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구약의 난해 문제 질문 25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말씀하셨는가?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삼상 16:2). (132.1)
 성경에 나온 사람들이 기만에 호소하여 다른 사람으로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믿게 하거나(창 12:10~20),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하거나(행 5:1~6), 진실을 말하지 않고 발뺌할 경우(출 1:15~22), 그러한 행동을 인간의 한계요 죄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사무엘상 16:1, 2 같은 본문에 접하면 해석의 어려움은 상당히 커진다. 여기서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렸고, 따라서 다윗에게 가서 그를 왕으로 기름 부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사무엘은 사울이 자신을 죽일까봐 두려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대답으로,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하라고 말씀하셨다. (132.2)
 얼마나 이상하게 보이는가!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왕이나 순회하는 자들을 속여 그의 생명을 보존하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지자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가르치셨다면 어떻게 동일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함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창 17:1). (132.3)
 이 난제를 해결하는 제안들
 이 난제를 다루면서 어떤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들을 내렸다.

   (1) 거짓말이나 속임수에 대한 금령은 성경에서 절대적 표준은 아니다. 거짓말은 “더 약한 편이 더 강한 세력에 대항하여 성공하는 데는 용납될 수 있고 일반적으로 칭찬할 만한 수단”으로 여겨지며 ∙∙∙ 하나님 역시 피해자를 위해 일을 처리할 땐 발뺌하는 것을 권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적절한 일이다.1

   (2) 거짓말쟁이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묵과된다. 그래서 라반에게 한 거짓말은 “간접적으로 정당화된다.” (창 30:1~43).2

   (3) 더 높은 규준이 더 낮은 규준들을 폐지하진 않고 다만 그것들보다 나을 뿐이다. 그래서 생명을 구하는 의무가 진실해야 하는 의무보다 더 크다(예컨대, 수 2:5).3

