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에서 봉사하면서도 하나님께 반역하다 죽임을 당한 조상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딛고 일어서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로 섬기며 평생을 찬양으로 보낸 고라의 자손은 흙탕물에서 피어난 시편의 연꽃이 아닐 수 없다.

 — 시편 84편(217.1)
 시편의 연꽃—고라의 자손들
 연꽃은 흙탕물에서 떠올라 더욱 고상하고 장미는 가시덩굴에 피어 더 아름답다. 가장 선하신 “나사렛 예수”“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한복음 1장 46절)는 그 전설(傳說)의 곳에서 산뜻한 샛별처럼 떠오르셨다. 초라하고 구지레한 “양의 우리에서 취”(시편 78편 70절)해진 다윗은 백합화같이 짙은 서정(抒情)의 향기를 뿜어내어 시편을 그의 체취(體臭)로 채웠다. 그런데 시편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과 성전을 참으로 그리워하여 이를 토로(吐賜)한 성전 사모곡(思母曲)들의 대부분이 “고라 자손의 시”(for the sons of komh)라는 표제(標題)를 붙이고 있다. 우리말의 “의”(of)로 번역된 히브리어 접두 전치사 “레”(le)가 편집이나 연주를 의미할 수도 있어 굳이 작시(作詩)는 아닐지라도 이러한 시들이 고라의 자손에게 돌려지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217.2)
 그들의 조상 고라는 성막에서 섬기는 특권을 누렸던 레위 자손이면서도 감히 모세를 대적하는 반역에 앞장섰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일족이 산 채로 땅 속에 삼켜지는 비극을 치렀다(민수기 16장). 그러나 중심을 지켜 초연히 아버지의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26장 9~11절)고 살아남아 평생을 성막에서 섬겼으며, “심히 큰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역대하 20장 19절)하는 일에 앞장 서는 사람들이 되었다. 성막에서 봉사하면서도 하나님께 반역하다 죽임을 당한 조상의 부끄러운 과거를 딛고 일어서 진실된 찬양과 온전한 헌신으로 조상의 수치를 말끔히 씻어낸 고라의 자손은 참으로 흙탕물에서 피어난 시편의 연꽃이 아닐 수 없다. (218.1)
 그들에게 돌려지는 11편의 시 대부분이 그들 가문(家門)으로서는 수치의 현장이요 비극의 회상(回想)인 성전(성소)을 애타게 사모하는 것들이어서 소묘(素捕)를 더욱 짙게 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로 시작되는 42편.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을 환난 날의 피난처로 소개하는 46편.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로 시작되는 48편과 거룩한 산 시온을 예찬한 87편이 모두 고라 자손에게 표제를 돌리고 있다. 그 가운데도 42편과 함께 기약 없던 유랑(流浪)시절로 생각되는 84편이 고라 자손에게 돌려진 것은 이슬을 머금은 한 송이 장미를 가시덩굴에 피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윽한 손길인 것이다. (218.2)
 지명 수배 받은 새—참새의 안식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生存)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84편 1~4절). (219.1)
 네 절씩 세 부분으로 구성된 84편의 첫 단락에서 시인은 제단으로 대표된 성전 경내(境內)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둘 보금자리를 마련한 참새와 제비를 한 없이 부러워하며 “주의 집에 거하는 자”의 행복을 애절하게 그리워하고 있다. 시인은 지금 생명도 없고 감각도 없는 목석(木石)같은 우상이 아니라 “생존하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자신의 존재의 전부인 “영혼”“마음”“육체”가 쇠약해지도록 동경(憧憬)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쏟아 놓아야 할 영혼의 부담과 부르짖어야 할 마음의 소원과 고백해야 할 육신의 연약함이 그를 속 태우고 목마르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처럼 언제 어디서나 생명의 위협을 당하며 사는 불안한 운명을 타고난 지명수배(指名手配)받은 참새와 떠도는 제비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성소) 경내에서 누리는 안전과 평화가 시인의 가슴에 사무치고 있다. 실제로 “성소”를 뜻하는 영어의 “생츄어리”(sanctuary)는 오늘날에도 새와 짐승들의 사냥이 금지되는 조수(鳥獸) 보호구역을 뜻하고 있어 시편의 뜻을 생생하게 하고 있다. 참으로 하나님의 집 성소는 속절없는 죄인이 죄 사함을 받고 생명을 보존하는 성역(聖域)이며 원수에게 쫓기며 죄에 시달려 피곤해지고 상처 입은 심령이, 피하여 안전을 누리는 견고한 도피성(逃避性)인 것이다. 그러한 성소에 주야로 거하며 “항상 주를 찬송”하는 제사장들과 섬기는 레위인 들은 얼마나 행복된 사람들인가? “한 앗사리온”[동전]에 “두 마리”씩 팔리는 그 헐값의 참새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 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마태복음 10장 29절)는 약속이 집행되는 성소, 그 곳에 영원히 살고지고!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밤을 새우”(시편 102편 7절)는 외롭고 괴로운 마음의 안식처, 그 곳에 영원히 거할 둥지를 틀고 지고! (220.1)
 눈물의 골짜기, 시온의 대로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을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恩澤)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84편 5~8절). (221.1)
실제로 “성소”를 뜻하는 영어의 “생츄어리”(sanctuary)는 오늘날에도 새와 짐승들의 사냥이 금지되는 조수 보호구역을 뜻하고 있어 시편의 뜻을 생생하게 하고 있다.
