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예지(foreknowledge)
 성경이 말하는, 변동치 아니하는 영원한 하나님은 지식에 능하신 분이다(수 22:22). “야훼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삼상 2:3).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아실 뿐 아니라 창조된 우주도 아신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명백하게 삼위일체와 관련된 용어들로 묘사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천명하셨다(마 11:27; 참조 눅 10:22). 이런 지식은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것이며, 창조 및 구속과 관련된 하나님의 모든 행위의 원천이다. 하나님은 “명철이 한이 없으시”다(사 40:28)는 이사야의 인식은 하나님의 지식의 이런 차원에 적용된다. 이런 지식은 신성의 내적 본질에 속한 것이므로 창조된 존재는 지금 거기에 다다를 수 없을 뿐 아니라, 구속받은 자들도 영원토록 거기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146.1)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하다(욥 37:16).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을 하나님의 전능성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성경이 전지전능성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의 주권을 고려하여 지식의 수동적인 특성(수용성)을 제거하진 않는다. 지식에서 수용성을 제거하면 사실상 지식도 제거되는 것이다. 성경의 기자들이 하나님을 창조된 우주를 아시는 분으로 묘사할 때 하나님이 그분 자신과 창조된 다른 실재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내비치는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단지 부분적이고 제한된 지식에 달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며, 하나님의 경험에는 제한성이나 편파성이 전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식이 지니는 제한 없는 특성을 전지성과 전능성이라는 속성으로 제시한다. 전지성이란 그분의 지식 속에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을 가리키고, 예지는 그분의 전지성 안에 과거와 현재의 실재뿐 아니라 미래의 실재, 심지어는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까지도 포함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다. (146.2)
 요한은 하나님의 전지성을 분명하게 선포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요일 3:20)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같은 개념을 더 자세하게 표현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하나님의 전지성의 영역에는 분명하게 세계(욥 38:33; 창1:31), 인간 존재와 그들의 자유로운 행동(시 44:21; 139:1-5; 마 6:8, 32; 눅 16:15; 행 15:8)이 포함된다. (147.1)
 베드로와 바울은 하나님의 예지를 분명하게 주장했다(행 2:23; 롬 8:29; 11:2).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도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통해 예지의 신학적인 의미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셨다.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사 46:9-10; 참조41:21-24; 44:6-8). 그러므로 예지는 하나님의 전지성 안에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실재도 포함돼 있다는 확인이다. 이뿐 아니라, 성경에서 예지는 주로 하나님(행 15:16-18; 롬 8:29, 30)이나 인간 존재(시 139:16)나 하나님과 인간 존재(행 2:23)가 행할 미래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가리킨다. (147.2)
 성경은 하나님이 아시는 분이며 또한 그분의 지식에는 모든 것, 다시 말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자유로운 결정까지도 포함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분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아시는지는 신성의 숨겨진 영역에 속한다. 하나님의 예지를 지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모순되거나 양립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 둘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아시는 방식이 인간이 아는 제한된 방식과 똑같이 작용한다고 암묵적으로 추정한다.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예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예지는 인간의 유비나 상상력으로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신비로 데려간다. (147.3)
 하나님의 전지성에 대한 깨달음에 다윗이 보인 반응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지식을 묘사한 후 간단하게 결론짓는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성과 예지를 다룰 때도 신비로서의 하나님의 본질(참조 II. B)이 제시된다. 한편으론 신비의 계시된 측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성과 예지가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신성의 숨겨진 측면 때문에 하나님이 전지성과 예지의 영역 안에서 인식적인 활동을 어떻게 수행하실 수 있는지를 인간 존재가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인식 능력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을 개진할수 없는 것이다. (147.4)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전지성과 예지에 대한 계시는 하나님의 인식 신학에 출발점을 제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것은 인간의 지성으론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아시는지를 파악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계시된 자료를 제쳐두고 하나님의 인식 구조를 해석하려는 어떤 시도도 비성경적이며 인간의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성경에 나타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전지성과 예지에 대한 계시를 준 또 다른 목적은 예정(롬 8:29), 선택(롬 11:28), 십자가(행 2:23) 같은 구속적 활동에 대한 분명한 이해에 필요한 기본 틀을 제공하는데 있다. (147.5)
 B. 예정
 전지성과 예지는 세계 전체 및 각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과 관련된 하나님의 인식적인 활동을 가리킨다. 이런 전반적인 맥락 안에서 예정은 인류의 구속을 이루기 위한 기본적인 요소와 구조를 결정하는 것과 관련된 하나님의 의지적 활동을 말한다(엡 1:5, 9, 11; 고전 2:7). 일반적인 의미에서 창조된 실재의 본질과 구조를 정하는 하나님의 결정은 예정에 속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세계의 창조는 실재의 본질을 위한 하나님의 청사진이 실현된 것이다. 성경적 의미에서 예정은 구체적으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리킨다. 창조가 창조된 실재들을 위한 하나님의 청사진의 실현이었듯이, 예정은 죄인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계획이었다. (147.6)