   (4) 거룩한 속임수는 더 높은 목적에 기여한다면 용납된다.4

 그러면 이러한 결론들이 성경 본문에서 나왔는가? (132.4)
 하나님과 성실하심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위의 견해들에 도전을 준다. 민수기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고 말한다(민 23:19). 논의 중인 이야기의 몇 절 앞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참조 시 89:35; 딛 1:2; 히 6:18)라고 밝히 말한다. 진실하심은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본성 자체나 다름없으며 그분의 행동 방식이다. 거짓말에 대한 금령은 인간들에게도 행동의 절대적인 표준이다. 진실은 날조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중심(시 51:6)에서뿐만 아니라 행동(출 20:16, 계 14:5)에서도 진실을 기대하신다. 이것이 없이 인간의 삶과 운명은 결정적인 위험에 처한다(레 19:11; 잠 12:22; 계 21:8, 27; 22:15). 따라서 사무엘상 16:1, 2의 본문을 해석할 때 우리는 성실과 정직의 존재로 하나님의 이름을 옹호해야 하며. 인간에게도 이와 동일한 요구를 기대해야 한다. (133.1)
 사실을 숨김
 사무엘상 16장의 문맥은 사울이 자신 및 그의 나라에 몰고 온 비참한 상황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를 버리신 후 사무엘도 예기할 수 없는 왕의 광분에서 안전하지 않음을 느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 때문에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킴으로써 그의 두려움에 대처하셨다. 첫째,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그리고 이어서 특정 지역의 장로들을 주빈으로 초청하는 특별한 잔치를 위해 이곳저곳을 순회했다. 베들레헴의 경우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초청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무엘은 레위인 사사로서의 그의 위치 때문에 특별히 지방에서 해결되지 않은 살인죄를 속하기 위해 암송아지 제사를 드릴 필요가 있을 때는 그의 정규적인 제사장 관할 구역 외도 순방할 수 있었다. 이것은 성읍의 장로들이 사무엘을 만났을 때 왜 두려워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될수 있다. 그들이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라고 묻자 그가 “평강을 위함이니라.”라고 대답했다(삼상 16:4, 5). 더욱이 제사와 이어지는 잔치가 공개적인 사건이었지만 기름 부음은 제사와 잔치에서 분리되어 좀 더 사적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사울의 기름 부음(삼상 9:22~10:8)이나 “그 형제들 중에서” 다윗에게 기름 부은 일(삼상 16:13)이 그렇게 이뤄졌다. 그 공개적인 사건의 어떤 면에서도 베들레헴에서 한 사무엘의 봉사를 기름붓는 의식으로 인식할 수 없었고, 그가 암송아지를 취한 것도 기름 부음과 연관되지 않았다. (134.1)
 하나님께서 당신의 두려워하는 종에게 하신 지시(“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는 거짓말이나 발뺌과는 질이 다른 도덕적 범주에 속한다. 카일과 델리취(Keil and Delitzsch)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134.2)
여기에는 거짓이 없었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진실로 희생제사 축제에 가려 했고 이새의 가족을 거기에 초대하려 했으며, 그런 다음 여호와께서 선택된 자로 지적할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사명과 직접 관련이 없는 세부사항을 숨긴 것에 불과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미 버리셨고,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 왕국의 신정통치의 국면에 비밀히 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5
(135.1)
 사무엘상 16장에서 얻을 교훈
 사무엘상 16:1, 2은 몇 가지 교훈을 가르친다. (135.2)
 1.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어떻게 사려 깊은 진리의 보관자가 될 수 있는지 가르치신다. 진리를 어느 때나 아무데서나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회의론자에 불과하다고 본회퍼(Bonhoeffer)는 말한다. “발해진 모든 말은 살아있고, 따라서 특정 환경에서 그것에 맞는 거소를 갖는다. 가정에서 쓰는 말은 사업에서나 공적으로 쓰는 말과 다르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오는 따뜻함으로 생명이 되는 말이 공공 생활이라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는 얼어붙는다.”6 사무엘은 다윗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울에겐 말할 수 없었다. 그러면 그 말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135.3)
 2.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가르치시진 않았다. 다윗에게 한 말과 사울에게 한 말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차이는 아니었다. 사무엘에게 그의 의도를 물었더라면 그가 제사만 드리기 위해 방문했다고 말함으로써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무엘의 대답은 정확하게 사실을 말했을 것이다. (135.4)
그는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가 이 제사를 드리지 않고 백성의 장로들과 이새의 아들들을 부르지 않고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이룰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그의 방문의 주된 목적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그렇게 했더라면 그로 인해 유익보단 해가 유발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에서든 거짓을 말해선 안 된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서 진실만 말해야 하고 모든 경우에 듣는 자가 거짓을 진실로 믿지 않도록 진실을 말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서 진실을 다 털어놓을 의무는 없다.7
(135.5)
 이것은 반만 진실을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136.1)
 3. 진실을 숨기는 것이 거짓말은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것이 의무일 수도 있다.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는 이렇게 설명한다. (136.2)
사무엘의 경우 오직 진실만이 사울에게 제시되었다. 사무엘의 궁극적인 의도와 관련하여, 아무것도 긍정하거나 부정하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사울의 심기를 건드려, 이때 베들레헴에 온 사무엘의 궁극적인 동기가 무엇이었는지에 관해 조사하도록 하지 않았다 이런 질문이 야기되었더라면 사무엘은 전혀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긍정하기를 피하든 부정하기를 피하든지 했어야 후}거나 사실대로 말해 사울의 분노에 맞닥뜨려야 했을 것이다.8
(136.3)
 4. 예수의 모본이 여기에 교훈을 준다. 두 번 이상의 경우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적들을 피하셨으며(요 8:59; 12:36), 두 번 이상 대답을 피하셨다(막 14:61; 15:5; 눅 23:9). 침묵해야 할 때가 있고 말해야 할때가 있다고 지혜자는 말한다(전 3:7). 따라서 아무에게도 모든 질문에 대답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하실 때나 침묵하실때 기만하신 적은 없었다(벧전 2:22). 그분은 제자들에게도 신중하게 대답하신 적이 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1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