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 8회에 걸처 나오는 안식 후 첫 날의 성격
 신약 성경에 오늘날의 일요일에 해당하는 “첫째 날”이 특별히 등장하는 경우는 8회에 불과하다. “안식 후 첫 날”(mia Sabbatōn 또는 mia tōn Sabbatōn)이라 표현된 날이다. 그런데 그 여덟 번 중에 여섯은 예수님이 실지로 부활하신 역사적인 “첫째 날”을 여러 복음서 기자가 따로 따로 언급한 것이다(마 28:1; 막 16:2, 9; 눅 24:1; 요 20:1, 19). 만약 우리가 “부활의 날”을 말한다면 이 날을 지적해야 한다. (376.1)
 그런데 이 날은 반복하는 날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단 한 번에 그친 날이다. 그 뒤에 주일마다 반복하는 “첫째 날”들은 역사적인 부활의 날들이 아니다. 그렇지만 만약 넷째 계명에서 하나님이 제칠일 안식일로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게 하셨듯이 매주일의 첫째 날로 예수님의 그 역사적인 부활을 기념하라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명령했다면 매주일의 첫째 날들은 부활의 기념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사와 더불어 첫째 날들에 대하여 부활의 날이란 호칭도 생겨날 수가 있었다. (376.2)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나 증거를 신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에 자기의 존재를 처음으로 나타내신 그 날을 그냥 “첫째 날”이라고 하셨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그 날을 그냥 “여섯째 날”이라고 하셨을 뿐 그 날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특별한 명령을 주시지 않으셨던 것처럼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첫째 날과 관련하여 어떤 특별한 명령을 제자들이나 신도들에게 남기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 때문에 매주일마다 돌아오는 모든 첫째 날들에게 “부활의 날”이라는 신성한 호칭을 부여하지 않았고 또 첫째 날을 안식일 준수에 연관시키지도 않았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는 이른바 “부활의 날”이란 호칭 자체가 없다. 오히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은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를 통하여 기념되었고 또 성만찬과 침례로 기념되었다. 그리고 2세기 전까지의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보다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리기 위하여 유대교의 유월절 전통을 따라 니산월 14일을 파스카로 지켰다. (376.3)
 신약 성경에 나오는 여덟 개의 첫째 날 중에 여섯 개는 예수님이 실지로 부활하신 역사적인 한 날이니 이제 남은 것은 둘이다. 신약 성경의 첫째 날이 현재의 일요일 예배의 기원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이 두 “첫째 날”의 성격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 두 날은 사도행전 20장 7-11절고린도전서 16장 2절에 나오는 “안식 후 첫 날”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20장 7절의 첫째 날은 밤중부터 계산하는 로마식 날자 계산을 따를 것인지 일몰부터 계산하는 유대식 날자 계산을 따를 것인지가 주석가들 사이에 주장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유대식 계산이면 바울이 “강론한” 이 집회는 오늘날의 토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일요일 새벽까지 이어진 것 같다. 만약 로마 방식을 쫓는다면 일요일 저녁에 집회가 시작하여 월요일 새벽까지 이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누가는 유대식 날자 계산법을 따른 것으로 믿을 수 밖에 없다. 누가는 누가복음 23장 54절에서 예수님의 장례를 보고할 때에도 유대식으로 날짜를 계산했고 사도행전의 여러 곳에서도 유대식으로 날짜를 계산했다(행 12:3, 4). (377.1)
 그런데 “안식 후 첫 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며 . . .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한 이 구절의 중요한 의의는 이 저녁이 일요일 저녁이냐 토요일 저녁이냐 하는 것 못지 않게 이 저녁 모임의 성격이 정규적인 예배 모임이었느냐 아니면 바울의 여행 일정에 따른 이례적인 모임이었느냐 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이 성경절에는 분명히 이 모임의 성격이 바울의 고별 모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인” 목적과 바울의 강론의 목적이 일요일 예배 때문이 아니라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 “떡을 떼어 먹은” 것도 정규적인 일요일 예배의 성만찬이 아니라 고별을 아쉬워하는 교제의 식사였다. 바울은 “떡을 떼어 먹은” 후에도 “오랫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났”던 것이다. 바울이 내일 떠나기 때문에 교인들로서는 작별이 아쉬웠고 바울로서는 필요한 가르침과 부탁의 말들을 교인들에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집회가 이루어졌던 교회는 드로아 교회인데 바울은 드로아에서 “이레를 머물렀다”(행 20:6).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바울의 관습대로라면 그는 그곳 신자들과 최소한 한 차례 이상 만났을 것이다. 그들이 최소한 한 번의 안식일을 지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작별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떠나는 날이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이었던 것이다. (378.1)
