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과 술 제 6 장 사도교회와 포도 음료 4. 근신하라는 훈계
 이와 같은 점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은 기독교 감독들이 금주하고(네팔리오스), 또 음주 장소나 파티 자리에 있지 않기(메 파로이돈)를 원하였다. 기독교 성직자들은 스스로 금주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른 이들의 금주를 무너뜨릴 수 있는 장소나 모임에 참석하지 말고 또 승인하지도 말아야 한다. (213.2)
 바울이 집사들에게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딤전 3:8; 참조 딛 2:3)고, 그리고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훈계한 바가 이 결론을 무효화시킨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본문들은 성경이 주정 음료에 관하여 말한 귀절 중 잘못 이해된 귀절들에 관하여 논한 7장에서 다룰 것이다. 7 장에서의 연구는 이 본문들이 바울이 금주에 관하여 훈계한 것을 폐하기는 커녕 오히려 구체화되어 보여 줄 것이다. (213.3)
 금주의 이유
 베드로와 바울이 금주하는 삶, 경건한 삶을 살라고 한 이유는 의학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종말적인 이유 때문이다. 성경은 개인의 건강과 선을 위하여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현재 삶 속에 거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으로 인해서(고전 3:16, 17; 6:13), 그리고 도래할 생애에서 우리와 함께 친교를 나누시기 원하기 때문에 건강하고 거룩한 삶을 권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 그 거룩한 임재 가운데서 살고자 하면 오늘날 정결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디도서에서 감독들, 노인들, 여자들, 젊은이들, 그리고 노예들에게 술 취하지 말고 경건한 삶을 살라고 훈계한 근본 이유이다. (213.4)
 바울은 이들에게 훈계하기를 마친 후에 이 모든 훈계의 최종적이자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며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14). (214.1)
 바울은 이 귀절에서 세상 정욕을 다 버리는 것과 이 현 세상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그리고 근신하여(소프로노스)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지고 계신 경륜을 적절하게 연관시켰다. 세상의 정욕은 취하게 하는 음료에 의하여 영향을 받기에 우선 그것을 배제하여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만 성취되지는 않는다. 탐닉을 승인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최고로 개발시키는 것을 막는 것에 우리가 피하도록 훈련시키고자 모습을 드러낸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서 성취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은 우리가 지은 과거의 모든 죄악의 형벌을 지불함으로서 “우리를 구속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도록”하는 능력을 제공하여 주심으로 우리를 “정결케 한다”. (214.2)
 모든 크리스챤들이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요일 3:3)하며 살도록 동기를 부여하여 주는 것은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고 또 그의 영광스러움이 나타나는 날에 올리워질 준비가 되어 있고자 하는 소망이다. 베드로가 앞에서 논한 세 본문에서 정신적인 경계성과 신체적인 금주를 호소한 것은 이 희망에 의거하여서이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온전히 금주하라”고 한 훈계 바로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라는 훈계가 곧 바로 이어 나온다. 베드로전서 4:7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는 훈계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느니라”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베드로전서 5:8에 나오는 정신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근신하라는 훈계도 “목자양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는 희망에 근거하고 있다. (214.3)
 성경이 하나님에 의하여 영감 받았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이 취하게 하는 음료를 금하라는 훈계를 이 종말의 시대에 구주 예수의 오심을 문자 그대로 구체적으로 준비하면서 실천해야 겠다. (215.1)
 (5) 신체적인 금주로서의 엔크라테이아(enkrateia)
 엔크라테이아의 의미
