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tonement(속죄)”라는 영어 단어의 의미
 “Tο atone(속죄하다)”“atonement(속죄)”라는 영어 단어들은 그렇게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나 헬라어 단어와 어원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단어들이 아니다. 이 단어들은 “at one(하나가 되다)”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들로서 어원적으로는 관계가 화목 된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은 그와 화목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atonement(속죄)”“at—one—ment(하나 됨)” 또는 “화목”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 용어들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점차적으로 그 본래의 의도대로 사용되지 않고 단지 화목을 해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과정이라는 제한적인 의미로만 쓰이게 되었다. 따라서 잘못을 “속죄하는 것”은 곧 관계의 단절이 가져 온 나쁜 결과들을 소멸시키고 이전의 화목한 관계를 회복시키는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212.1)
 2. 본래의 조화로운 관계
 성경의 속죄 교리는 하나님과 사람은 삶과 관심사에 있어서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가정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한 관계 곧 하나가 된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곧 그러한 모습이었다(창 1-3장). 이와 같은 가정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이 연합의 관계에 근본적인 틈이 있다고 말하는 가르침과 대조를 이룬다(창 3:22-24; 사 59:1, 2; 롬 4:12; 엡 2:1).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삶이다. 사람들은 “어두움∙∙∙에 앉”아 있고(눅 1:79;참조 요 12:46),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으며(엡 4:18),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으며”(골 1:21), “세상에서∙∙∙하나님도 없는 자”들이다(엡 2:12). 그들은 또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다(롬 8:7;참조 5:10). 이는 이방인뿐 아니라(롬 1:23, 25, 26) 율법을 소유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유대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롬 3:9, 23).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구약의 메아리이고(왕상 8:46),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시 14:3). (212.2)
 3. 격리된 이유
 성경에는 사람이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격리된 이유가 또한 잘 기술되어 있다. 우리의 죄, 곧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지속적인 불순종이 바로 그 이유이다. 가장 근본적인 죄는 율법과 그 율법을 주신 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인데, 이는 “죄는 불법”이기 때문이다(요일 3:4). 율법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가장 중대한 반역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들에게 잘못된 일을 행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다(참조 창 39:9; 시 51:4). 율법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비인격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품성과 뜻의 사본이다. 율법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인데, 그것은 율법이 비인격적인 문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인격적인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하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범법이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 결과는 곧 사람이 죄의 삯인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범죄에 대하여 관대한 분도, 그것을 간과하시는 분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바울은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라는 말로써 이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에게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는 엄중한 경고가 주어진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죄인은 사실 그의 “허물과 죄로” 인해 이미 죽은 자이다(엡 2:1). (212.3)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차가운 시선으로 죄인들을 바라보시기만 한다거나 그분이 분노하심으로 그들에게서 돌아서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간단없는 적개심과 그에 따르는 혹독한 결과들을 매우 강하게 선포하고 있는 바로 그 동일한 성경(사 59:1, 2; 합 1:13;참조 요 1:29)이 또한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다(출 34:6; 신 7:6-8; 요일 4:8, 16). 하나님은 죄인들을 파멸시켜서 그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죄악에서 그들을 건져내시기 위해 계속적으로 그들에게 접근하신다(창 3:9; 렘 3:11-14; 호 6:1; 눅 13:3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오셔서(눅 19:10)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죄인들의 손에 돌아가게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자비의 최종적 행위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롬 5:8;참조 율법; 죄 IV. A-B). (213.1)
 4. 속죄와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십자가에서의 그분의 죽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신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의 삶의 중요성을 결코 등한시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한 목소리로 “우리가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고 말한다(롬 5:10).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2). 죄인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죄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참으로 심각한 곤경에 빠져 있다. 죄인은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없으며(잠 20:9), 어떤 율법의 행위도 결코 그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지 못한다(롬 3:20; 갈 2:16). 그러므로 다른 어떤 사람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들을 위해 필요한 일 곧 속죄의 일을 성취해야만 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되 죽기까지 내어주신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통로이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게 되는데(엡 2:18), 이 나아감은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신(롬 3:25) 바로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당당한 나아감이다(엡 3:12). (213.2)
 신약이 속죄의 수단을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부터 기인된 그분의 선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다음 성경 본문은 가장 널리 알려진 성경절들 중 하나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고후 5:19)고 하는 바울의 말과 그 의미가 일치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척도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으며(롬 5:8), 또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롬 8:32)고 선언한다. 그에게 있어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최종적 증거는 바로 십자가였다. 하지만 이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각기 다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둘 모두가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났다. 그는 다음의 성경 본문들에서 속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설명하고 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213.3)
 5. 하나님의 사역
 위의 성경 본문들은 구원 사역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히 하나라는 것을 명백히 가르쳐준다. 이같은 이해는 우리의 구원이 구원 사역의 배경인 아버지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우리에게 이르러온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므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구원 사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한편으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하고 내켜하지 않으시며 전적으로 공의로우시지만 전혀 융통성이 없어서 형벌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결코 변치 않으시는 아버지로부터 속죄를 쥐어 짜내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약의 사상을 희화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느 정도는 화목의 필요성을 보여 주는 것이 맞지만(롬 1:18; 2:5;참조 살전 1:10), 속죄 자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아들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것을 준비하셨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원의 계획은 아버지 혼자서 고안하시고 시작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계획이 실재적으로 완성되도록 진척시키셨다. (214.1)
