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삶을 거룩하게 하고 역사를 거룩하게 하고 세대를 거룩하게 하고 사람을 거룩하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시간이 거룩해져야 한다. 성일이 있는가 없는가는 거룩하게 되는 삶의 바탕을 갖는가 못 갖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최초로 “거룩하다”(카도쉬)라는 낱말이 사용되었던 대상이 시간인 제칠일이다(창 2:3). 성일로서의 안식일은 이처럼 사람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21.2)
 그리고 성일로서의 안식일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날이다. 하나님이 그 낯을 사람에게 향하는 날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는 날이다. 사람이 “주 너의 하나님만 섬기는 날이다”(마 4:10). 얼굴을 씻고 몸을 씻어 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날이다. 하나님을 마주 보는 인간의 얼굴에서 “신의 형상”이 반영되어야 하는 날이다. 얼굴을 닦고 몸을 씻어 주님을 뵈어야 하는 날이다. (22.1)
 안식일은 우리가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히 12:2) 주님을 바라보는 날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크게 자라나는 날이다. 마치 한 알의 겨자씨처럼 작은 존재가 나물보다 큰 나무 같은 존재로, 흙 같고 물체 같고 육체 같은 존재가 물체보다 크고, 육체보다 큰 영적 존재로 자라나는 날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성장하는 날이다. (22.2)
 안식일 자체가 큰 나무 같고 신령한 인격 같은 날이다. 흙이요 물체요 육체 같은 모든 피조물들을 그 가지와 날개와 품에 깃들게 하여 그 삶에 쉼을 가진 신령한 존재로 성장케 하는 예배의 날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적 교제를 나누어 하나님의 신성에까지 자라나게 되는 날이다. 그리하여 사람에게 이러한 날이 없다는 말은 그들에게 이같은 성장, 이같은 삶, 이같은 신성의 세계가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같은 예배, 신령과 진실의 예배는 영적인 존재로 성장하려는 존재에게는 양도할 수 없는 기회이며 권리이다. 지상 명령 같은 절대적 가치의 날이다.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해서도 안 되는 특권의 날이다. (22.3)
 안식일은 성일로서 세상의 성역 같고 금역 같은 날이다. 하나님이 거하는 집 같은 날이다. 신성불가침의 날이다. 공간 속에 구별된 하나님의 도성 같고 시간 속에 성을 둘러 구별된 하나님의 도성 같은 날이다. 이 땅에 있는 신의 세계가 안식일이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사람들로부터도, 우주 전체로부터도 구별된 거룩한 금역이다. 하나님의 성소보다 더 두렵고 더 아득하고 더 깊은 지성소 같은 날이다. “지존하신 자의 은밀한 곳”(시 91:1)이다. 절대 금역이다. 신성 절대불가침의 영역이다. 사람이 마땅히 “삼가 거룩히 지켜야” 하는 날이다.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 되는 날이다. 잡것들이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는 날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삼킬 자를 찾아 사자같이 부르짖는 채권자와 율법과 죄와 본능과 죽음과 무의미에 쫓기는 죄인들과 추방자들과 빚쟁이들을 이곳으로 초청하셨다. 그리하여 이 날은 이들에게 도피성 같은 날이다. 이 날로 도피한 자는 신성 절대불가침의 나라에 도피한 것이다. 아무도, 무엇도 이들을 쫓아 이 도피성 안식일 안으로 쳐들어오지 못한다. 신성 절대불가침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둥과 벼락 같고 불 칼 같은 “가라사대”로 이 도피성을 지키고 계시기 때문이다. (23.1)
 휴일로서의 안식일
 휴일로서의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막 2:27). 사람들과 육축들이 차별 없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고 노는 날이다”(출 20:10). 안식일은 사람의 쉼을 위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낳고 그 다음에 안식일을 낳았다. 사람 낳고 돈 낳았다 하는 주장과 같은 이치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숨쉬는 것들을 긍휼히 여겨서 제정하신 날이다. 생명 있는 것들에게 쉼은 곧 생명의 연속이기 때문에 생명을 불쌍히 보시는 하나님이 사람과 뭇생명들로 하여금 “숨을 돌리게 하고자” 하여 만드신(출 23:12) 날이 안식일이다. 모든 생명체의 목숨은 들고 나는 숨이고 숨쉼은 곧 숨을 돌리고 숨 고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3.2)
 사람의 삶은 크게 휴일이 있는 삶과 휴일이 없는 삶으로 나눌 수 있다. 세상에는 일하는 6일과 일하지 않는 제7일이 있듯이 일만 하는 사람과 쉬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 무겁고 수고스러운 일을 잠시 내려놓고 숨을 돌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숨돌릴 겨를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쉬지 못하여 숨넘어가는 목숨들이 있다. 성경의 종교에서 제7일마다 일손을 놓고 숨돌리며 사는 사람은 사람 같이 사는 사람이고 숨돌릴 겨를 없이 사는 사람은 사람같이 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쉬고 못 쉬는 것으로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차별이 생기고 있다. (24.1)
