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속적 죽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살전 5:10). 그분은 단순히 그분의 원수들의 손에 의해서 죽으신 것도 아니며, 또한 자기 자신의 죄나 죄책으로 인해 죽으신 것도 아니다. 그분은 분명히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 5:8).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으며(엡 5:2), 또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갈 3:13).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표하는 분이시다. 바울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는 말로 이를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대표자의 죽음은 그가 대표하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대표자”는 그 의미가 확대될 수도 있고 축소될 수도 있는 용어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무거운 짐과 두려운 형벌을 함께 나누기 위해 오신 것이라면, 우리는 그분이 죽으신 것이“나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나를 대신한” 것이기도 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는 그분의 삶과 죽음으로 인해 나는 더 이상 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16.1)
 어떤 사람들은 “대속”이라는 오래된 용어가 그 의미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고, 심지어는 그 자체가 잘못된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이유로 깊은 생각 없이 이 용어를 배척하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약의 수많은 말씀들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진정으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공관복음서 중 두 책에서 우리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안티 폴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뤼트론)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참조 막 10:45)는 매우 잘 알려진 대속물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대속물”은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지불하는 것, 곧 맞교환하기 위해 주어지는 돈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경우 사람을 석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다. “대속물”이라는 용어에는 교환의 개념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본디 “∙∙∙대신에” 또는 “∙∙∙를 대신하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안티(anti)라는 전치사 또한 그렇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자신을 죄인들과 동일시하셨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동일시, 즉 자신이 죄인과 동일시되는 것에 대하여 그분의 영혼은 움츠려들었다(마 26:36-39, 42-44; 눅 22:41-44). 이것은 그분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하신 버림받음의 절규가 갖는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예수께서는 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번민에 빠지셨는가? 그분이 당하시고 있는 심한 고통 때문이었는가? 그리스도보다 더 평온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분이 두려워 피하고자 하셨던 것은 그와 같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인이 받는 형벌로서의 죽음으로 그 죽음은 죄 없는 존재인 그분에게 아버지로부터의 분리, 곧 그분으로부터 버림을 받음의 공포를 경험하게 하는 그러한 죽음이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위하여[휘페르]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라는 바울의 말은 이와 관련된 언급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의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신 것이다. 이것은 그분이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운명을 사람이 헤아리기 힘든 방법으로 대신 짊어지셨음을 의미한다. 사도는 예수께서 죄인이셨다고 말하기를 원치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을 죄인과 동일하게 취급하셨다는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가능한 한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216.2)
 “대속물[뤼트론]”은 신약의 여러 구절에서 발견되는 한 단어군(群)에 속한 단어로, 이 단어군에 속한 단어들은 로마서 3:24; 에베소서 1:7; 디도서 2:14; 히브리서 9:12, 15(한글판 성경에는 “속죄”“죄를 속하다”로 되어 있음), 베드로전서 1:18,.19에서처럼 보통 “구속하다” 또는 “구속”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말들이 지닌 본질적인 의미는 “구원(deliverance)”이 아니라 “대속물로 드림(ransoming)”이다. “대속물”로서의 죽음과 대속적인 죽음은 신약의 기자들이 초기 신자들에게 십자가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하기 위해 쓴 묘사들 중 하나이다. 바울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동일한 생각을 나타내었는데, 그의 경우에는 대부분 안티라는 전치사가 아닌 휘페르라는 전치사를 썼다. 휘페르고린도후서 5:15디모데전서 2:6에서처럼 종종 “∙∙∙대신에”라는 의미의 안티와 매우 근사한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을 위하여” 또는 “∙∙∙을 대신하여”라는 의미의 대표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인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사실 “대속물”의 참의미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안티뤼트론]으로 주셨”다(딤전 2:6)고 말한 바울의 말씀에 잘 드러나 있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와 있는 “대속물”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는 구절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안티휘페르를 병행하여 사용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 구절에서 뤼트론이란 단어가 안티와 합성되어 쓰이고 있는 것이다. “대신하는 속전[substitute-ransom]”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복합명사는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다른 사람들이 당해야만 하는 것을 그분이 대신 떠맡아서 당하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217.1)
 이런 대속의 개념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기록된 베드로전서 2:24에도 명백히 드러나 있다. 또한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린 바” 되었다고 말하는 히브리서 9:28에서도 이와 동일한 개념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말을 단순히 죄된 사람들과 함께 사시므로 겪게 된 좌절감과 어려움을 예수께서 참고 견디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죄를 담당”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문맥상 죄를 담당하는 것이 곧 죄의 형벌을 담당하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는 구약의 여러 구절을 보면 명백히 드러난다. 에스겔은 이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악인의 악도 자기에게 돌아가리라”(겔 18:20). 이와 동일하게 민수기 14:34도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에서 방랑생활을 한 것이 하나님께 반역한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자신들이 담당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은 곧 그분이 우리가 받아야 마땅한 형벌을 담당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강력한 증거에 비추어볼 때, “대속”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곧 그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신약이 채택한 접근 방법들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217.2)
