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과 술 제 6 장 사도교회와 포도 음료 3.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역사적으로 많은 번역가들과 주석가들은 취한 상태 보다는 “거기에”의 선행사로서 여긴다. 그 이유는 오이노스(술)의 위치 때문이다. 희랍 어 원문에서는 이 단어가 동사 “취하다” 바로 다음에, 그리고 “거기에서”란 관계절 바로 전에 나온다. 비록 동사와 관계절 사이에 “술”이란 단어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이 점은 관계절의 경고가 방탕한 상태로서의 취함 보다는 방탕함의 능동적인 원인으로서의 술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제시하여 주고 있다. (190.2)
 이 입장을 지지하여 주는 사실은 “술 취하지 말라”잠언 23:31(Codex A에 의한 칠십인역)에서 인용된 것”27이라는 점이 지지하여 주고 있다. 만일 바울이 구약성경의 희랍 어 번역판인 칠십인역 상의 잠언 23:31을 인용하였다면 바울이 그와 같은 술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잠언의 본문이 취하게 하는 술을 과도하게 마시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 그 자체를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포도주는 붉고 ∙∙∙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니라). (190.3)
 고대의 번역
 고대와 현대의 수많은 번역들은 취하게 하는 술을 정죄하는 것으로 에베소서 5:18을 이해한다. 라틴 기독교계의 아버지로서 여겨지는 터툴리안(Tertullian: 160~225 년경 생존)은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et nolite inebriari vino, in quo est luxuria(술에 고주망태가 되지 말라. 그것에 주색에 빠짐이 있다).”28 비노(술)와 쿠오(which) 사이의 연관성은 이 라틴 어 번역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관계사 쿠 오(quo)는 쿠오가 종속하는 비노와 성이 똑같이 중성이기 때문이다. (190.4)
 터툴리안은 이 번역 외에도 자신의 말시온 반박문이란 저서에서 이 본문이 음주를 금하는 것이라는 이해를 밝힌다. 술 취하지 말라, 그 중에 부절제(excess)가 있다. 이것은 성별된 나실인을 술취함으로 유혹하는 자가 책망당한 선지서의 귀절이 제시하는 개념이다. “너희는 나의 거룩한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아모스 2:12).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마시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받았다.”29 (191.1)
 터툴리안 사후 2세기 후에 제롬은 에베소서 5:18을 자신의 유명한 라틴 역(벌게이트)에서 이와 똑같이 번역하였다. 벌게이트 성경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 라틴 성경으로 수세기에 걸쳐 사용되었다. (191.2)
 제롬이 이 본문을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훈계로 이해하였다.”는 것은 그가 이 분문을 사용한 실례가 지적하여 주고 있는 사실이다. 자신의 어린 딸을 어떻게 양육하여야 할지를 물은 라에타(Laeta)라는 여인에게 쓴 편지에서 제롬은 “당신의 딸이 지금부터라도 그 중에 부절제가 있(엡 5:18)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배우게 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30 제롬은 유스토키 움(Eustoc-hium)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로마의 귀족 여인인 파울라(Paula)의 이야기를 들어 말하는 데, 그녀는 성지를 방문하였을 때에 “롯이 피한 동굴을 상기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와 동행한 처녀들에게 ‘그 중에 부절제가 있는 술’(엡 5:18)에 주의하라고 경고하였다. 그것은 이것으로 인하여 모압인들과 암몬인들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제롬이 초기의 기독교 성경 번역자 중에서 가장 유명하기에 그의 에베소서 5:18을 이해하기에 매우 의미심장하다. (191.3)
 현대의 번역들