 네팔리오스와 밀접하게 연관된 단어는 희랍 어 단어 엔크라테이아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다섯 번 나온다(행 24:25; 갈 5:23; 벧후 1:6; 고전 9:25; 딛 1:8). 엔크라테이아란 단어의 어근은 크라트인데 이 단어의 뜻은 “사람이 스스로에 대하여 갖고 있는 혹은 다른 것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능력 또는 주권을 표현한다.”91 자제력은 모든 형태의 악을 금할 수 있는 능력에서 특별히 드러난다. (215.2)
 개역성경은 엔크라테이아고린도전서 9:25에서 “절제하나니”로 번역하였다. 몇몇 적당론자들은 이 부분이 자신들의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하여 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희랍 어 단어 엔크라테이아의 근본적인 의미와 “절제하나니”가 암시하는 바가 “절대 금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 신중” 또는 “무엇에든지 과도하고자 하는 모든 유혹을 저항하는 것”92이라고 추정한다. (215.3)
 사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절제라는 단어가 “적당”이라는 뜻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그 근본적인 의미는 “금주”다. ‘절제’를 뜻하는 영어의 템퍼런스(temperance)와 라틴 어의 템페란티아(temperantia), 그 리고 희랍 어 단어 엔크라테이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레온 필드는 “절제(temperance /temperantia /enkrateia)”의 근본적인 의미가 “금주”라는 것에 관하여 방대한 역사적 문헌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93 월터 그룬트만(Walter Grundmann)도 신약성경 신학사전에 실린 엔크라테이아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비슷한 자료 문헌을 제시하고 있다.94 충분한 자료 문헌을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 책들을 살펴보기를 바란다. 본 장의 목적에 부합되게 몇몇 자료를 예증으로 인용하고자 한다. (215.4)
 샘플 귀절들
 16세기 영국의 저술사이었던 토마스 엘리오트(Thomas Elyot)경은 그의 총독론(1531 년)에 “절제하는 자는 육적 쾌락을 피하고, 그것 없이도 불만스럽지 않고 그것들이 있어도 기꺼이 금하고자(absteineth) 하는 이들”이라고 말했다.95 이와 비슷하게 철학자 토마스 홉(Thomas Hobbes: 1640)도 “절제는 우리를 파괴하고자 하는 모든 것, 즉 부절제를 금하는 습관이라고 정의를 내렸다.96 (216.1)
 똑같은 의미가 희랍 문헌에도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년)는 “스스로 억제하는 이(엔크라테스)는 자신의 욕망이 나쁜 것임을 알고 원칙에 따라 그것을 따르기를 거부하였다”고 말한다.97 외경서인 집회서에는 “영혼의 절제(엔크라테이아)”라는 단락이 있는데 이 단락은 “네 탐욕을 따라 행하지 말고 네 욕망을 스스로 억제하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98 에세네파도 금주를 매우 높게 여기었다. 요세푸스는 “이 에세네파는 쾌락을 죄악으로 여겨 거부하며 금주(엔크라테이안)를 높게 여기었다. 그리고 인간의 정욕을 정복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었다”고 말하였다.99 엔크라테이아에 금주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는 술과 고기,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결혼까지 금한 몇몇 초기 그리스도교 무리들을 엔 크라테이아파(Encratities)라는 명칭으로 부른 것이다.100 (216.2)
 사도행전 24:25에 나오는 금주
 신약성경의 기자들도 엔크라테이아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금주 사상을 계속하여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첫번째로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은 바울이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한 말이 기록된 사도행전 24:25이다. “바울이 의와 절제(엔크라테이아스:enkrateias)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하고, 벨릭스는 방종에 빠지고 드루실라와 간음 관계를 맺고 있던 불의한 총독이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의 악명 높은 잔인성과 방종에 비추어 보면 바울이 그들에게 엔크라테이아라고 할 때에 그의 주제는 적당히가 아니라 불법적이고 짓된 행위를 아예 금하는 것이었다. (216.3)
 위클립은 이 절에 나오는 엔크라테이아“정숙함(chastity)”으로 정확하게 번역하였다. 이 ‘정숙’이란 의미는 바울이 정숙의 미덕을 표현하고자 동사 형태를 사용한 고린도전서 7:9에 나온다. “만일 자제(엔크라튜오마이 [enkrateuomai])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 하는 것이 나으니라”. (217.1)
 고린도전서 9:25에 나오는 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