 3. 속죄— 화목제물의 차원
 그리스도의 죽음은 화목제물로서의 죽음이라는 측면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러한 측면은 바울이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의 중요한 부분에 등장하는 힐라스코마이 단어군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힙라스테리온]로 세우셨으니”(롬 3:24, 25). 힐라스코마이 단어군에서 파생된 용어들은 전통적으로 “propitiation”(달램, 화목제물) 또는 “to propitiate”(달래다, 화목케 하다)로 번역되어 왔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이 용어들을 “expiation”(속죄) 또는 “to expiate”로 번역하고 있다. 속죄하는 것은 죄책을 소멸시키고 범죄에 대한 대가를 치름으로 문제를 종결 짓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화목케 하는 것(달래는 것)은 어떤 사람을 달래고 회유하여 그 사람으로부터 호의를 얻거나 잃었던 호의를 되찾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선물을 줘서 노를 풀게 하는 경우들에 적용된다. 이와 같은 용법이 고대 헬라어에서 이 용어의 가장 일반적인 용법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18.1)
 현대의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며, 그 효력으로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로운 선물을 받게 된다는 이 전통적 견해에 반대한다. 힐라스코마이 단어군에서 파생된 용어들이〈70인역〉에서 종교적인 용어로 쓰일 때는 대부분의 경우에 동일한 용어들이 비종교적인 용어로 쓰일 때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사람들은〈70인역〉에 나타난 이 용어들의 종교적 의미가 바울 사상의 배경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용어들은 비종교적인 용법에서는 “화해”“달램”을 의미하지만 종교적 용법에서는 그와 달리 죄책이나 오욕을 제거하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분노를 가라앉히고 죄인들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바꾼 변덕스럽거나 앙심을 품고 있는 신적인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218.2)
 이것은 귀중한 연구에 의해 도출된 중요한 결과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최종적인 결론은 아니다. 분노와 화해에 대한 비종교적 견해들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견해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생각에 대해 약간의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분명 고대 이교의 신들처럼 달래거나 화해시킬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힐라스코마이 단어군을 그 배경으로 볼 때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속한 행위, 곧 우리의 죄책과 죄의 오욕을 제거한 행위이다. 하지만 분노와 화해에 관한 그 어떤 견해도 그리스도의 속죄 행위와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다양한 진술에 나타나 있는 사상을 간과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218.3)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구속에 대해 바울이 매우 감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구절인 로마서 3:21-26이 이에 대한 좋은 실례이다.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이 본문은 사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라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선포로부터 시작된 논증 과정의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 과정에는 그 시작점에서뿐 아니라 그 후로 이어지는 여러 단계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반복되어 언급되고 있다(롬 2:2, 4, 5, 8, 16; 3:4-6). 바울은 죄인의 구속이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세우”신(롬 3:25)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다고 설명한다. 이 편지의 처음 세 장의 문맥을 살펴볼 때, 그리스도의 속죄가 화목의 요소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진노와 심판에 관한 언급들이 면밀히 잘 짜인 이 논증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이르러오는 과정 속에서 진노와 심판이 철회되었음을 나타내는 표현들을 찾도록 이끌어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속죄를 이루시고 또한 화목케 하셨는데, “그의 피로 인하여”(25절)라는 구절이 그분이 어떻게 그 일들을 이루셨는지를 알게 해준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25절 상단)은 그들의 죄책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자원하여 그것들을 자기에게로 옮기셨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죄를 삼으”셨으며(고후 5:21), 또한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처리하셨기 때문에 죄는 더 이상하나님과 인류사이의 장벽이 되지 못한다. (218.4)
 이 문단에서 사용된 힐라스테리온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실마리를, 이 단어가 신약에서 이곳 이외에 유일하게 쓰이고 있는 히브리서 9:5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는 동일한 단어가 매년 한 번씩 속죄의 피가 뿌려진(레 16:11-14; 참조 성소 I. B. 1) 지성소에 있는 법궤의 덮개를 가리키는 “속죄소”로 번역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3:25에서도 이 단어를 그렇게 번역할 것을 제안하였고, 마르틴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루터는 이 단어를 “Gnadenstuhl”(“시은좌/속죄소”)로 번역하였음-편집자주] “속죄소”로 번역하자는 주장에 대해서 말을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219.1)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화목에 대한 전체 개념을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에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 거부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성경에서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으므로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진노를 단지 원인과 결과의 진행 과정을 가리키는 어떤 비인격적인 표현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바울의 생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이 용어가 표현하고 있는 진노는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자주 경험하는 변덕스럽고 제어하기도 어려우며 종종 비이성적으로 감정을 표출하기도 하는 그런 종류의 분노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노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반응일 뿐 아니라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반대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219.2)