 누가가 유대식 날짜 계산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로마식 계산법을 따랐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일요일 아침이나 일요일 낮에 정규 예배로 모이지 않고 왜 일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를 예수님의 일요일 부활을 기념하는 정규예배로 모였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부터 모였다면 왜 일요일 성만찬을 자정이 지난 월요일 이른 새벽녘에 이르러서 행해야 했느냐는 것이다. 일요일 예배를 정착시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목적이었다면 결코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78.2)
 다시 말해서 바울이 밤중까지 강론을 계속한 것은 일요일 예배 행위의 하나로서 행한 것도 아니고 이튿날에 있을 일요일 예배를 위한 예비 행위도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은 일요일인 “이튿날” 여행을 위한 예비 행위로서 토요일 밤늦게까지 성경을 강론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드로아를 떠나면서 다음 주의 첫째 날이나 토요일 밤에 다시 모여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라는 부탁을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이 성경절은 일요일 예배의 기원으로 주장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누가가 사도행전 20장 7-11절에서 “안식 후 첫날”에 대하여 기술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일요일 예배의 정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의 여행 일정을 밝히고 또 그 날 저녁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바울의 강론 중에 누각에서 떨어져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379.1)
 이제 신약 성경에 언급된 첫째 날 중에서 일요일 예배의 기원을 밝혀줄 수 있는 날로 남아 있는 날은 하나뿐이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성경절에는 다른 경우와 달리 첫째 날과 관련된 사도 바울의 명령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매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는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는 명령이다. 넷째 계명과 연관된 명령도 아니고 이 날을 성일로 지키라는 명령도 아니다. 또 항구적인 명령도 아니다. 내년에도 그렇게 하고 또 내 후년에도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바울이 구호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일정한 기간에만 적용되는 한시적인 명령이었다. (379.2)
 바울은 팔레스타인에 불어닥친 흉년과 재난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그리스도인 이재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긴급구호모금 운동을 마게도니아와 희랍 교회들에게 독려하고 있었는데 이 모금운동에 조직적으로 협조하기 위하여 주일의 시작인 첫째 날을 이용하라고 권면했던 것이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현실적으로 생활의 다른 필요 때문에 이재민 구호를 위한 저축을 뒤로 미룰 수도 있기 때문에 재난구호헌금을 제일차적 우선 사항으로 하여 저축하기 위해서는 한주일이 시작하는 첫째 날에 다른 모든 필요에 우선하여 구호헌금을 떼어놓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380.1)
 그리고 바울은 교인들에게 첫째 날을 정규적인 예배일로 삼아 첫째 날 예배의 연보함에 구호헌금을 저축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각자 자기 집에서 구호 양식이든지 구호품이든지, 구호금이든지 수입의 일정 부분을 그 날의 형편과 개인의 능력에 따라 따로 구별하라고 한 것이었다. “너희 각 사람”이라는 희랍어 파르 헤아우토는 “제 집에서”와 동일한 뜻의 표현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6장 2절은 공적인 예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부탁의 말이었다. (380.2)
 바울이 이렇게 권고한 까닭은 순전히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전 16:2). 바울이 헌금 날짜를 “매주일의 첫 날”로 제안한 까닭은 연보 행위를 일요일 예배를 정착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가 도착하기 전에 상당한 헌금액이 효과적으로 모여 있게 하고자 하는 실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 4, 5절에서도 같은 이유를 설명했다.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러므로” 바울이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안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구절에서 권장된 연보는 4개의 특성을 갖고 있다.

