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나사렛 예수께서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가지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긴 하였지만(마 16:13-17), 그보다는 그분의 사명과 사역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점차적으로 분명해짐에 따라 그들은 그분의 독특한 위격이 그들을 위해 행하실 수 있는 일에 대하여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206.1)
 A.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신약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예수께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그 기자들이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은 그저 이 땅에 “출현”한존재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방식들에 대해 특별한 통찰력을 지닌 재능 많은 갈릴리 사람에 불과한 존재도 아니었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존재였다. 이와 관련된 기술이 요한복음에만 40회 정도 나온다. 그리스도 자신도 그분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일임을 자각하고 계셨으며, 또한 그러한 자각을 자주 표현하기도 하셨다. 이 보내심을 묘사하기 위해 두 단어가 쓰였는데, 하나는 일반적 의미로 쓰인 펨포이고 다른 하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보내신 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의 친밀한 관계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아포스텔로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종으로서 자신이 수행하여야만하는 명령이 주어져 있음을 자각하고 계셨다. 누가는 약 18회에 걸쳐서 헬라어 동사 데이(“..해야 한다” 또는 “∙∙∙해야 할 필요가 있다”)를 사용함으로 이것이 분명한 사실임을 강조하고 있다(눅 2:49; 4:43; 9:22; 24:44 등). 예수께서는 자신이 단순히 하나님의 많은 사자(使者)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사자이자 아들(Messenger-Son)이심을 아셨다(막 12:6, 7), 아버지께서 그분을 구별하여 이 땅에 보내시며(요 10:36) 그분에게 권능을 주신 것(요 8:42; 마 9:6)은 그분으로 하여금 그분 자신의 뜻을 행하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다(요 4:34; 5:30; 6:38).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사명의 여러 목적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206.2)
 1. 하나님의 약속들을 확증하심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은 창세기 3:15의 원복음(原福音)에서 시작하여 구약 시대 전반에 걸쳐서 조상들에게 계속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을 확증하기 위함이었다(사 7:14; 9:6; 미 5:2). 아들의 오심과 관련된 예언들에는 두 가지 큰 줄기가 있다. 하나는 구약의 제사제도에 예시되고(창 4:3, 4; 레 1:3-9; 17:11) 선지자들에 의해서 선포된 것처럼(사 52:13, 14; 53:3-6; 단 9:26; 슥 13:1, 7) 그분이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구주로 오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그분의 나라의 왕으로 임하시는 것이다(창 49:9, 10;시 2편;렘 23:5, 6). (207.1)
 2.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심
 사람들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확실히 인식하게 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은 예수께서 성취해야 하는 필수적인 사명이었다(마 4:17; 눅19:11-27). 공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전파하신 기별의 중심 주제였던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이르러 올 나라이면서 동시에 그분의 위격과 사역을 통해 실체로서 이미 임한 나라로 선포되고 있다(마 12:28). 그분이 계신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다 현재든 미래든 그 나라의 일원이 되는 비결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마 7:23; 25:41). (207.2)
 3.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나누어주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나누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의 한 부분인 것은 이 지식이 영생을 얻기 위한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요 17:3). 하나님은 구약에서 자주 택한 백성의 아버지로 등장하시기도 하시지만(신 32:6; 사 22:21; 63:16; 말 1:6 등), 또한 창조자와 통치자로 나타나시기도 한다(시 33:6; 사 40:12-17; 45:18; 렘 10:12 등).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이 신뢰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또한 사랑과 두려움으로, 이러한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마음에 모실 수 있도록 그들을 도우셨다. 이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은 아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마 11:27; 눅 10:22). 그분은 가르침보다는 행동을 통해서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더 잘 나타내 보이셨는데, 이는 그분의 속에 아버지께서 존재하고 계셨기 때문이다(요 14:7-10). 그분은 심중의 사랑에 호소하시며 의지의 굴복을 요구하시는 성육신하신 계시였다. (207.3)
 4. 하나님의 종이 되심
 종이라는 개념은 신약에서 예수의 사역과 사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그분은 스스로 자기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는(마 20:28) 것이라고 단언하셨다. 하나님의 종에 대한 개념은 종의 노래들로 알려져 있는 이사야서의 네 노래에서 직접 빌려온 개념이다(사 42:1-4; 49:1-6; 50:4-9; 52:13- 53:12). 이 노래들에 언급되어 있는 종이 어떤 한 개인인지 혹은 집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지칭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성경 본문에 나타나 있는 종의 사역에 대한 이해는 그를 이스라엘 백성 전체보다는 한 개인으로 볼 때에 더욱 수월해진다.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고(사 42:1), 공의를 베풀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1, 3, 4절), 이스라엘(사 49:5, 63)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자신의 사역의 손길을 뻗으며(사 42:1, 4; 50:4), 세계적인 구원 사역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일하며(사 49:1-6), 자발적인 대속적 죽음을 통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존재이다(사 53:4-6, 8, 10-12). (207.4)