 그런데 경쟁적인 사회에서, 숨쉬고 숨돌리는 문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생명들에게 선택의 문제이기에 앞서서 능력의 문제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쉴 수가 있으나 힘이 없는 사람은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마 26:41) 쉴 수가 없다. 마음은 원이로되 돈이 없어서 쉬지 못하고 마음은 원이로되 권력이 없어서 쉬지 못하고 마음은 원이로되 시간이 없어서 쉬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라”는 안식일의 명령은 차별 없는 초청이다. 종이나 여종의 자식이나 나그네나 육축에 차별 없이, 지위나 능력에 차별 없이 하나님께서 베푸는 은혜의 초청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누구나 다 오라 하는 초청이다(마 11:28). (24.2)
 그러나 일을 쉬고 숨돌리라는 안식일 계명은 한편으로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택을 넘어선 강제이다. 초청이면서 어길 수 없는 생명의 강권이다. 안식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삶으로 나오게 하는 초청이지만 죽음에서 생명을 건져내는 하나님의 완력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강제력이다. 모든 사람에게 강요된 지상 명령이다. 왜 하나님은 쉬는 명령을 이렇듯 무섭게 하는가. 이 명령을 어긴 자들을 무섭게 처벌하시는가. 하나님의 창조하신 생명체가 쉬라는 명령을 어기고 숨을 “쉬지 않으면” 그 생명이 죽기 때문이다. 죽어서 생명의 나라를 망하게 하고 생명의 창조주를 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권이 없는 종들에게,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능력이 없는 병자와 가난한 자와 죄인들에게, 어린이와 노약자들에게 그리고 육축과 생태계에게 “쉬고” “숨돌리는” 문제를 그들의 선택 사항으로 내버려 둔다면 어찌되겠는가? 주인에게 강제적으로 “안식일의 명령”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힘 없는 사람을 쉬게 하는 일을 절대 명령으로 강요하지 않고 주인의 선택 사항으로 맡겨 버린다면 종과 같은 약한 사람들과 육축과 생태계는 결국 숨돌리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황폐하고 파멸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망하게 될 것이다. (24.3)
 축제일로서의 안식일
 안식일은 또한 성일이고 휴일이면서 축제일이다. 잔칫날이다. 잔칫날로서 제7일은 보통 날과 다른 날이다. 잔칫날은 배불리 먹고 마시고 즐겁게 노는 날이다. 하나님의 안식일 계명은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잔치를 즐기라고 엄명하는 계명이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잔치하는 삶이 하늘의 삶이라고 가르친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마 22:2). 천국은 마치 집 나갔다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를 위해 잔치를 베푼 어떤 아버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눅 15:12-32).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제사를 요구하지 않고 자비를 베푸시는 나라이기 때문이다(마 12:7). 성경의 하나님은 생명 있는 것들을 “길에서 먹을 것이 없어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는”(마 15:32)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품군에게조차 양식이 풍족한 아버지의 집”(눅 15:17) 같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는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도 수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들과 어른 남자 4천 5천 명이 먹고도 남은 음식이 일곱 광주리, 열두 광주리에 차는 나라(마 14:20)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든지 목마르면 와서 값 없이 마실 수 있는” 나라(요 7:37; 사 55:1)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요 14:2). (25.1)
 물론 “좋은” 세상은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이다. 자기가 일한 것으로 자기가 먹고 사는 세상이다. 육일 동안은 “네가 힘써 네 일을 해야 한다”(출 20:9). 그래야 여섯 날이 “좋은 날이 되고” “심히 좋은 날이 된다.” “일하기 싫어하면 먹지도 말아야 하는”(살후 3:10) 세상이 “좋고” “선한” 세상이다. 그러나 복된 세상, 거룩한 세상,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세상이 아니다. 복되고 거룩한 제칠일 같은 세상은 그러한 세상이 아니다. “목마른 자들은 누구나 와서 마시고 굶주린 자는 누구나 와서 먹는” 나라가 복되고 거룩한 제칠일의 나라이다. “돈 없는 자도 오라” 하여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 먹으라” 하는 나라가 제칠일 같은 나라이다(사 55:1).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복이 있다” 하는 나라가 안식일의 나라이다(마 5:6). 네가 힘써 네 일을 해야 하는 “좋은” 여섯 날에 일하지 못하여 굶주리게 되고 목마르게 되고 헐벗게 된 무능한 자와 무력한 자와 병자들과 노인들과 어린이와 나그네와 죄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아(마 5:7) 배부르고 즐겁게 되는 세상이 안식일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나라이다. 성경의 백성들은 “세상 끝 날까지”(마 28:20)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분부한”(마 28:20) 이 잔칫날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마 28:20) 천국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증거하여야 한다(마 24:14). (26.1)