 D.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
 신약은 이 같은 배경적 요소들 외에도 다른 여러 용어와 은유 및 상징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죄의 결과들을 소멸시키시고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실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2,000년 동안의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속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수많은 이론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그 중 어떤 것도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속죄에는 분명 본질적인 신비가 존재한다 사람이 속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속죄 문제를 신약에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는 몇몇 문제와 함께 살펴봄으로써 그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214.2)
 1. 희생적인 죽음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이 자주 구약의 제사제도로부터 기인된 용어들을 통해 묘사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구약에서는 속죄가 일반적으로 제사에 의해 이루어진다(출 29:36; 레 4:20; 민 15:25). 그런 면에서 희생적 의미를 가장 완전하게 구체화한 제사는 그 속에 대속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매일 드리는 제사 곧 번제(播祭)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제사는 어떤 특정한 범죄 행위와 관계된 제사가 아니라 죄된 백성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지속적으로 드려진 제사였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 곧 하나님을 적대시한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진 제사들이었다(참조 성소I. C. 3). 이 같은 범죄는 반드시 바로잡아야만 하였다. 하지만 성경은 속죄의 피에 관해서 기록하면서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저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으니”(레 17:11)라고 말하고 있다. 그 제사들은 죄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방편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고안하신 그 제사들은 언약의 범주 안에서, 그리고 그 언약의 은혜가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 시행되었었다. 또한 희생제물 자체 안에 속죄를 가능케 하는 어떤 가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속죄가 이루어진 것은 제사가 하나님께서 속죄를 위해 드리도록 지정하신 방법대로 드려졌기 때문이었다. 제물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하였는데(레 1:3; 신 15:21), 이는 그것들이 완전해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속죄를 단 한 번의 행위가 아닌 반복되는 행위로 본다면, 제물의 죽음은 그 당시에는 분명히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레 1:5; 3:2; 4:4). 이러한 중요성은 제사 의식 자체의 일반적 특성에도 나타나 있다. 매일 드리는 제사는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로 인식된 구약적 배경에서 시행된 것이다(창 2:16, 17; 겔 18:4, 20). 하지만 구약의 하나님께서는 이 제도를 통해 죄를 뉘우치는 자신의 백성에게 희생제물의 죽음이 죄인의 죽음을 대신할 수 있다는 은혜로운 말씀을 선포하셨다. 이 둘의 관계가 너무나도 명확하므로 신약에서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것을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는 선언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214.3)
 신약은 이와 함께 옛적의 제사가 그 자체로 죄를 용서하는 근거가 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히브리서는 그 제사들이 표상 외에는 다른 어떤 용도로 쓰일 수 없음을 매우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것들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하지 못하는,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의식에 불과한 것들이었다(히 9:6-10). 여기서 “개혁”은 문맥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물로 드려진 것이 단지 짐승에 불과하였던 것(히 10:4)과 그 제사가 반복적으로 드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1, 2절)이 그 제사가 속죄의 능력이 없었던 것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제사제도가 성취되고 확장되었음을 발견한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우리에게 지상성소 제도가 “현재까지의 비유”(히 9:9)라고 가르쳐준다. 이는 지상성소 제도가 “계시될 믿음의 때”(갈 3:23;참조 히 13:11, 12), 곧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주어졌던(히 9:10) 표상이었음을 의미한다. (215.1)
 신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를 위해 드려진 희생으로 설명하고 있다. 침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초기에 그분이 희생제물로 드려질 것임을 알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선포하였다. 바울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희생제물로서의 죽음으로 보았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그분에게 그분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꾸민 원수들을 물리치실 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분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셨다(롬 4:25).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오셔서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엡 5:2). 그분의 피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마 26:28) 피였다 히브리서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일을 구약의 성소 봉사에 견주면서 그분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해 하늘에 있는 장막으로 들어가신 대제사장으로 묘사한다(히 9:12). (215.2)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빈번한 언급은 또한 희생제물로서의 그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만큼이나 자주 그분의 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바울은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그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롬 5:9),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며(롬 3:25),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고(엡 1:7),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으며(엡 2:13),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로 자기와 화목을 이루게 하셨다(골 1:20). (215.3)
 자신의 피를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언약의 피”라고 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언급 그리고 그 피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라고 한 베드로의 언급과 더불어 이 말씀들은 우리로 하여금 피가 의미하는 것이 광포한 행동에 의해 탈취된 생명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 경우에는 희생제물로 드려진 그리스도의 생명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몇몇 구절(구체적으로는 창 9:4-6신 12:23)을 근거로 피 흘림은 단지 예수에 의해 해방된 생명을 가리키는 상징일 뿐 그분의 생명 자체가 희생제물로 드려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이 견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가 그들의 해석을 뒷받침해 주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성경 구절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피가 생명과 동일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희생과 관련해서 지니고 있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가장 자주인용되는 말씀인 레위기 17:11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피가 제단에 놓이기 위해서는 죽음이 있어야만 한다. 이는 곧 생명을 드리는 일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히브리서는 구약의 제사 의식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피”“죄를 속하려고 죽으사”라는 구절과 연결시킴으로써(히 9:14, 15) 희생적 의미에서 피가 생명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의미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피는 죽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로 죽음만을 바라보게 하지 않고 생명도 바라보게 한다. (2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