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성경의 원칙에 따라 구현된 사람으로서의 삶
 사람들은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이 죽지 않았다고 말씀하실 때에 그분을 비웃었으며(눅 8:53), 또한 그분에 대하여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거짓 비난을 하기도 하였다(마 11:19). 이 두 경우 모두에 있어서 사람들은 그분을 자신들과 동일한 사람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분을 희롱하고 때리면서 사람들은 분명 그분이 그러한 취급을 당해도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눅 22:63). 그들이 멸시하고 비난한 대상은 진정한 사람이었다. 그분의 삶 전체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구약에 대한 신뢰에 그 바탕을 둔 사람으로서의 삶이었다. (199.4)
 그분은 구약의 말씀들을 따라 교육 받은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구약의 책들을 영감과 권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셨다. 그분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언제나 일관되게 사실에 관한 올바르고 신뢰할 만한 기록들로 간주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가르침 속에서 아벨, 노아, 아브라함, 소돔과 고모라, 이삭과 야곱, 광야의 뱀, 엘리야, 요나, 그리고 그밖에 구약의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언급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견해와 가르침이 성경의 원칙과 가르침에 기초한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마 19:16-22; 26:24; 눅 4:1-13; 18:31-33). 그분은 “모세는··하였거늘”(막 7:10), “이사야가∙∙∙잘 예언하였도다”(6절),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막 12:36) 등의 말씀을 시작으로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문맥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듯이 이 말씀들 또는 명령들의 권위는 그것들이 하나님이 하신 명령들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참조 마 19:45; 창 2:24). 그분은 또한 창세기 1장2장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승인 도장도 찍으셨다(마 19:4, 5; 막 10:6-8).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에 가장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들을 그분은 적어도 두 번 이상 아무 주저함 없이 자신의 예증들로 사용하셨다. (200.1)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기에 앞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에게 열심히 말씀을 해석해 주신 일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눅 24:25-27, 44, 45). 그분은 사람으로서 전 생애를 구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자신의 이해를 따라 사셨음이 분명하다. 그분에게는 삶에서 위기를 맞을 때와 다른 중요한 순간들에 언제나 구약의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분이 항상 구약의 빛을 따라 살며 그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음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200.2)
 2. 무죄한 인성
 우리는 예수의 인성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판단할 때 신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명확한 증언, 곧 그분의 무죄한 품성에 대한 증언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와 관련된 명확한 진술이 신약에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히 4:15)고 단언한다. 예수를 잘 알고 있던 베드로는 그분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요 6:69)로 칭하고,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다(벧전 2:22)고 말한다. 요한은 “그에게는 죄가 없”다(요일 3:5)고 주장하고, 바울은 그분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다(고후 5:21)고 증언한다. 이 문제와 관련된 그리스도 자신의 다음과 같은 간증들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요 15:10).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요 8:29). 청중에게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46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질문 또한 이와 동일한 의미로 하신 질문이다. (200.3)
 진실로 사람이 되는 것이 그분의 사명의 일부였다. 그분은 인성의 본질적인 특성들을 소유하셨다. 그분은 “혈육에..속하”셨으며(히 2:14), 또한 모든 면에서 동료 인간들과 같이 되셨다(17절). 그분이 취하신 인성은 타락 이전의 아담의 인성과 같은 인성이 아니었다. 그분의 인성은 타락 이후의 아담의 인성과 동일한 인성도 아니었는데, 이는 성경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죄한 인성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으므로 그분의 출생은 초자연적인 것이었다(마 1:20; 눅 1:35).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고 말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200.4)
 그분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롬 8:3) 오셨다. 그분은 타락한 상태의 인성을 그 연약성 및 결함과 더불어 취하셨으며, 또한 죄의 결과도 함께 지니고 계셨다. 하지만 그분은 죄는 없으셨다. 그분은 죄를 빼고는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은 진정한 사람이셨다. 죄가 없으셨으므로 그분은 “저 [사탄]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 라는 말을 할 수 있으셨다. 예수께서는 4,000여 년 동안 죄로 인해 연약해지고 퇴화되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순결하고 흠이 없는 인성을 갖고 태어나셨다. 요한은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고 기록하고 있다. (201.1)
 예수의 무죄하심에 대한 성경의 일관된 증언이 그분에게 죄지을 가능성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않으시며, 또한 시험을 받으실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약 1:3). 하지만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죄를 짓지는 않으셨지만 죄지을 가능성은 갖고 계셨다. 그분은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깨뜨리는 일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수많은 고투와 시험을 경험하셨는데, 그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애쓰신 겟세마네에서의 고투처럼 견디기 매우 힘든 것도 있었다(눅 22:41-44). (201.2)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비하심을 온전히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은 도덕적 완전과 연관된 문제일 뿐 아니라 그분의 희생적 죽음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분의 무죄하심은 단순히 그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설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그분은 거룩하고 무죄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주님과 구속주와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 완전한 자격을 갖추셨다. 이와 같은 예수의 거룩하심과 무죄하심은 속죄를 위해 도덕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후에 고찰할 것이다(참조 II. C-E). (201.3)
 3. 그리스도의 신성
