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7 장 안식일의 재발견 제 3 부 쉼 없는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쉼이 되는 안식일
 회의주의는 하나의 망각의 부산물이 될 수 있다.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을 경시하는 사람은 창조의 하나님을 잊어 버리기 쉬우며 또한, 그분에 대해서 회의적이기 쉽다. 이것은 인간의 관계에서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본인이 결혼을 위해서 약혼을 한지 4년이 되었을 때는,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나의 애인과 나 사이의 시간은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오래 헤어져 있는 동안, 나는 그 애인이 누구였는지 그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의심하고 잊어버릴 유혹에 직면했다. 나는 이 첫 회의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것은 그녀의 사랑의 편지를 읽고 그녀의 사진을 보는 시간을 가지므로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나의 첫 회의를 극복하고 그녀에 대한 나의 신뢰를 새롭게 하도록 나를 도와주었다. 이 유사한 형태로 안식일은 하나님을 우리의 완전한 창조주로 “기억”하기 위해 우리를 초청하므로 어떤 초기의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 한 주일마다의 기회를 마련한다. (180.5)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매 주일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것을 숙고하므로 그분의 완전한 창조에 대해서 듣고 그것을 축하하므로 그분을 완전한 창조주로 믿는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도록 매 주일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 이유는 안식일의 이토록 중요한 기능은 계속되는 인간의 필요를-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더 필요함-충족시키고, 또 단절되지 않은 안식일로 승인을 받고 합법적으로 숙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일의 다른 날로 창조 안식일의 상징적이고도 기념이 되는 기능으로 대치시키려는 인간의 어떤 시도도 그날이 견지하는 사건을 부주의하게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181.1)
 하나님의 창조를 기뻐함
 안식일에 하나님을 우리의 완전한 창조주로 믿는 신앙을 새롭게 하는 확실한 길은 그분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기쁨으로 취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세상을 창녀로 몸을 팔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의 아름다움 안에서 기뻐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그 날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죄와 고통의 구름 저편을 보고 첫 인류가 경험한 경이로움과 기쁨, 그리고 찬탄을 마음속에 그려내도록 초청한다. (181.2)
 안식일은 영원의 창을 통해 세상을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유대 그리스도인 전통에서 안식일은 기쁨과 환희에 찬 날로 간주되어 왔다. 이사야는 안식일을 여호와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로 불렀다(사 58:13, 14). 안식일의 잔치 분위기를 마련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스스로 특별한 옷과 음식, 그리고 정절의 마음으로 그 날을 준비했다. 금식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비록 일주일 금식 기간 동안에도 방해를 받지 않았다.37) (181.3)
 안식일에는 모든 것이 더욱 아름답고 기뻤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더욱 풍요하고, 백성들은 더욱 우정 적이며, 음식물은 더욱 맛있고, 그리고 숙녀와 신사, 아이들은 내 외적으로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그 이유는 안식일이 하나님과 백성, 그리고 사물들을 지각력 있게 즐기도록 하기 위해 시간뿐만 아니라 영적인 자원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창조주와 구속주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하므로, 안식일은 신자로 하여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것들이 본래대로 다시 있게 될 것으로 보도록 한다. 그것은 마치 평면의 그림을 보기 위해 세 국면으로 보도록 만드는 안경을 24시간 동안 착용하고 있는 것과 같다. (181.4)
 안식일의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이 세상에서와 그들의 개인적인 생애에서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쁨으로 축하는 날로 보게 된다. 금요일 저녁이 올 때, 그들은 감격하여 말하기를: “안식일이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날; 지난주일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것으로 인해 감사드리는 날; 완전한 창조주와 구세주께 믿음과 헌신을 새롭게 하는 날;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시 92:4, 5: 안식일을 위한 노래)는 시편 기자의 안식일의 노래를 부르는 날, 또 다른 안식일이 찾아 온 것을 마음속으로 기뻐한다. (181.5)
 (2) 하나님의 임재의 쉼
 적절한 안식일 준수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거룩한 임재를 느끼도록 하므로 우리의 생애에 그리스도의 쉼을 가져다준다. 갈릴리 호수의 폭풍을 잔잔케 한 것은 그리스도의 임재였으며(마 8:23-27), 고통받는 생애에 평화와 고요함을 가져다주는 것은 그분의 임재의 보증이다. 이것이 바로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빈번히 제시되어 있는 안식일의 거룩성의 의미이다. (182.1)