 예수께서는 성취와 관련된 매우 강한 관용적 표현을 통해 이사야 53:12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자기가 구약이 말하는 그 종임을 자각하고 있음을 증언하셨다(눅 22:37). 마태도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치유 봉사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사야 53:4을 인용함으로 그것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마 8:17). 누가 또한 빌립이 구스 내시를 만날 일을 기록하면서 이사야 53:7, 8을 직접 인용하여 그것을 예수께 구체적으로 적용하였다(행 8:32, 33). 베드로의 첫번째 편지에서도 고난 당하는 종에 대한 직접적인 암시들이 여럿 발견되는데, 이는 이 사도가 이사야서의 구절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함을 보여 준다(벧전 2:22=사 53:9; 벧전 2:24a=사 53:12; 벧전 2:24b=사 53:5; 벧전 2:25=사 53:6). (208.1)
 본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이신(빌 2:6) 그 말씀이 종의 본성(7절)을 취하신 것은 그분의 사명의 한 부분으로서 종의 형체(5-7절)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삶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자신의 참된 인성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 또한 사람이 하늘 아버지께 마땅히 표해야 하는 완전한 순종을 그분께 표하기 위하여, 순종하시되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208.2)
 5. 모본을 남기심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생생한 화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당신의 양식이라고 공언하셨으며(요 4:34), 또한 그분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그분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요 6:39;참조 5:30)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셨다 첫째 아담과 달리, 둘째 아담은 그 분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셨으며(요 15:10; 참조14:31),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요 8:29), 자기를 보내신 이의 일을 이루는 일(요 4:34)에 열심을 다하셨다. 여기에는 악의 세력과의 지속적인 투쟁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분은 악의 세력과의 이 투쟁 속에서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으며 또한 그 고난을 통해서 구속주로서 “온전하게 되”셨다(히 5:8, 9; 2:10;참조 마 26:39-45; 눅 22:42-46). (208.3)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삶과 봉사의 모본적 특성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으라고 요구하신다(롬 8:29). 이를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고(롬 13:14; 참조 골 3:10), 주를 본받는 자가 되며(살전 1:6),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그분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하며(요일 2:6),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 5:2;참조 벧전 3:8, 9)는 권고가 주어진다. 베드로는 종들을 향하여 그들의 주인들에게 복종하되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경우에도 복종하라고 권고한 후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리라”(벧전 2:21)는 말을 통해 그같이 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208.4)
 6. 연약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고치심
 예수께서는 치유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연약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결코 경멸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삶을 통하여 사람들의 연약한 몸과 영혼이 자신의 사명 및 사역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셨다. 그분은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셨다(마 4:23).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사람들이 “병자를 시장에 두”었다(막 6:56; 참조 눅 4:40).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으며(눅 5:15),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였다(17절). 병을 고치는 것은 분명히 그분의 사명의 한 부분이었다. 예수께서는 열둘을 보내실 때 그들에게 천국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고 명하셨다(마 10:5-8;참조 눅 10:8, 9). (208.5)
 예수께서는 타락의 결과로 질병이 존재한다고 간주하셨다.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그분은 아프고 병든 자들을 고치는 일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셨다. 하지만 그분의 치유의 기적들은 그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경이로운 사건들에 불과한 것들이 아니었다. 마태는 가버나움에서의 예수의 치유 행위들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그분의 치유 봉사가 하나님이 임명하신 종의 사명 및 사역과 관련된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8; 사 53:4). 마태가 여기에서 속죄와 관련된 요소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예수의 치유 봉사에서 종의 일과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질병 사이에 존재하는 명백한 연결 고리를 발견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분의 치유 행위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예수의 사역의 한 부분이었다. 그것들은 그분이 때가 차서 이 땅에 오셔서 지금 그들 중에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또한 그 행위들에 의해 그것들에 동반된 하나님의 독특한 자기 계시의 초자연적인 초석이 놓여졌다. (209.1)
 7. 죄가 참으로 죄 된 것임을 보여 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