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케 하심(reconciliation)은 초기교회가 십자가의 본질과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다. 초기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화목 또는 화목을 이루는 방법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 용어는 신약에서 바울에 의해서만, 그것도 단지 네 차례에 걸쳐서만 쓰이고 있기 하지만(롬 5:10, 11; 고후 5:18-20; 엡 2:11-16; 골 1:19-22), 이 화목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그의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참조 구원론 III. A. 2). (221.2)
 화목은 깨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인격적 범주에 속하는 개념이다. 서로에게 증오와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질 때에만 다시 한 마음이 될수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성경은 전반적으로 죄의 결과에 대하여 말할 때에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진 장벽이 아니라,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만들어진 장벽에 그 초점을 맞춘다. 바울은 죄인들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자들(골 1:21), 또는 단순하게 하나님의 “원수”(롬 5:10)이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라고 일컫는다. 여기에 화목의 필요성이 존재한다. 위의 세 성경절 모두가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양쪽 모두가 아닌 오직 한쪽만이 반목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그들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 곧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그분과 화목을 이루는 데 필요한 유일의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에도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것이 성경이 묘사하는 바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221.3)
 예를 들어서, 바울은 로마서 5:10에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불화가 있었지만 이제는 화목이 회복되었다. 이렇게 화목이 다시 회복된 것은 사람들의 삶에서처럼 불화의 근본 원인이 제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에는 죄가 바로 불화의 근본 원인이었다. 사람은 죄를 제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셨다. 바울은 매우 명확한 용어들을 동원하여, 화목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포함된 것이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그 화목의 일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시고 성취하신 일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사도가 명확하게 “우리가∙∙∙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롬 5:10; 참조 골 1:20)고 말하기 때문이다. (221.4)
 이 같은 고찰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생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고 주장한다. 즉 그분이 “경건치 않은 자”(6절)를 위해 죽으셨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의미하는 것은 죄 문제의 해결책이 있다는 것이지 그것이 가볍게 혹은 단순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관대하게 베풀어진 특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용서와 화목이다. 화목의 주체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8-20)고 주장한다. (222.1)
 우리 자신은 화목의 일에 있어서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없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으로써 하시는 행위이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더 이상 우리의 범죄를 우리가 행한 일로 보지 않으신다. 이 화목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와만 연관되어 있지 않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도 연관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화목의 결과로 더 이상 우리를 원수로 취급하시거나 적대감을 가지고 보시기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근본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님께 대한 죄인의 태도 변화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루어내신 객관적인 사건이다. 하나님께 대한 적의를 멈추는 것을 포함한 죄인 편에서의 태도 변화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화목의 원인이 아니고 그 결과이다. 우리가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된 것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이다(롬 5:10). 그 때문에 바울은 여기에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절)는 구절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화목이 우리가 “받아야 하는” 어떤 것, 곧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목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상관없이 그 이전에 이미 성취된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사람과 화목을 이루신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는 이루실 수 없는 일을 죄인들을 위해 이루실 수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22.2)
 하나님과의 화목은 죄인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참조 1절). 그것은 또한 죄인들을 그들의 이웃들과 화목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이에 대한 성경의 대표적인 증언은 에베소서 2장에 기록되어 있는것으로, 고대 세계에서 가장 심한 적대적 관계들 중 하나였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이야기이다. 한때 외방인이었던 사람들, 곧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는데,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분이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엡 2:12-16). 이것은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중에 우연히 생겨난 부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의 결과들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는 그 필수적 요소들 중 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면 그 결과로 우리들 사이에서도 화목이 이루어지게 된다. (222.3)
 E. 속죄 행위의 범위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본래부터 실제 구원받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만을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예정설의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양들을 위하여(요 10:1-15, 26, 27), 교회를 위하여(행 20:28; 엡 5:25) 그리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막 10:45) 자기 생명을 주신다고 하는 성경구절들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중보의 대상을 제자들과 그들이 구원한 사람들만으로 국한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 또한 그들이 제시하는 예정설의 근거이다(요 17:9, 20, 24). (222.4)
 하지만 신약의 기자들이 속죄 행위가 그 목적에 있어서는 보편적이어서 모든 죄인에게 다 유효하지만 실제 효력은 개인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미치는 행위라고 본다. 이와 관련해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을 “세상”이라는 보편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였으며(요 3:16. 17), 또한 그분의 죽음을 “세상 죄”를 처리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요 1:29; 요일 2:1, 2; 참조 4:14). 마찬가지로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죽으셨으며(고전 5:14, 15), 또한 그분이 자신을“모든 사람을 위하여∙∙∙속전”으로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딤전 2:6).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 3:9)고 단언하고 있는 베드로후서 및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히브리서(히 2:9)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무제한적인 것으로 본 초기교회의 견해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222.5)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이 그분이 그분의 택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또한 그분의 죽음이 분명 그들에게 그 효력을 미친다고 하는 견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 4:10)는 바울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큰 원(“모든 사람”)이 작은 원(“믿는 자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속죄는 모든 사람을 위해 계획되었고, 모든 사람에게 제공 되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족하게 주어졌다. 하지만 그 효력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에 응답하는 사람들에게만 발생한다(참조 구원론 I. D). (222.6)
 그리스도의 사명의 목적에 대한 이제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신약의 기자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일의 의미를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로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힘썼다. 바울을 비롯한 신약의 여러 기자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다양한 비유적 표현은 우리의 죄된 상태의 다양한 측면을 비추어준다. 우리는 그것들을 희생, 구속, 대속, 화목제물, 의롭다 하심, 화목케 하심 등으로 칭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다 중요한 것으로 그 중 어떤 것도 등한시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중에 어떤 것도 십자가의 의미의 다양한 측면을 모두 망라하여 나타내지는 못한다. 속죄에는 이 외의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죄를 처리하고 반목을 제거하는 것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 이상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속죄의 열매인 새로운 감사의 삶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라남은 결코 그 중요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그리스도인 경험의 한 부분이다. 속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우리를 그러한 삶으로 이끌어 간다. (2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