 성경은 “뜻[목적]”(프로쎄시스, “미리 설정된 계획”, 롬 8:28; 9:11; 엡 1:11; 3:11; 딤후 1:9), “비밀[신비]”(엡 3:9),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고전 2:7)같은 말로써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청사진을 가리킨다. 성경에 프로오리조(“미리 결정하다”)라는 동사로 나타나는 “예정”이라는 말은 구원의 계획에 관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전(事前) 결정을 가리키기 위해 성경의 기자들이 사용하기도 한다(행 4:28; 롬 8:29, 30; 고전 2:7; 엡 1:5, 11). (148.1)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창세전에”(엡 1:4; 벧전1:20), “만세 전에”(고전 2:7), “처음부터, 태초부터”(살후 2:13; 참조 요일 1:1) 생각하고 결정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정”(predestination)이라는 단어에서 접두어 pre가 말하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창 3장) 전에, 세계 창조(창1, 2장) 전에, 심지어는 창조된 시간의 시대들 전에 즉 영원 전에 인류 구원을 위한 계획의 구조를 고안하고 결정하셨다(엡 1:9;참조 대쟁투1. A. 1-5). (148.2)
 하나님의 예정은 어떤 이들이 믿는 것처럼 인류의 영원한 구원이나 영원한 멸망을 결정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은 예정과 예지를 동일시여기지 않는데,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그분이 아시는 모든 것을 예정했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예지에 대한 성경의 개념에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도 포함된 것이 사실이지만, 성경은 두 가지 이유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운명을 예정하셨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첫째, 바울은 예지와 예정을 분명하게 구분한다(롬 8:29). 따라서 이 두 관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성경에 따르면 인간 존재의 구원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과 사역뿐 아니라 성령의 초청과 역사에 믿음으로 보인 자유로운 반응과도 관련된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데 자유로운 선택이 차지하는 역할은 하나님의 예정에 포함된 최종 심판의 가르침에 암시돼 있는데(행 17:31),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하나님의 계획의 모든 대책을 받아들이라는 부름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반응 그리고 우리의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등이 관련된다. (148.3)
 C. 창조
 하나님의 전지성, 예지, 예정, 선택의 전반적인 맥락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창조는 그분 자신 외에 새로운 실재 곧 우주를 존재케 한 그분의 유형적인 활동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창조는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청사진을 구현하고(참조 잠 8:22-31; 참조 렘 10:12), 다른 한편으론 역사를 가능케 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필요하게 한다(참조 IV. E). (148.4)
 처음부터(창 1, 2장) 끝까지(계 14:7)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라고 가르친다. “야훼의 말씀으로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라고 말한다. 야훼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우주가 존재케 되었다(시 148:3-6; 히 3:4). 성경은 구체적으로 삼위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을 창조 행위를 이룬 분으로 제시한다(고전 8:6; 히 1:2; 사37:16; 요 1:3; 창 1:2; 욥 33:4). (148.5)
 창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활동에 의존돼 있다. 다시 말해, 성경에 따르면 창조는 하나님 외에 물질이나 물리적인 에너지 같은 어떤 원리의 존재를 요구하거나 추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롬 4:17)라고 설명하며, 좀 더 구체적으로 전문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고 설명한다. 인간의 창조성이란 이미 선재하는 물질적 실재를 배열하는 과정에 불과하므로 하나님의 창조를 인간의 창조성에서 유추하여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전적으로 그분의 능력에 의존돼 있으며(렘 10:12), 선재하는 독립된 물질이나 그분 자신의 존재의 확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성경적 개념을 전통적인 “무로부터의”(엑스 니힐로) 창조라는 공식이 잘 포착하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의 이원론, 신플라톤주의의 발출설, 범신론, 범재신론, 현대의 진화론 등은 실재의 기원을 말하는 성경 기사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148.6)
 하나님의 영원성(참조 III. A)과 불변성(참조 III. B)은 무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된 시간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이므로 창세기 1-2장은 문자적인 7일이라는 역사적인 과정 곧 그 시간 안에서 하나님이 상호 보완하는 연속적인 창조 행위를 통해 우리의 세상을 존재케 하신 과정을 묘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사업의 클라이맥스는 일곱 번째 날에 일어났다(창 2:2; 참조 막 2:27). 하나님이 하늘과 땅이라는 물리적 실재를 창조하는 일로부터 안식하심으로 창조의 목적이 완성되도록 하셨다. 즉 하나님과 인간 존재의 인격적이고 직접적인 교통이 일어난 것이다(참조 IV. D). 매우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런 교통이 인간의 존재를 구성한다고주장할수 있다. (149.1)
 세상은 창조를 통해 비존재에서 존재가 되었다. 세상은하나님 외에 “다른”것 곧 하나님과 독립된 어떤 실재이다. 이 말은 세상이 하나님의 실재들 전체의 총합이 아님을 내비친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타자]”의 창조라는 개념은 범신론적 및 범재신론적인 논증 곧 하나님은 “무한하고” 무시간적인 분으로 인식되므로 그분 밖에는 “다른” 실재가 존재할 수 없다는 논증을 배격한다. 성경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구현으로서의 창조는 그분 자신을 거스를 수 있는 타자를 허용하신 데서 피조물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관계적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창조는 피조물을 위한 “공간”을 허용하기 위해 하나님 자신을 제한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존재 안에서 피조물처럼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이렇게 창조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에 필요한 조건이 되며, 따라서 역사에 필요한 조건도 된다. (149.2)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범위는 우주적이어서 하나님 외에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을 포괄한다(창 1:1; 사 40:26; 요 1:1-3; 골 1:16; 계 4:11; 10:6). 하나님이 고안하고 이루신 사역으로서의 창조를 본질적으로 악한 것으로 보거나 그 후에 이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계획된 조치나 단계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성경의 창조 기사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말한다.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창조 주간 이후에도 계속 작동하였다. 물리적 세계의 창조는 엿새 동안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물리적 실재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계속하여 일어나는그분의 쉼 없는 보존 사역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에스라는 이런 기본적인 개념을 천명했다. “주는 야훼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바울은 그런 개념을 간명하게 진술했다.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hold together)”(골 1:17; 참조 히 1:3; I. A, B; II. C). (14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