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대속”이라는 오래된 용어가 그 의미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고, 심지어는 그 자체가 잘못된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이유로 깊은 생각 없이 이 용어를 배척하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약의 수많은 말씀들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진정으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공관복음서 중 두 책에서 우리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안티 폴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뤼트론)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참조
막 10:45)는 매우 잘 알려진 대속물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대속물”은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지불하는 것, 곧 맞교환하기 위해 주어지는 돈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경우 사람을 석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다.
“대속물”이라는 용어에는 교환의 개념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본디
“∙∙∙대신에” 또는
“∙∙∙를 대신하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안티(
anti)라는 전치사 또한 그렇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자신을 죄인들과 동일시하셨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동일시, 즉 자신이 죄인과 동일시되는 것에 대하여 그분의 영혼은 움츠려들었다(
마 26:36-39, 42-44; 눅 22:41-44). 이것은 그분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막 15:34)라고 하신 버림받음의 절규가 갖는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예수께서는 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번민에 빠지셨는가? 그분이 당하시고 있는 심한 고통 때문이었는가? 그리스도보다 더 평온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분이 두려워 피하고자 하셨던 것은 그와 같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인이 받는 형벌로서의 죽음으로 그 죽음은 죄 없는 존재인 그분에게 아버지로부터의 분리, 곧 그분으로부터 버림을 받음의 공포를 경험하게 하는 그러한 죽음이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위하여[휘페르]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21)라는 바울의 말은 이와 관련된 언급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의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신 것이다. 이것은 그분이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운명을 사람이 헤아리기 힘든 방법으로 대신 짊어지셨음을 의미한다. 사도는 예수께서 죄인이셨다고 말하기를 원치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을 죄인과 동일하게 취급하셨다는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가능한 한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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