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VI부 결언(結言) (21) 제 16 장 제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 (21)
 이것이 바로 그 사랑받던 제자가 다시 한번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필요로 한 모든 증거였다(21:7; 20:8). 이 순간 베드로는 그 다른 제자의 통찰을 따라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항상 조급했던 그는 그 즉시 예수께 더 신속히 가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으나, 나머지 제자들은 많은 고기를 잡은 그물을 끌고 배로 따라갔다(7, 8절). (351.1)
 그들이 해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예수께서 친히 몇 마리의 고기를 취해 불 위에 얹어놓고 조반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9절). 그는 제자들이 그의 지시를 따라서 잡은 153마리나 되는 많은 고기 중에서 몇 마리를 더 얹어놓았고(10, 11절), 이 복음서의 저자는 잡은 고기가 많았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11절). (351.2)
 다소 말이 없는 아침 식사가 이어져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제공하시는 음식을 먹었다(12, 13절). 제자들이 침묵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이분이 정말 예수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을까? 이와 같은 부활 후의 출현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예수께서 주셨던 고별 강론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지는 않았을까? 어떤 경우든지 간에 그들은 제2 세대가 그 사랑받던 제자가 죽을 때 느끼는 것과 똑같은 불확실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예수의 육신적 임재는 제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예수께서 떠나시고 성령께서 오셔야 확신을 줄 수 있었고, 그러한 실재성은 그리스도인 제1 세대와 제2 세대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었다. (351.3)
 흥미롭게도 조반 식사는 주의 만찬과 5,000명을 먹이신 것과 동일한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 요한복음 6:11에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가 13절에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 나눠주시고.” 이 표현은 마태복음 26:26, 마가복음 14:22, 그리고 누가복음 22:19의 사건을 연상시켜 준다(참고 고전 11:23). 요한복음은 주의 만찬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지만, 6장의 이야기와 함께 이 사건은 성만찬 예식의 냄새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351.4)
 15절에 의하면, 조반을 마친 후에 예수께서는 그와 맺은 관계의 깊이와 신실성에 관하여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셨는데, 의심할 여지없이 18:15-18, 25-27에 묘사된 것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것에 대한 의도적인 대응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물으시고, 베드로가 대답하고, 그 대답에 대해 예수께서 응답하시기를 각각 세 번씩 하고 있다(15, 16, 17절). 매번 예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다. 매번 예수께서는 “내 어린양(양)을 치라(먹이라)”라는 식으로 대답하셨다. (352.1)
 처음에는 예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고 덧붙이셨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를 더 사랑했는가? 베드로는 이전에 예수께 대한 자신의 충성심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쉽게 자신 만만했었으므로(마 26:33), 예수께서는 이 점에 대해 그의 생각을 들어보기를 원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 질문의 이 점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거부하자(요 21:15), 예수께서는 이것을 고백으로 받아주시고 이 점에 대해 다시 그에게 요구하지 않으셨다(16, 17절). 적어도 20-23절은 베드로가 영적인 비교(比較)의 어리석음에 대해 무엇인가를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와 가지는 관계의 깊이이지, 그 깊이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352.2)
 여러 세기에 걸쳐서 학자들과 설교자들은 이 문단에서 발견되는 “사랑”이란 단어들이 서로 다른 두 개의 헬라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과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답변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근래의 세밀한 연구를 통하여, 요한은 독자들이 서로 다른 어근의 뜻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이끌어내도록 하려는 의도 없이 그냥 동의어(同義語)들을 사용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Beasley—Murray, John, 394; Talbert, Reading John, 261). 헬라어로 “사랑하다”라는 의미의 두 단어(아가파오[agapaō]와 필레오[phileō])는 제4 복음의 다른 곳에서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두 단어 모두는 그 주제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든지(3:16; 16:27),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든지(3:35; 5:20), 우리를 향한 예수의 사랑이든지(11:3, 5), 혹은 예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든지(8:42; 16:27)에 상관없이 사용될 수 있다. 요한은 많은 해석가들이 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세밀하게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Brown, 2:1102—1103)! (352.3)
 그러므로 15-17절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삼중으로 반복되는 질문, 대답,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뿐이다. 이는 예기치 못한 것으로, 예수께서 다소 무례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상당한 아픔의 대가로 크나큰 고통을 억누르며 마음속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17절; Beasley-Murray, John, 405). 베드로의 자기 확신과 고집은 점차 무너져 내려가서,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으나, 예수께서 그의 마음을 아시며 그가 심판하실 때에 공의로우실 것이라는 확신은 남아 있었다. (353.1)