(222.1)
 또 다시 네 절로 된 두 번째 단락에서 시인은 앞에서처럼 하나님의 집에 거하지는 못하지만 시온의 성전(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일년에 서너 차례라도 나아가기 위하여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 특별한 절기에 순례의 길에 나서는 성도 곧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大路)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고 토로하며 또다시 성전을 그리워한다. (222.2)
 시온으로 향해 가는 순례 길과 가을에 내리는 이른 비가 연관된 것으로 보아 그것은 연중의 마지막 절기인 초막절(草幕節)이기 십상이다(스가랴 14장 15~17절). 무덥고 메마른 긴 여름철 땀 흘린 보람으로 거둔 풍성한 결실로 한 해 농사를 마친 뒤에 이 수장절(收藏節:신명기 16장 13절)을 예루살렘에서 지키기 위해 “시온의 대로”를 따라 순례 길에 나서는 성도의 마음에는 만감(萬感)이 교차하게 된다. (222.3)
 시온으로 가는 순례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여러 날 계속되는 행로(行路)는 피곤하고 길은 거칠어 발이 상하고 메마른 땅에서 목은 갈증으로 탄다. 낯선 길에서 당하는 외로움과 두려움도 있고 성격이 별난 낯선 동행(同行)을 만나 마음 상하는 일도 있으며 겹겹의 슬픔이 포개진 계곡을 눈물을 흘리며 지나야 할 때도 있다. 그것이 칠십인역(LXX)에는 “눈물의 골짜기”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바카(baca) 골짜기(the valley of Baca)”인 것이다. 그러나 슬픔과 아픔으로 깊게 패인 “눈물의 골짜기”는 이내 애통하는 마음을 위로하고 싸매시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을 때 감추인 물길을 터뜨려 기쁨이 솟구치는 “많은 샘의 곳”으로 바뀐다. “이른 비로 은택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비록 행로가 고달프다해도 지나간 허구(許久)한 날 그 많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발걸음마다 힘이 솟고, 성전에 이르러 성도와 함께 예배할 기대에 벅찬 가슴은 입에 가득한 찬양을 뒤댄다. (222.4)
 시온으로 향해 가는 발은 험한 길을 가지만 “그 마음”은 언제나 대로(大路)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설교한 죄로 12년을 어둡고 습한 “눈물 골짜기” 뱃포드(Bedford) 감옥에서 옥살이로 보낸 번연(John Bunyan)의 마음에는 “시온의 대로”가 열려, 이 세상에서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의 영적인 경험을 엮은 불후의 걸작[천로역정]을 내놓았다. 노경에 이르러 지중해의 외딴섬 밧모(patmos)에 귀양 간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장 9절) 그 거칠고 쓸쓸한 바위투성이의 “눈물의 골짜기”에서도 “시온의 대로”가 마음에 뚫려, 새 예루살렘이 자리한 하늘의 “시온산”에 그리스도와 구원 받은 성도들이 서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미래의 영광을 목도했다(14장 1~2절). 참으로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 있고 말고. (223.1)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千)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여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84편 9~12절). (223.2)
 마지막 네 절로 된 세 번째 단락에서 시인은 성소에 거하는 특권은 고사하고 자기처럼 일년에 서너 차례 정해진 절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특권마저 빼앗긴 채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을 멀리서 그리워하며 하나님을 마음으로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위로한다. (224.1)
파스퇴르가 만들어낸 광견병 백신을 최초로 써서 목숨을 건진 알사스 지방의 소년 마이스터는 그 은혜를 갚고자 파스퇴르의 생전에는 연구소 문지기로 사후에는 ∙∙∙
(224.2)
 성소 경내에 집을 짓고 안전히 거하는 참새나 제비의 처지도 못되는 불안한 지금의 자기는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대적에게서 자신을 보호해 줄 힘 있는 방패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그런 방패는 하나님뿐이다. 이처럼 현실이 불안하고 앞날이 어두운 때 지닌것 없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초라해진 자기에게 “영화”를 입혀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다. 참으로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신 것이다. (2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