 a. 그리스도의 칭호들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을 말하는 이러한 선언들과 더불어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 칭호들 및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부른 칭호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차지하는 예수의 위치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를 얻을 수 있다. 비록 여기에 언급된 호칭들이 예수의 위격과 사명에 대한 체계적인 진술은 아니지만,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도움을 줄 것임에는 틀림없다. (201.4)
 (1) 메시아/그리스도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이 “메시아”의 헬라어 표기인 크리스토스(“기름부음 받은 자”)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이 칭호를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듯하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구원자 곧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새 시대를 열 인물을 일컫는 칭호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와 헬라어 단어는 둘 모두 “기름을 붓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신약의 기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 칭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그분을 특정한 일을 위해 구별되었던 인물로 여겼던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201.5)
 크리스토스라는 칭호는 신약에 500회 이상 나타난다. 예수와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메시아관이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1세기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메시아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존재로 여겨졌다는 것은 큰 이견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분은 시대의 종말을 알리게 될 것이며, 바로 그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분을 통하여 역사 속에 등장하실 것이었다.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호칭은 받아들이셨지만 사람들에게 그 호칭을 사용하도록 권장하지는 않으셨는데, 이 용어가 그것을 사용하기 어렵게 만드는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자신의 사명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메시아”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일은 꺼려하셨지만, 베드로와 사마리아 여인이 그 칭호를 사용하였을 때 그들을 꾸짖지는 않으셨다(마 16:16, 17; 요 4:25, 26). 그분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아셨는데, 그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 하여”(막 9:41) 그들 중 하나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일에 관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관한 마가의 기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의 응답이 보여 주듯이, 이 모든 말은 각각 그 말의 근본 취지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참으로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마 16:16)는 베드로의 고백이 있은 후 예수께서는 곧 바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을(막 8:31; 참조 마 16:21)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그분은 메시아를 정치적인 인물로 보는 견해를 배척하시면서 당시의 해석들과는 완전히 다른 메시아의 직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셨다. 만일 그분이 자신이 메시아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구약의 성취 라는 관점에서였을 것이다. 이는 곧 그분이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속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자각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분은 이를 민족주의적 의미에서의 구속이 아닌 영적 의미에서의 구속으로 이해하셨다. (201.6)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메시아라는 칭호는 그분의 부활을 통해 명백히 증명되었다. 실제로 베드로는 부활과 성령 강림을 그 배경으로 해서 오순절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고 선포하였다.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의 설교와 가르침의 주제는 “예수는 그리스도”(행 5:42)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초기 교회가 매우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는 곧 예수를 일컫는 사실상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들이 선포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 1:1)이었다. 초기 제자들은 그 중에서도 특히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기름부음 받은 약속된 왕을 의미하는 칭호로 받아들였다. (202.1)
 (2) 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칭호였던 반면에 “주”[헬라어 퀴리오스]는 이방인들에게 더 큰 의미를 지녔던 칭호이다. 하지만 이 용어는 이방으로부터 들어온 용어가 아니라 구약에서 가져온 용어였다. 구약의 헬라어 번역판에서 이 용어는 야훼(창 2:4)와 아도나이(수 3:11; 시 8:1, 9)를 의미하는 용어로 쓰였다. 일상의 헬라어에서는 “주”가 단순히 존경을 나타내는 칭호였던 것으로 생각된다(마 10:24; 13:27; 요 4:19; 15:15). “주”라는 칭호는 또한 헬라 문화권 전체에 걸쳐서 황제와 이교의 신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수께 이 칭호를 두 번 이상이나 쓴 것은 사실상 그분을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인정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한 도마의 고백이다. (202.2)
 초기교회는 예수를 주라 칭함으로써 그분이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존재임을 선언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또한 그분이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고(행 7:59, 60), 기도(59, 60절)와 신뢰(행 16:31; 롬 10:9)의 대상이며, 우리의 구원의 주재가 되시는 분(행 11:15; 살전 5:9)이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였다. 그분은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베푸시며(빌 1:2; 살후 1:2),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일에 우리를 굳게 하시는(살후 2:16, 17), 그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다(계 17:14; 참조 19:16). 그리스도교에서 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믿음, 이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예수를 절대 주권을 가지신 존재로, 또한 신성을 소유한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이시다(유 4). 그분은 모든 신자들에게 자기를“옷 입으라”(롬 13:14)고 명하신 분이시며, 또한 모든 제자가 그분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기를 아까워하지 아니하며(행 15:26), 죽으실 각오까지 하시는(행 21:13) 그런 분이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분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벧후 1:11; 2:20).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초기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주 되심의 의미를 깨닫게 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베드로가 오순절에 무리들에게 말한 것처럼 바로 이 사건 곧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분을 퀴리오스크리스토스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