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7 장 안식일의 재발견 제 3 부 쉼 없는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쉼이 되는 안식일
 안식일의 재 회복은 단순히 일곱째 날에 쉬면서 예배를 드리므로 안식일 계명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쉼(히 4:10)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도 포함한다. 지난 과거 그 어떤 날보다도 긴장으로 가득 찬 쉼이 없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생애는 안식일의 쉼과 갱신을 필요로 한다. 이 점에서 본서의 결론은 안식일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와 평화, 그리고 쉼을 우리의 생애에서 경험하도록 할 수 있는지를 잘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인은 하나님의 제도를 반대하는 주요 공격들을 반박하므로 안식일 준수의 원칙과 관습의 유효성을 재확인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중요한 지점에서, 결론으로 본인은 우리의 생애를 위한 안식일의 신체적이고도 영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178.1)
 내적 쉼과 해방을 찾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운동 클럽이나 명상 단체에 가담하거나, 아니면 신경 안정제나 마약을 복용하고, 또는 술을 마시므로 긴장을 없이하려는 사실상 긴장으로 가득 찬 쉼이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긴장을 기상천외한 섬으로 피서를 떠나므로 그들의 긴장을 이완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경험은 우리에게 비록 아무리 멋진 휴가나 신비의 약이라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이완을 줄 뿐 내적인 긴장과 불안을 영구적으로 평화롭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178.2)
 참 쉼은 어떤 장소을 통해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에게 쉼을 주리라”(마 11:28 NIV 참조)라고 말씀하시는 인격자 되시는 구세주와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발견된다. 완전한 쉼과 평화는 인간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애를 조화롭게 하시도록 허용할 때에 우리에게 오는 하나의 경험이다(“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마 11:28). (178.3)
 완전한 쉼은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존재의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요소들의 조화로운 일치의 결과로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가 이 세 요소들 곧 몸과 마음과 영혼을 조화롭게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일 수 있으나, 만일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고통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동요되고 긴장하게 되며, 심지어는 악몽에 시달리므로 쉼을 갖지 못한다.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구성들이 조화로운 음악으로 섞기 위해 노련한 명 지휘자의 지도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체와 정신, 그리고 영적인 구성요소들은 우리가 조화로운 쉼과 평화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 주님의 탁월하신 안내를 필요로 한다. (178.4)
 어거스틴(Augustine)은 참회록(Confession)으로 명명된 자신의 자서전의 시작 구절에서 이 진리를 웅변적으로 표현한다: “오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해 창조하셨으며,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쉼을 발견할 때까지는 쉼이 없습니다.” 우리의 연구는 하나님께서 홍수 전후에 있어 중요한 제도인 안식일, 즉 우리의 생애에서 하나님께서 더욱 충만히 그리고 더욱 자유롭게 일하시도록 허용하기 위해 우리의 매일의 일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한 날을 인류에게 주셨다는 것을 보여준다(히 4:10). (178.5)
 안식일의 이토록 중요한 기능을 더욱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결론으로, 적절한 안식일의 준수가 구주로 하여금 쉼이 없는 우리의 생애에 쉼과 평화를 주실 수 있도록 하는 일곱 가지의 중요한 길을 고찰하고자 한다. (178.6)
 (1) 창조의 쉼
 안식일은 우리의 삶이 창조로부터 영원토록 하나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확신시키므로 우리의 영혼 속에 그리스도의 쉼을 날라다 준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 영혼을 위한 “그리스도의 창조의 쉼”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여 사고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날라다 주시는 쉼이며, 그들의 존재가 마치 전 우주의 존재인 것 처럼 이 쉼은 우연이거나 아니면 선택의 결과로 오는 것으로, 즉 무자비한 운명이거나 아니면 자비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결과로 생각하며 기이히 여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쉼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하나님 자신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창 1:26, 27), 그들의 조상의 뿌리는 선하다는 자신의 쉼의 확신을 제공하시며, 그들의 존재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에 의한 개인적인 창조와 구속의 결과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하신다. (179.1)
 이러한 안식일의 재 확신의 기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를 “마쳤다”(finished)와 “이루었다”(done)라고 선언하신 일곱째 날을 통해서 주어진 창조의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세 동사들은 일곱째 날에 하신 자신의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이루었고”(세 번 반복함), “마쳤고” 또한 “창조한”(창 2:2, 3)것으로 특징짓는다. 다른 세 단어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훌륭한 성취를 축하하셨는지를 묘사한다: “그가 쉬셨고. . . 복 주셨고. . . 거룩하게 하셨다.” 이 단어들은 일곱째 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가 “마쳐졌고”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복된 소식을 선포하신 것을 강조한다. 그러한 중요한 소식을 극화하기 위해서 창세기 2:2, 3에서 두 번이나 모든 것들이 매우 좋았으므로 더 이상 개선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자 하나님께서 “쉬셨다”라고 말씀하신다. (179.2)