 ① 매 주일의 첫째 날에 정규적으로,

 ② 각 사람이,

 ③ 개인적으로,

 ④ 형편껏 내는 연보였다. (380.3)
 고전 16장 2절의 방식은 우리의 옛 어른들에게도 낯설은 것이 아니다. 돈이 귀한 시절에 우리 할머니들과 어머니들이 성미를 모을 때 그렇게 하였다. 끼니 때 마다 한 줌씩 성미를 떼어놓기도 했고 날짜 별로 성미를 모으기도 했다. 초하루에는 이 명목으로 하고 보름날에는 저 명목으로 성미를 모았다. 그렇게 모은 성미를 여러 가정이 또 한 곳에 모아서 필요한 목적에 사용하였다. 초창기 교인들 중에는 교회 재건축을 위해 일 년 기한으로 일요일마다 산에 가서 땔감 한 지게씩을 마련해서 시장에 나가 팔던지 일요일에 만드는 짚신만을 구별하여 교회 건축기금과 교회학교 건축기금으로 바치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381.1)
 이방 교회들은 바울이 구호금을 함께 모아 가지고 팔레스타인으로 떠나는 날까지 각 가정에서 첫째 날에 구호 헌금을 저축하는 일을 계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업이 일단락되자 첫째 날과 관련된 그 업무도 끝냈던 것이다. 항구적으로 “안식 후 첫 날” 활동을 계속했던 것이 아니다. (381.2)
 요한계시록 1장 10절“주의 날”과 일요일
 이제 신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첫째 날을 조사했으나 일요일 예배의 기원이 될 만한 날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안식 후 첫째 날”이라는 표현 대신에 “주의 날”(Kuriakē hēmera, 쿠리아케 헤메라)이라는 표현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의 “주일” 예배와 연관되는 구절로 내세움을 당하고 있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다. 신약 성경 요한계시록 1장 10절이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는 구절이다. (381.3)
 “주의 날”(Kuriakē hēmera)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신약 성경 이후의 기독교 문서에서 사용된 용례가 많다. 교부들은 축약 형태로 kuriakē를 첫째 날의 뜻으로 친숙히 사용했고, 현대 희랍어 문서에서도 kuriakē는 일요일을 뜻한다. 희랍어 kuriakē hemera에 해당하는 라틴어 dominica dies도 일요일을 뜻한다. 현대 스페인어 domingo나 불어 dimanche는 모두 일요일을 뜻한다. 이런 이유로 많은 학자들이 계시록 1장 10절kuriakē hemera를 일요일로 주장한다. 일요일에 요한이 이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 호칭했다는 것이다. (382.1)
 그러나 이 해석을 반대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다. 역사적 해석 원칙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후기의 용례를 가지고 그 보다 앞선 시대의 문제를 판단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당대나 그 보다 앞선 시대의 용례에 근거하여 해당 사안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부들이 “주의 날”을 일요일의 뜻으로 빈번히 사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모두 2세기 이후의 일이다. 2세기 이전에 “주의 날”을 일요일의 뜻으로 교부들이 표현한 예는 전혀 없다. 2세기 후반의 외경인 「베드로의 복음」이 그 첫 경우이다. 요한의 계시록 보다 1세기 가까이 늦은 시대의 용례를 가지고 요한의 때에 “주의 날”이 일요일을 뜻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382.2)
 따라서 우리는 성경 밖의 자료보다는 직접적으로 성경의 증거에 의해서 계시록 1장 10절“주의 날”의 뜻을 밝혀야 한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이 낱말이 일요일을 뜻한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전혀 없다. 그 반대로 성경에서 제칠일이나 안식일을 하나님의 특별한 날로 말하고 있는 증거는 도처에 많다. 하나님은 제칠일 안식일을 복주고 거룩하게 하셨다(창 2:3). 그리고 그 날을 당신의 창조 행위의 기념일로 선언했다(출 20:11). 그리고 그 날을 “나의 거룩한 날”이라고 특별하게 불렀다(사 58:13).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다(막 2:28). 계시록 1장 10절의 동시대의 증거나 그 이전의 증거를 가지고 판단할 때 계시록 1장 10절“주의 날”과 일치시킬 수 있는 날은 제칠일 안식일뿐이다. (383.1)
 그런데 로마 황제가 요한의 시대에 주(kuriakos)로 호칭되었고 황제를 영예롭게 하는 특별한 날을 지정하기 위해 황제의 이름을 사용한 사실을 가지고 요한이 그리스도인들의 황제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의 뜻으로 일요일에 대하여 “주의 날”(kuriakē hemera)을 사용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차라리 요한이 황제 숭배에 대항하는 뜻에서 황제가 자신의 특별한 날을 선포하고 있듯이 요한의 하나님도 자기의 날 곧 제칠일 안식일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암암리에 나타내기 위하여 “주의 날”이란 표현을 사용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황제의 날” 때문에 예배의 날을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바꾸었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황제의 날의 대항 개념으로 요한이 주 그리스도의 날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해도 주 그리스도의 날이 안식일이 아니라 일요일이라고 주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3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