 어찌하여 하필이면 제칠일이어야 하는가
 성경의 십계명은 사람에게 “힘써 네 일을 행하는” 보통 날과 “네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고른 숨만 쉬며 예배하고 기념하고 기쁘게 노는 성일과 휴일과 잔칫날 같은 특별한 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의 뜻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의문의 하나는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왜 그 특별한 날이 제칠일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왜 성경의 하나님은 성일과 휴일과 잔칫날을 사람과 생명들에게 베푸시는 것만으로는 자신과 하나님 나라를 충분히 차별화하였다고 생각하지 못하는가. 왜 그 특별한 날이 제칠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을 특별한 하나님으로 나타내려 하시는가. 왜 하나님의 종교는 제칠일로 말미암아 차별이 되어야 하는가. 제칠일의 차이가 그렇게 중요한 차이인가. (27.1)
 그렇다. 제칠일의 차별성이 하나님의 차별성이고 하나님 나라의 차별성이고 하나님의 백성의 차별성이다. 하나님에 의하여 안식일의 차별성이 드러나고 안식일에 의하여 하나님의 차별성이 드러난다. 안식일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의 차별성이 드러난다. 안식일의 종교가 하나님의 종교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다른 날이 아니고 제칠일이 하나님에게 특별한 날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특별한 날이 되었는가. 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일은 “모든 날과 같은” 날이 아니어야 하는가.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기본법의 하나로 제칠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규정하고 있는가. 왜 우리들에게 “제칠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 하였는가. (27.2)
 우리는 그 대답을 넷째 계명, 곧 안식일 계명 자체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계명은 단순히 “제7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만 명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7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 특정한 제7일이 하나님과 그 백성에게 특별한 날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고 하였다.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것이다(출 20:11).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제칠일이 특별한 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다. (28.1)
 왜 다른 윤리 전통이나 종교 전통의 기본법에는 제칠일에 대한 계명이 없는 것일까. 왜 다른 종교 전통에는 제칠일에 대한 지식이 없는가. 오직 유독, 기독교의 성경에만 제칠일의 계명이 이렇듯 중요한 계명으로 강조된 것일까. 어찌하여 유독 기독교의 성경에만 제칠일의 지식이 보존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간직된 창조의 신앙 때문이다. 안식일 계명은 창조주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창조의 진실을 모르고 창조의 하나님을 모르고 창조의 신앙을 모르는 종교와 윤리의 전통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그들의 무지와 불신 때문에 제칠일의 계명을 알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창조와 창조주에 대한 그들의 몽매한 상태 때문에 제칠일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고 중요하게 여길 수도 없었고 가르칠 수도 없었던 것이다. (28.2)
 제칠일의 계명은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와 관련하여 창조주로서의 자신의 신분과 속성을 밝히는 계명이며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리들의 신분과 속성을 밝히는 계명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믿음과 소망의 주인이시다. 우리는 그의 낳고 기르는 백성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다. 사랑과 소망과 믿음의 또 다른 주체이다. (28.3)
 그러나 제칠일 안식일은 세계의 창조에만 특별히 관련된 날이 아니라 세계의 구원에도 특별히 관련된 날이다. 창조의 기억뿐만 아니라 재창조의 기억을 간직한 날이다. 자기의 백성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이다.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셨던 것이다(신 5:15). 제칠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할 이유가 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사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우리들이)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고”(롬 3:25)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여”(롬 3:26) “우리 주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하셨기 때문에(롬 5:1) “안식일을 지키라” 하셨던 것이다. (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