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주”는 역할과 관련된 의미로 한 특정한 사람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목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칭호들이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께 적용된 또 하나의 칭호인 “하나님의 아들”은 그분의 단순한 역할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 이 칭호는 본질적인 면에서 그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일하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과 그분의 관계는 직무상의 역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관계는 존재적 측면에서의 관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관해 신약이 제시하고 있는 전적으로 새로운 방향의 해석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행위 이상의 것, 곧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존재하고 있다. “아버지 품속에 있”던(요 1:18)그 아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는 아버지의 본질의 일정 부분이 아들 속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03.1)
 신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넓은 의미로 이해되기도 하고, 또한 좁은 의미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는 구약에 나타나는 이 용어의 특별한 용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용어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욥 1:6; 38:7). 때로는 왕이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진다(삼하 7:14; 시 2:7). 의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칭해지기도 한다(창 6:2).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기도 한다(출 4:22; 호 11:1). 하지만 이 칭호가 예수를 가리켜 사용될 때에는 그 의미를 다른 경우들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고 일컬으신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막 1:1)라는 구절로 시작하고 있다. 마태복음 2:15호세아 11:1“내 아들”을 명백하게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말한 고백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시고 난 후에 그것을 그에게 알려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다(17절). 예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마 27:47; 참조 요 19:7)고 말했다고 하면서 그분을 고소했던 사람들은 분명 그분이 이전에 그 같은 칭호를 쓰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 칭호를 인정하시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셨음이 명백하다(마 11:27; 마 13:34). 이 칭호는 요한복음에서 그 의미가 가장 완전하게 드러난다. 이 복음서에서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아들” 대신에 그냥 “아들”이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독특한 신분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사이의 관계는 서로 간에 매우 독특하게 맺어져 있는 관계이다(요 3:35; 5:19, 20). 예수께서는 스스로 이 칭호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셨으며(요 10:36), 유대인들은 그분이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 주장하는 것을 곧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요 5:18) 것으로 이해하였다. (203.2)
 복음서 기자가 아닌 다른 신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교의 기별을 “그[하나님]의 아들에 관”한(롬 1:3) 복음으로 정의하고 있다. 바울은 그의 봉사 초기에 이미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갈 2:20)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진술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강조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뛰어나신다(히 1:1, 2). 그분이 “아들”이신 것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기(3절) 때문이다. 그분은 아들의 지위를 갖고 계시며, 그 지위로 인해 천사들보다 뛰어나시며(4, 5절) 모세보다 위대하시다(히 3:5, 6). (204.1)
 아들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아버지의 본성과 동일한 본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분은 아버지와 동일한 속성을 소유하고 계시며(요 5:21; 8:58; 21:7), 동일한 일들을 행하시며(마 9:2; 요 5:24-29), 또한 자신이 아버지가 받으시는 공경과 동등한 수준의 공경을 받으셔야 한다고 주장하신다(요 5:23; 14:1). 우리가 앞에서 고찰했던 칭호들의 의미가 부활에 의해서 강화되었던 것처럼 “아들”의 의미 또한 부활에 의해서 극대화되는데, 바울이 기록하였듯이 예수께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기(롬 1:4)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아들로서의 독특한 지위가 그분의 죽음 이전에는 불명확했을지 모르지만 그분의 부활 이후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았다. (204.2)
 b. 하나님이신 예수
 성경 기자들은 적어도 세 경우에서 매우 명확하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그 중 첫 번째 구절(히 1:8, 9)은 시편 45:6, 7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이 구절에서는 천사들보다, 모세보다, 또한 레위 지파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보다도 뛰어나신 바로 그 아들을 하나님으로 일컫고 있다. 예수께서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204.3)
 두 번째 명백한 진술은 요한복음 1:1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외적인 경우들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1절 마지막 부분의 경우에는 관사없이 쓰인 “하나님”이라는 명사가 이 문장에서 “이다”라는 동사의 주어와 술어를 분명히 구분해 줌으로써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번역이 올바른 번역임을 보여 준다. 또한 이 문장은 관사의 생략을 통해서 “말씀”의 속성과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은 말씀을 아버지 하나님과 구별함으로(1절 b) 그분이 동일한 본성을 아버지와 공유하고 있음을 단언하고 있다. 요한은 뚜렷이 구별되어 있는 1절의 세 문장 중 첫 번째 문장에서 말씀의 존재가 절대적이고도 초월적인 것임을 확언하고 있다. 그분이 태초, 곧 시간도 존재하지 않고 창조 사역도 시작되기 전에 이미 존재하셨다. 하지만 이 영원한 존재는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는 요한의 진술로 미루어볼 때 홀로 고립되어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분은 하나님과 구별된 존재였지만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존재였으며, 진정한 의미에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였다. 사도는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명백한 선언을 통해서 이를 확증하고 있다. 이 탁월한 선언문의 세 번째 문장에서 술어인 “하나님”에 강조점이 주어져 있는데, 이는 이 말씀의 본질에 관한 부적절한 추측들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영원히 선재하시고, 아버지와 개인적 교제를 나누시며, 14절에서 나사렛 예수로 그 신원이 밝혀지는 이 말씀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다. (204.4)