 안식일은 신자들이 완전하신 창조주 안에서 그분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기뻐하므로 새롭게 하도록 초청한다. 안식일에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축하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창조의 쉼을 경험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분명한 번영과 재난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영광스런 신적인 운명을 향해서 이동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신적인 확신 가운데서 기뻐하는 것을 뜻한다. (179.3)
 어거스틴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설명한다: “당신의 창조가 마치는 일곱째 날에 있었던 당신의 쉼은 우리에게 당신의 책의 음성을 통해, 우리 역시 당신의 관대하심을 통해 우리의 일을 마친 후에 당신 안에서 영원한 쉼의 안식일에 쉴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주는군요.”34) 쉼이 없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안식일을 축하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앞으로 올 세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쉼과 평화를 미리 맛보는 경험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는 보증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79.4)
 마치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쉼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의 완성과 완전을 축하하기 위해, 마치 우리의 모든 일이 다 이루어 진 것처럼 안식일에 쉬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종종 우리 자신이 주말에 우리의 일이 마쳐지지 않은 것으로 인해 좌절하기 때문에 실감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빈번히 우리가 설정해 놓았던 것의 일부분만 육일 동안에 이룬다. (179.5)
 안식일의 중요한 기능은 우리의 미완성된 일과 생애에 “완전감”을 주는 것이다. 출애굽기 20:9에 대한 랍비의 주석(“엿새 동안에 일을 할 것이되 너의 모든 일을 행하라”)은 안식일의 이런 기능에 힌트를 준다: “인간이 그의 모든 일을 엿새 동안에 다 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의 일은 언제나 미완성된 채로 남아 있지 않는가? 그 구절이 전하려는 뜻은: 안식일에 쉬되 마치 여러분의 모든 일이 다 마쳐진 것처럼 쉬라는 것이다. 다른 해석은: 일에 대한 생각으로부터도 쉬라는 것이다.”35) (179.6)
 실로, 안식일은 종종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빨리 오는 듯하다. 우리는 마쳐지지 않은 일들로 인해서 스스로가 실망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것이 인간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매일의 과제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떼어놓으므로, 안식일은 이 전 육일 동안의 일과 생애 자체에 대해서 완전 감을 가져다준다. 어떤 주일에는, 우리의 노동의 결과가 다른 주일들에 비해서 더 큰 것처럼 보이고, 우리의 최선의 노력이 더 많게 또는 적게 생산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를 위해 매 안식일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창조와 구속의 성취를 축하하기 위해 그분의 안식일의 쉼으로 들어가도록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매일의 일과를 중단하고 마치 그분의 “완성된” 창조와 구원의 기쁨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의 모든 일이 다 마쳐진 것처럼 쉬라고 우리를 초청하신다(창 2:2; 요 19:30). (180.1)
 우리가 여전히 마쳐지지 않은 일 때문에 깊은 개인적인 패배감과 절망 아래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성취를 인해 안식일에 그분을 찬양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취의 빛 가운데서 우리의 일을 보도록 초청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너희의 어려운 일이 많게 또는 적게 생산했을지라도, 안식일에는 마치 너희들의 모든 일이 마쳐진 것처럼 쉬어라. 왜냐하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신다. 안식일의 축하가 우리의 생애에 가져다주는 것은 한편으로 지루하고 의미 없고 그리고 한 선상에 있는 존재인 것처럼 보이는 것에 의미와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180.2)
 완전하신 창조주 안에서 믿음을 새롭게 함
 우리는 안식일에 하나님을 우리의 완전하신 창조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를 축하한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것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주춧돌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암송하거나 받아들이는 “사도신경”(“Apostles' Creed”)의 첫 구절은, “내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creatorem caeli et terrae)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니”로 진술한다. 그러한 신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성경의 공개적인 선언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180.3)
 안식일을 축하한다는 것은 완전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단순히 말로만이 아니라 거기에 부응하는 행동으로 고백하므로 기본적인 성서의 가르침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이 세상의 존재 자체가 절대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죠지 엘리옷(George Eliott)은 웅변적으로 기록하기를 “안식일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에 반대하고; 이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물질주의에 반대하고; 예배드릴 필요성을 부정하는 세속주의에 반대하고 있다는 영원한 증거이다. 그것은 상징적으로 모든 만물이 존재토록 명하신 창조의 능력, 그들을 받아들이고 조화롭게 명하신 지혜, 그리고 모든 것이 ‘심히 좋았더라’라고 선언하신 사랑을 기념하고 있다. 그를 만드신 하나님을 부정하도록 인도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손으로 만든 피조물로 격하시키는 영적인 허약성에 대항하여 어디에서나 사람의 영원한 안내자가 되도록 안식일을 두셨다”36)고 한다.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