 사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거룩하심, 죄에 대한 그분의 반응, 죄인들에 대한 그분의 흔들림 없는 사랑, 이 모든 것들이 결합된 상태를 성경이 속죄와 화해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존재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기 위해(롬 8:4)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죄책에 대한 용서를 저지시키는 장애물이 모두 제거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의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고하신 형벌을 스스로 담당하셨다. 그분이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것은 바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 때문이었다. 이 사랑으로 인해서 용서가 가능케 되었고, 또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간격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요구하는 것을 그분의 사랑이 채웠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거룩함이 영원히 드러남과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온전히 증명되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공의와 자비가 서로 입 맞추었다. (219.3)
 바울보다 약 40년 후에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라고 기록하였다(요일 2:2). 그는 이 말의 의미를 매우 감명 깊은 언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우리는 이 성경절에서 십자가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견해가 무엇인지를 매우 잘 보여 주는 널리 알려진 표현 가운데 하나를 찾을 수 있다. 요한은 하나님 자신이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죄책을 소멸하고 그분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매우 귀중한 선물[그리스도]을 주셨다고 단언한다. 사도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 그것도 모든 것 위에 가장 뛰어난 사랑이라는 것을 확고히 알게 해 준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사랑은 단순히 죄를 덮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효과적으로 싸우는 것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속죄와 화목제물인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의에 대한 표현이며 증거이다(롬 3:26). “속죄”“화목”이 우리가 뜻하는 바를 잘 나타내는 이상적인 단어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단어들보다 더 적절한 것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신중을 기하면서 이 단어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더군다나 우리의 관심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있는 것이지 그것들을 표현하는 단어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단어는 매우 중요한 두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죄의 실재와 그것의 심각성에 대한 증언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에 대한 증언이다. 이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노가 죄인들을 피해갈수 있게 해 주는 한 선물을 주셨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25절)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이 두 가지 측면 중 하나를 제거하는 것은 사도들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상당 부분 훼손하는 것이다. (219.4)
 4. 의롭다 하심[칭의]
 희생, 구속, 대속 그리고 속죄와 화목 둥,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한 이 개념들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중요한 국면들을 묘사한다. 속죄를 나타내는 은유는 이것들 외에도 더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로마서와갈라디아서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참조 구원론 III. A. 1). 이 접근 방법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하나님의 율법과 연관시키므로 그것들의 의미를 구원적인 측면에서 정의한다(롬 3:24-26; 5:16-21). 사실상 사도는 하나님은 죄를 정하고 벌하시는 일에 있어서는 공의로운 분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시는 일에 있어서는 자비로운 분이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이 두 가지 속성 모두를 조화롭게 나타내 보이시는 일에 있어서는 탁월한 분이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롬 3:23-26). “의롭게 하다”라는 말의 성경적 의미는 의롭다고 선언하고, 의인으로 받아들이고, 의인처럼 대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원래 석방 평결과 더불어 정죄의 가능성까지도 모두 제거한 지점에 다다른 심의 과정을 가리키는 사법적인 용어이다(참조 잠 17:15; 롬 8:33, 34). (220.1)
 그렇다면, 우리는 정죄 받아 마땅한 죄인들로(롬 3:9, 23) 모두가 심판에 직면해 있는데(고후 5:10; 롬 14:10), 바울은 어떻게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의롭다 하신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롬 4:5). 그의 대답은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예비하신다는 것이다. 죄인들을 대신해서 사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롬 8:4)를 이루셨다. 그분은 자기의 피로 그들의 죄를 제거하셨다(롬 3:25; 5:9). 하나님께 대한 그분의 순종으로 인해서 그분의 백성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자들로 받아들여졌는데(롬 9:19), 이는 그분이 의로운 삶을 사시고 불의한 자가 당해야 하는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자신이 그들을 위해 저주가 되어 그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기 때문이다(갈 3:13).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 곧 그리스도의 죄 없는 삶과 죽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되었다(롬 5:18). 하나님께서 그분을 “우리에게∙∙∙의로움”[또는 “우리의 의”]이 되게 하셨다(고전 1:30). (220.2)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되 올바른 방법으로 정당하게 구원하신다.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과 죽음은 하나님 공정한 의를 손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기 위하여 변경되거나 중단되지 않았다. 오히려 율법은 나를 대신해서 행하시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 바울에 말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신다(롬 3:26)는 것을 증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제물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분 안에서 죄를 심판하시고 또한 그것을 정당하게 처리하셨다. 이를 통해서 그분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실 수 있는 근거를 보여 주셨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가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26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다. (220.3)
 바울은 여기에 덧붙여서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25절)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믿음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근거가 아니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나의 계정에 포함시킬 수 있게 하는 유효한 수단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빈손을 내밀어서 그로부터 그분의 의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의롭다 하심은 본질적으로 관계 회복의 문제이다. 이것은 “atonement(속죄)”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하나 됨”, at—one—ment)이기도 하다. (221.1)
 5. 화목케 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