었다고 하는 견해가 11세기 말에 이르러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대표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한 사탄에게 속전을 지불하셨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두려워서 기쁜 마음으로 이 거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자신의 교만심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정복하고 그를 붙잡아 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승리의 부활로 살아나셨다. (235.5)
 a.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1033-1109년)는 그의 책〈쿠르 데우스 호모?(“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에서 전통적 견해에 도전하였다. 성육신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속죄의 필요성에 대한 이론의 뼈대를 세운 최초의 신학자인 그는 죄가 하나님께서 마땅히 누리셔야 할 영예를 그분으로부터 빼앗아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 요구하는 바를 따르기 위해 그분의 영예가 형벌(punishment)이나 보상(satisfaction)에 의해 옹호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자비에 고무되셔서 보상을 통해서 일이 이루어지도록 요구하셨다. 죄는 하나님께 무한하게 모욕적인 것이었으므로 그 보상 또한 그분과 동일하게 무한한 것, 곧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어야 하였다. 하지만 그 보상은 인성과 신성을 겸비한 존재여야 하였다. 이것이 바로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완전한 보상을 지불하셨다. 그의 죽음은 사탄에게 속전을 제공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빚을 갚는 행위였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에서는 그 어디서나 안셀무스의 이 공식의 본질을 강력히 옹호하는 투사들이 계속적으로 나타난다. (236.1)
 b. 아벨라르
 그로부터 약 40년 후에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elard, 1079-1142년)가 전통적인 견해와 안셀무스의 이론을 모두 거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그리스도교 신학의 개요(Epitome of Christian Theology)〉와 〈로마서 주석(Commentary on Romans)〉에서 죄에 대한 다른 견해를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람들의 행동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마음의 악한 성향과 조화를 이루는 악한 의도에 더 많이 자리 잡고 있다. 아벨라르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 안에는 죄인 편에서 보상을 드려야 한다는 원칙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죄인의 마음속에 회개와 사랑의 반응을 일으키기 위한 것으로 여겼다. 이 같은 회개와 사랑의 마음이 곧 죄인에게 이르러오는 화목과 구속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최상의 계시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구속을 위한 십자가 사건이 하나의 비참한 순교적 죽음으로 한정되면서 그 사건의 불가피성이 설득력을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견해는 속죄의 모본 이론(exemplarist theory)을 선도하였으며, 마침내 도덕적 감화론(moral influence theory)이라 불리는 이론으로 정착하였다. (236.2)
 C. 종교개혁 시대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칼케돈 공의회에서 공인된 그리스도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에 강조되었던 것들을 실제 생활과 더 밀접하게 재해석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접근방법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그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영광의 신학이 아닌 십자가의 신학이었다. (236.3)
 1. 콤무니카타오 이디오마툼(Communicatio ldiomatum)의 문제
 종교개혁자들 사이에는 주의 만찬과 관련된 논쟁에 대해 매우 뿌리 깊은 의견의 불일치가 존재하였다. 루터는 콤무니카티오 이디오마툼(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속성의 교류”)이라는 옛 교리를 적용함으로, 또한 이 교리에 근거해서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체로” 존재함을 역설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특성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상호 침투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236.4)
 이 문제에 관해서 루터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츠빙글리(Zwingli, 1484-1537년)는 루터의 견해가 칼케돈에서 정죄된 위험한 유튀키아누스적인 경향, 곧 본성들이 서로 융해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고 여겼다. 칼뱅(Calvin, 1509-1564년) 역시 속성의 교류에 대해서 가르쳤지만 신성의 속성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에게 나뉘어 주어질 수 있다고 하는 견해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두 본성의 고유한 특성들은 오직 동일한 위격(person)에만 힘입을 수 있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는 전지한 존재이시면서 동시에 제한된 지식만 소유존재라고 말수 있는 것이다. (237.1)
 2. 그리스도의 상태와 직분에 관해서
 종교개혁자들은 다른 두 분야에서는 그리스도론에 대단히 독창적인 공헌을 하였는데, 그들의 그리스도론은 개신교도뿐 아니라 로마가톨릭교회 안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발전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소개한 두 교리들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상태, 즉 그분의 겸비한 상태와 존귀한 상태에 관한 교리였다. 그분의 상태를 이렇게 구별한 것은 두 본성에 대한 교리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역동적인 측면을 더욱 부각시킴으로 그 교리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삶과 봉사를 이 두 상태의 결과들로 보았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세가지 직분, 곧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도 소개하였다. 이 교리는 칼뱅에 의해서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후에 루터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자들도 받아들였다. (237.2)
 D.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