 예수께서 의심 많은 제자였던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라고 요청하셨을 때 그 제자가 말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는 고백이야말로 신약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가장 분명하게 밝혀주는 구절이다. 예수께서 이 같은 고백을 한 도마를 꾸짖지 않으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고백의 의미심장함을 인식할 수 있다(29절; 참조 계 19:10).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를 “우리 하나님”(시 99:8)으로 불렀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해야 한다(요 5:23). (205.1)
 c. 예수의 신성에 대한 자각
 우리는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에 대해 자각하고 계셨음을 입증하는 그분의 직접적인 주장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분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자신이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셨다. 그분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요 3:13)고 가르치셨다. 그분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고 단언하셨다. 그분은 더 나아가서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다(요 16:28)고 선언하셨다. 이 말씀들에 암시되어 있는 자신의 선재성에 대한 그분의 자각은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요 6:35)라는 그분의 질문과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는 그분의 기도에 더욱 분명히 드러나 있다. (205.2)
 자신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심에 대한 예수의 자각은 여러 번에 걸쳐서 그분이 사용하신 “나는·”이다“라는 주목할 만한 말씀들 속에도 잘 드러나 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요 6:35).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 ”나는“문이라”(요 10:7). “나는 선한 목자라”(11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내가 참 포도나무요”(요 15:1). (205.3)
 예수께서는 단순히 떡과 생명과 빛과 부활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 자신이 떡과 생명과 빛과 부활이시다. 그분이 “나는∙∙∙이다[내가 있다]”라는 위의 주장들을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분명 신성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이는 히브리어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70인역〉에서 “나는∙∙∙이다[내가 있다]”라는 구절이 이와 유사하게 강한 어조로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자주 쓰였기 때문이다(참조 신 32:39; 사 41:4:43:10등). 주께서 “나는∙∙∙이다[내가 있다]”라는 이 관용적 표현을 요한복음 8:24, 2813:19에서처럼 술어가 없이 사용하신 경우들에서도 동일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 표현이 가장 두드러지게 쓰인 곳은 요한복음 8:58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그분의 대적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그분을 “돌을 들어 치려하”였다(59절). 그들은 예수의 이 말씀을 자신이 변치 않는 신성을 소유하신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는 참람한 주장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205.4)
 4.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을 소유하신 한 분의 위격(位格)
 우리는 앞에서 나사렛 예수께서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을 동시에 가지셨다는 것을 신약이 가르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여전히 그리스도론의 가장 어려운 쟁점들 중 하나이며 매우 중요한문제이기도 한 하나의 질문이 놓여 있다. 어떻게 한 존재 안에 두 가지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과 그리스도의 비밀(골 2:2, 3)에 관해 숙고하라고 권하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는 계시를 통해서 그분에 대한 참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마 11:25-27; 16:17). (205.5)
 먼저 예수라는 한 위격(位格, person)안에 두 본성이 존재한다는 견해는 성경 자체의 요구를 받아들인 견해임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소유하신 존재로 소개하고 있다. 신약은, 예수께서 불가분의 관계로 연합된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을 소유하신 한 분의 위격이라는 사실을, 형식을 갖춰서 표현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분의 인성에 있어서는 다윗의 자손으로(롬 1:3), “성결의 영으로는∙∙∙하나님의 아들”(4절)로 일컫고 있다. 이는 곧 두 가지 본성이 한 위격 안에 공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히브리서는 서두에서부터 하나의 위격 속에 공존하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을 매우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1장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선포하는 반면에(2, 3, 6, 8, 10-12절), 2장은 그분의 인성을 자세히 설명한다(9, 14, 16, 17절). 한 위격 안에서의 두 본성의 연합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 존재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기술 속에서도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빌 2:6-8). 요한도 이와 흡사하게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며, 또한 신성과 인성을 소유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요 1:1-18). (205.6)
 초기 신자들은 이 같은 확신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사도들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한 위격에 인성과 신성의 속성들을 동시에 적용시켰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말씀의 능력으로 만물을 지배하시는 그분이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강하여지는 존재가 되셨다. 아브라함보다 먼저 존재하셨던 그분이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죽으신 그분은 모든 것이 충만하신 분이시다. 몇몇 경우에는 이 두 본성이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표현 속에서 서로 간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기도 한다. 그 중 하나가 그들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는 표현이다(고전 2:8). 성경에 명백히 나타나 있는 인성과 신성의 연합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표현들은 결코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이 두 본성이 신인(神人, God-man)이신 한 위격 안에서 연합된 것을 당연시할 때에는 이것들이 모두 합리적인 표현이 된다. (2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