 “고통이 없으면 이득도 없다”(“no pain, no gain”)는 말은 신체의 잠재력을 최고로 개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이다. 적어도 이 생에서 “고통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란 말은 영적 성장의 법칙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영적인 삶에서 상당한 진보를 한 사람들은 대개 많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왕국에 부자가 적은 이유가 이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고통, 상실, 빈곤, 그리고 극심한 마음의 고통에 관한 그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진보를 이루도록 해줄 수 있다. 그리고 종종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그 고통을 주는 사람이 바로 사랑이 많은 외과 의사처럼 상처를 입힘으로 치유하시는 예수 자신이었다. 예수께서는 성급하게 하는 피상적인 대답에 만족하지 않으신다. 그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참된 생각과 동기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신다. 하지만 그 과정은 보통 대가를 요구한다. (353.2)
 본문에서 삼중 대화는 식사한 장소, 즉 다른 제자들이 함께 있는 곳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절은 예수와 베드로가 해변을 걷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엘렌 화잇은 예수와 베드로가 17절18절 사이에서 일어나서 그들이 함께 걸으면서 개인적인 담화를 시작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시대의 소망, 815). 그녀는 또한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 앞에서 고백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그가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무서운 배신을 한 이후 그들의 신임을 다시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18:15-18; 25-27; 화잇, 시대의 소망, 811). (353.3)
 그의 고백이 있은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죽을 때까지 내내 그가 받아들인 신실한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될 것임을 보증하셨다(18, 19절). “많은 이가 그러하듯이 여기서 베드로가 직무를 회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가 실제로 직무를 박탈당하지 않았기에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그와 같은 행위를 한 후에 그리스도의 명예가 받은 깊은 상처, 그의 직무에 가져온 흠, 제자들 사이에 높이 서는 데 가해진 상처로 인해 그의 부르심을 새롭게 하고, 이와 같은 그의 지위를 재정립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Jameison, Fausset, and Brown, 1078). (354.1)
 생명을 얻기 위한 베드로의 궁극적인 과제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었다(19절). 그는 예수께서 하신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지상에서 그의 삶 속에서 예수의 위치를 차지해야 했다. 다른 모든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역할은 지상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예수의 사역을 그를 대신하여 하는 것이었다(이 책의 제12장의 「결론」을 보라). 그처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사명은 고별 강론에 약속되어 있는 것처럼 성령의 사역과 평행을 이룬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들의 말과 글을 통하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를 새로운 세대들에게 실제적인 분이 되게 만들어야 했다. (354.2)
 그러나 베드로의 비교병(比較病)이 완전히 다 치유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예수와 함께 해변을 걷고 있을 때, 돌아서서 그들을 따라오는 그 사랑받던 제자를 바라보았다(20절; 예수로부터 자신의 정당한 몫을 확보하기를 원하면서). 베드로는 그 사랑받던 제자의 미래가 어떨 것인지 알고 싶었다(21절; 그의 미래와 비교하면서). 너는 나를 따라야 한다!”(22절)는 예수의 대답은 원문의 어조가 강조형으로 되어 있다. 그 사랑받던 제자가 당할 경험은 베드로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354.3)
 예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명령을 베드로는 자신이 요한과 다른 제자들보다 위에 있는 교회의 머리가 되었다는 지시로 여겼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다른 교인들뿐만 아니라 요한의 경험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그와 같은 베드로의 독점을 금하고 계신다. 교회는 다수의 의논 상대를 가질 때 안정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55.1)
 독립 정신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는 모두 교회 안에서 시행될 때마다 영적인 해를 가져온다. 복음서가 단 한 개가 아니라 네 개가 있다는 것은 성경의 강점이다. 그것은 예수의 어떤 한 생각, 어떤 한 모습을 모든 사람들이—인종, 문화, 혹은 개성에 상관없이—따라야 할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을 막아준다. 새, 짐승, 꽃, 그리고 물고기를 끝없이 다양하게 만드신 바로 그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의 다양성도 존중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몸 자체의 성격을 반영하는 지도력의 다양성을 통해서만 그분의 품성을 바로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355.2)
 이 책의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요한복음 21:20-23의 주된 목적은 요한이 살아서 예수께서 오시는 것을 볼 것이라는 풍문이 교회 내에 돌아다니는 것을 불식시키려는 것이었다. 요한이 고령임을 미루어 볼 때 예수의 귀환은 제1세기의 90년대에 곧 있을 것으로 여겨졌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재림하실 세대를 계산하는 모든 시도가 그러하듯이, 이 소문은 극히 위험한 것이었다(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은 날짜를 정하는 유혹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제공하고 있다). (355.3)
 요한의 죽음은 예수께서 그의 사랑하시던 제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돌아오실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믿는 교회를 황폐케 할 것이었다. (355.4)
 이 복음서의 저자는 그 사랑받던 제자에 대한 예수의 언급이 오해되고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살아서 그가 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미래가 괄목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베드로가 상관할 바는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의 의미는 어떤 인간의 말, 설사 영감받은 자의 말이나 주님의 입술에서 친히 나온 말이라 할지라도 모두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이 계속되는 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표현하려고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선한 것을 나누려고 할 때, 우리는 계속적으로 갈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즉흥적으로 한 말을 가지고 잘못 해석함으로, 사람들과 사상들에 대해 뭔가를 억측하는 일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를 생각해 볼 때, 이런 생각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아무리 훌륭해도 취약하고 결점이 많은 것이다(렘 17:9). (356.1)
 문단의 주요 주제
 고기를 잡는 것과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