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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결론들이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다. 우리는 자신의 회심 전에, 바울이 바리새인과 같이,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외형적으로 계명들을 순종해야 하는 것으로 율법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후 5:16, 17). 다메섹 도성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바울은 점진적으로 율법에 대한 자신의 바리새인적인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바, 그 이유는 구약은 구원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430년 전에, 오실 씨(the Seed)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되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갈 3:17). (144.1)
 바울은 십자가의 관점으로부터 율법을 구원의 한 수단으로 보는 바리새인들의 이해를 거절하고, 인간의 행위를 위한 하나님의 의지의 한 계시로 율법을 보는 구약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바울에게는 율법이 하나님의 율법이며 또 하나님의 율법으로 남아 있다(롬 7:22, 23)는 것을 발견했다. 그 이유는 그 율법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으며(롬 9:4; 3:2), 그분에 의해서 기록되었고(고전 9:9; 14:21; 14:34), 그분의 뜻을 나타내며(롬 2:17, 18), 그분의 의를 증거하고(롬 3:21), 그분의 약속들과 조화되기 때문이다(갈 3:21). (144.2)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의 계시로서, 율법은 죄의 속성을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나타낸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설명한다. 그 이유는 율법이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을 죄인이 되게 한다. 사람의 생애에서 죄를 깨달아야 할 필요성은 옛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생애에서도 기본적이므로, 이토록 중요한 율법의 기능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종료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144.3)
 그리스도의 구속 사명의 기능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믿고 있는 것처럼,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율법 자체가 할 수 없었던 것을 행하셨다고 확증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께서는 신자들이 율법의 요구를 따라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 4). (144.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율법을, 하나의 외형적인 법문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반응으로서 지킬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율법 그 자체가 할 수 없는 바로 그것으로서, 그 율법이 인간의 외적인 표준이므로, 인간의 마음에 사랑의 반응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고후 5:14)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도덕적인 원칙에 조화되게 살므로 그분에게 반응하는 것이다(요 14:15). (145.1)
 바울은 율법의 준수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그들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비합법적으로 사용하도록 시도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할례와 같은 관습들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이방인 회심자들의 주요 문제였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려는 시도는 하나님 앞에서 전혀 소망이 없는 것임을 드러낸다. 그 이유는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서는 죄를 깨닫기”(롬 3:20)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타락한 상태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법을 준수할 수 없다. (145.2)
 바울이 전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율법주의, 즉 율법의 외형적인 준수를 통해 사람의 의를 세우려는 시도이다. 율법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무상의 선물로 주신 한 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롬 10:3 참조). 이것은 할례를 그리스도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로 제시하는 거짓 교사들이 가진 문제였다. 그렇게 하므로, 그들은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성취라는 잘못된 개념을 선전하고 있었다. (145.3)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열렬히 권하고 있었던 유대주의자들의 점증하는 압력은 바울로 하여금 율법의 배타적인 언약 개념을 공격할 필요성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죠지 호워드가 지적한 것처럼, “다른 상황 아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차별성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했었다”고 지적한다.79) (145.4)
 바울이 율법을 다루는 경우에서 발생한 다른 상황에 대한 이해는 그가 율법에 대해서 만드는 긍정적인 진술들과 부정적인 진술들 사이에 있는 현저한 모순을 해결하는데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15에서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에 의해서 폐지된 것으로 말하고 있는가 하면, 반면에 로마서 3:31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율법을 뒤엎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세운다고 설명한다. 로마서 7:6에서, 그는 “이제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으니”라고 진술하고 있으며, 반면에 뒤에 있는 몇 구절에서 그는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롬 7:12)고 기록한다. 로마서 3:28에서, 그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여전히 고린도전서 7:19에서, 그는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 진술한다. (145.5)
 바울은 어떻게 율법을 “폐해졌으며”(엡 2:15) 또 “세워졌고”(롬 3:31), 불필요하면서도(롬 3:28) 또한 필요하다고(고전 7:19; 엡 6:2, 3; 딤전 1:8-10) 볼 수 있었는가? 본 연구는 이러한 분명한 모순의 해결책을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다른 문맥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구원의 문맥(칭의—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 것)에서 율법에 대해서 말할 때, (특별히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그는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무용하다고 분명히 확증한다(롬 3:20).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행위의 배경에서 율법을 말할 때(성화—하나님 앞에서 바로 사는 것), 특별히 율법폐기론 자들을 다루면서, 그는 하나님의 율법의 가치와 유효성을 높히든다(롬 7:12; 13:8-10; 고전 7:19). (145.6)
 요약하자면,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지도하는 율법의 도덕적인 가치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은 포함시키고 이방인들은 배척한다는 선택의 문서로 보는 율법에 대한 구속론적(구원)인 이해를 비평하고 있다. 바울의 서신에서 율법에 대한 그의 도덕적인 용례들과 구속론적인 용례들 사이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못하고, 또 율법에 대한 자신의 비평이 특별히 율법, 곧 할례를 구원의 한 도구로 높이는 헬라인 유대주의자들 향해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이 전반적으로 율법의 가치와 유효성을 배척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도록 인도했다. 그러한 견해는 전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으로, 그 이유는 우리가 본대로 바울이 율법을 구원의 한 도구로서는 거절하고 있지만 그 율법을 그리스도인 행위의 도덕적인 표준으로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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