 우리는 안식일의 거룩성이란 이날에 하나님의 임재의 특별한 현현이 당신의 백성들의 생애에 있는 것임을 발견했다. 안식일에 그들의 세속적인 관심을 제쳐놓는 신자들,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많은 다른 소리들에 그들의 귀를 막는 자는,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를 경험하는 자들이다. 안식일에 그리스도의 임재의 가까움에 대한 고도의 의식은 영혼을 기쁨과 평화, 그리고 쉼으로 채운다. (182.2)
 만일 그들이 살아야한다면, 관계가 개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본인이 교육은 받았던 영국에 있는 뉴볼드 대학(Newbold College)에서 서로 반대되는 성을 가진 학생들 사이에 사회적인 관계를 통제했던 에이 비 씨 특권제도(ABC privilege-system)를 생생하게 회상하게 된다. “에이”(A)신분을 가진 한 쌍에게는 지정된 라운지에서 한 주일에 약 1시간 정도 만나는 특권을 주었다. 그러나, “비”(B) 또는 “씨”(C) 특권에 해당되는 남녀 커플들은 공식적으로 두 주일이나 한 달에 한번 정도 만날 수 있었다. 솔직히, 본인은 “에이” 신분을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애인과의 매주일의 간단한 만남이 우리의 관계를 유지시키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82.3)
 안식일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우리의 창조주-구속주를 매 주일마다 특별히 만나는 날이다. 이러한 만남은 단순히 한 시간만이 아니라 하루 종일 지속된다. 거룩한 안식일에 들어가는 것은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영적인 임재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교제한다는 것을 엄숙히 생각하는 것이다. 안식일 시간과 활동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조성하는 신자들은 그들의 매일의 생애에서 그분의 쉼과 평화를 경험한다. (182.4)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
 나는 이태리 파노(Fano) 마을에 있는 나의 한가한 방이나 또는 천연계에서 하나님께만 경배를 드리면서 보낸 많은 안식일들을 생생하게 회상한다. 그 당시에 나는 여름 방학 동안에 장학금을 벌기 위해서 그리스도인 서적들을 판매하는 십대였다. 주일 동안에, 나는 여러 지역으로부터-불법 문서를 배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인 인 나를 계속해서 추방하려는 지방 종교 단체나 민간 권력자들로부터; 내가 팔고 있었던 배서하지 않은 문서로 인해 오염되는 것을 두려워한 미신적인 고객들로부터; 그리고 나에게 친절을 베풀면서도 나를 지옥 불에서 구출되어야 하는 이단으로 보았던 나의 친척들로부터 심각한 적대감에 직면했다. (182.5)
 그러나 금요일 밤이 이르러 왔을 때, 하루 온 종일 나를 둘러 있던 적대감의 세상을 잊고 하나님의 임재의 평화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했다. 동료 신자들이 인근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그러나 외롭지 않게, 방에서나 열린 들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안식일은 나를 위해, 그리고 역사를 통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서 경험하므로 인간의 불행을 잊어 버리는 날, 곧 실제로 이동이 가능한 하나의 성소였다. (182.6)
 안식일에 느끼는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강림의 목적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한다. 성육신은 안식일의 축복과 성화를 성취하며, 우리가 본대로 안식일은 그분의 임재를 통해 그분의 피조물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보증하는 것을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므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도록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므로 성취하셨다. (183.1)
 허벌트 리챠드슨(Herbert W. Richardson)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폐하셨으므로 사람은 실로 자유하게 되었다는 소리를 우리가 얼마나 자주 들었는가! 그러나 이것은 얄팍한 신학적인 넌센스라는 것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상반될 수 없다. 안식일을 정면으로 반대하므로 그러한 모순을 주장하는 것은 옛 영지주의자들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두 다른 ‘하나님들’(Gods)이라고 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다”38)고 기록한다. (183.2)
 리챠드슨은 계속해서 올바로 지적하기를 “안식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므로, 그분 자신이 세상으로 들어오셔서 그분이 인격적으로 임재하시므로 거룩하게 하실 수 있었다”39)고 한다.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성화는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을 가장 잘 말해주는 계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임재로 이 세상을 축복하시기 위해 창조의 일곱째 날에 인간의 시간의 한계 속으로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성육하셔서 인간의 육체의 한계 안으로 들어오셨다. (183.3)
 (3) 경쟁으로부터의 쉼
 참 안식일의 준수는 생산과 성취를 위한 압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므로 그리스도의 쉼을 우리의 생애 속으로 가지고 온다. 우리의 경쟁 사회가 우리에게 가해오는 압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좌절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경쟁은 사람을 낙담시키고, 비인간적이 되게 하며, 부도덕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친구들을 원수로 돌려놓을 수도 있다. (1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