 몇몇 고전적 번역들과 현대 번역들이 벌게이트와 동일하게 번역을 하였다. 예를 들자면 불란서의 한 성경 번역판(Synodal Version)은 다음과 같이 번역을 하였다. “Ne vous enivres pas de vin: car le vin porte a la dissolution(술에 너희들이 취하지 말라. 왜냐하면, 술은 방탕함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번역자들은 오해의 소지를 피하고자 술이란 단어를 관계절에서도 사용하였다. 그 외의 불어 성경 번역판들, 즉 데이비드 말틴(David Martin)과 오스테발(Ostervald) 역(譯)도 역시 술과 관계절 간을 명확하게 연관시켰다. 이 두 번역판 모두 “술에 취하지 말라. 술에 방탕함이 있느니라(Ne vous enivres point de vin, dans lequel il y a de la dissoluteness)”고 번역하였다. (191.4)
 영어 성경에 나오는 “in which”의 선행사가 선행절의 ‘취함’이라고 주장 할 수 있는 이유는 영어에서는 관계 대명사 “which”에 성이 없어 여러 다른 선행사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어에서는 관계 대명사 “lequel” 이 남성이기에 남성 명사인 “술(vin)”만을 가리킬 수 있다. 이러한 불어 성경에서 이 두 단어 간의 연관성은 논란의 여지가 없게 명쾌하다. (192.1)
 서반아 어의 두 성경 번역, 즉 시프리아노 드 발레르라(Cipriano de Valerla, 1900)와 나카르 코룽가(Nacar, Colunga)에서도 관계 대명사인 “cual”이 남성 명사인 “vino(술)”을 가리키기 때문에 남성 관사인 “el”이 나온다. “vino” fomento da la injuria(해를 야기하는 술)이라고 번역한 스페인 천주교회의 번역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192.2)
 독어 성경인 복된 소식 성경(Die Gute Nachricht)도 술을 관계절의 주어로 번역하고 있다. “취하지 말라 왜냐하면 술은 사람을 불안정하게 하거나 혹은 부도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Betrinkt euch nicht; denn der Wein macht haltlos).”32 (192.3)
 이탈리아 개신교 번역 성경인 지오바니(Giovanni)의 리베두타(Riveduta)와 교황청 성서 연구소(Pontifical Biblical Institute)가 발행한 천주교 성경도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문장 구조로 번역하고 있다. 이탈리아 어에도 관계 대명사와 선행 명사와 성이 같기 때문에 그 의미를 오해할 수 없다. (192.4)
 전기한 고대와 현대의 번역들에 관한 이와 같은 표본 조사는 역사적으로 많은 성경 번역자들이 에베소서 5:18의 관계 절이 ‘취한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술’ 그 자체를 정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충분하게 보여 준다. 만일 이 번역자들의 번역이 옳다면 에베소서는 술을 남용하는 것에 대하여 단지 정죄하는 것이 아닌 취하게 하는 술을 실제로 마시는 것에 관한 강력한 정죄, 고발인 것이다. 개역성경에서 ‘방탕함’이라고 번역된 명사 아소티아에 관한 연구는 무엇을 정죄하였는지를 가르켜 줄 것이다. (192.5)
 (3) 아소티아(asotia)의 의미
 도덕적 방종
 명사 아소티아는 신약성경에서는 이 귀절 외에 두 곳에만 나온다. 즉 디도서 1:6베드로전서 4:4인데, 개역성경은 두 곳 다 “방탕”으로 번역하였다. 이 희랍 어 단어는 부정(否定)을 뜻하는 아(a)와 구원하다를 뜻하는 동사 소제인(sozein)에서 파생한 명사가 합성된 단어이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구원의 부재(소망 없는 도덕적 방탕 상태)를 뜻한다. 앨버트 바네스는 아소티아“안전하지 않고,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상실되었음, 육욕과 욕망 가운데에 버려진 것, 방탕, 방종, 환락을 뜻하고, 여기에서의 의미(엡 5:18)는 이 모든 것이 술을 마심에 뒤이은다”고 말하였다.33 (193.1)
 “취함”의 원인이 되는 매개체로서의 술과 도덕적으로 방탕한 상태인 아소티아 간에 있을 수 있는 연관성은 이 귀절이 과도하게 마시는 것 뿐만 아니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본질적인 악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여 준다. 레온 필드는 이 입장을 “술에는 그 본질적인 특성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insalvableness)이 원래부터 내재하고 있다는 사상을 매우 명백하고 강력하게 표현하는 이 귀절의 단어들을 또 다른 방법으로 배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말하였다.34 (193.2)
 지성에 영향을 미치는 알코올
 취하게 하는 음료를 마시는 것이 사람을 아소티아 상태, 즉 구원하는 진리를 받아들임에 절대적인 도덕적 부패에 쉽사리 빠지게 하는 이유는 알코올이 성령이 역사하는 통로인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바울은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역설하였다. (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