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날들은 모두 똑같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보통 날이다(창 1:5). 그러나 이 날들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하여 모두 똑같은 날이 된 것은 아니다. 이 날들은 모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평등한 날이면서도 앞서고 뒤서는 선후의 차이로 다른 날들이 되었다. 이 날들은 첫째 날과 둘째 날로 다르고 셋째 날과 넷째 날로 달랐다. 뿐만 아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다섯 날들은 선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똑같이 “좋은” 날이고 “선한” 날이지만(창 1:4, 10, 12, 18, 21, 25) 사람이 창조된 여섯째 날은 다섯 날과 똑같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공통성을 갖고 있고 그 날들과 다른 그밖의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 날에 사람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심히 좋은” 날이 되었다. “심히 선한” 날이 되었다(창 1:31). 날들은 물리적인 조건에 의해서 보다도 그 날에 일어난 사건 곧 그 역사성에 의하여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에게 3월 1일이 3월 2일과 다르게 되는 이치와 똑같다. (14.1)
 그런데 일곱째 날, 곧 제7일은 다른 날들과 똑같이 저녁과 아침으로 하루가 된 날이었지만 좋은 날들과 다른 날이었고 심히 좋은 날과도 다른 “거룩한” 날이 되었다. “복 있는” 날이 되었다(창 2:3). 앞서의 여섯 날과는 너무나 다른 날이 된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보통 날과 같은 차원의 날이 아니다. 다른 여섯 날과는 너무나 차이가 크게 나는 큰 날이다. 그 날의 차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차이도 아니고 한 날에는 동물이 창조되고 다른 한 날에는 사람이 창조되는 식의 차이도 아니었다. 수평적 차이가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차이였다. (14.2)
 그래서 창세기 기자는 제칠일 안식일의 차별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앞의 여섯 날에 대하여 사용했던 똑같은 방식으로 제칠일을 묘사하지 않았다. 앞의 여섯 날에 대하여 사용했던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란 표현을 제칠일에 대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표현은 보통 날들에나 사용하는 것이다. 일곱째 날에게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왕위를 계승하는 왕자에게 보통 소년의 옷을 입히는 것처럼 부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날에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제7일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날이 아니어서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다. 제칠일의 정신적 특성이 앞서의 6일들과는 너무나 차이가 크고 그 차원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6일들을 묘사할 때 사용하던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제7일은 물리적으로도 6일들과는 차원이 다른 날인 듯이 말하고 싶다는 심정을 나타낸 것이었다. 마치 안식일은 저녁이 없는 날 같은 날이고 일하는 아침이 없이 휴식만 있는 저녁의 날 같은 날이라는 것이다. (14.3)
 이처럼 성경의 사람들에게 모든 날들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날이라고 해서 다 같은 날이 아니다. 앞에 오는 날이 있고 뒤따르는 날이 있다는 것이다. 질서 속의 날들이라는 것이다. 모래 같이 흩어진 현상으로서의 날들이 아니라 상호 관련 속의 실재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날들은 외견상으로는 똑같으면서도 그 역사적 성격 때문에 “좋은” 날들과 “심히 좋은” 날로 구별되기도 하고, “거룩하고 복 받은” 날로 구별되기도 한다. 그리고 일하는 날과 쉬는 날로 구별된다. 보통 날들과 특별한 날로 구별된다. (15.1)
 안식일 계명은 명령하기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 .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9, 10)고 했다. 6일은 일하는 보통 날이고 제7일은 일하지 않는 특별한 날이다. 일하지 않고 쉬는 복되고 거룩한 날이다. (15.2)
 이처럼 성경은 전체적으로 인간에게 시간과 날들이 인간에게 얼마나 의미심장한 삶의 토대이고 대상인지를 가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의 차별적인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다. 보통 날인가 특별한 날인가를 식별하고 하지 못함에 따라 삶의 모양과 성격이 달라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16.1)
 사람의 생활에 있어서 보통성과 특별성의 문제는 시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만물은 어느 면에서는 다 같다. 사람과 모든 것들의 사이를 규정하는 하나의 윤리는 보통성이다. 평등성이다. 보편성이다. 그래서 평등 사상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평등 사상에서 보면 차별은 잘못이다. 그러나 세상의 만물은 어떤 면에서 다 같은 것이 아니다. 공간과 사물들도 근본적으로 대등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각 사람에게 특별한 공간과 사물이 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평등하지만 동시에 평등하지 않다. 사람에게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평등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취급하면 그것이 상대방에게 모욕이 되고 잘못이 되는 관계가 있다. 자기 부모를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접하면 불효가 되며 부부 사이가 남들과의 관계와 다름이 없다면 잘못된 관계이다. 그래서 사람과 만물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원리는 특별성이다. 차별성이다. 특수성이다. 개체성이다. (16.2)
 이리하여 사람에게는 보통의 시간과 보통의 사물과 보통의 관계가 필요한 것처럼, 특별한 사람, 특별한 사물, 특별한 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사람, 특별한 공간, 특별한 사물, 특별한 관계가 없다면 그 사람에게 그것은 중요한 결핍이 될 수 있고 그 때문에 그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그 때문에 그는 불행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에게는 부모가 있느냐 남편과 아내가 있느냐 자식이 있느냐 형제가 있느냐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을 당신은 좋은 삶을 누리고 있느냐, 특별한 삶을 누리고 있느냐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당신에게 하나님이 있느냐 스승이 있느냐 가치관이 있느냐 하는 질문은 당신에게 정신적 차원의 삶이 있느냐 하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16.3)
 그리고 우리는 똑같은 방식으로 날들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다. 그대에게는 성일이 있는가, 그대에게는 휴일이 있는가, 그대에게는 축제일이 있는가. 그대에게 특별한 날이 있는가. 만약에 우리가 그런 질문을 받고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상실감과 빈곤감을 느끼게 된다. 내게 집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특별한 날이 없는 빈곤감에 고통을 느끼게 된다. 오히려 요한복음 4장에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날이 없음은 우리에게 특별한 공간이나 사물의 없음보다 더 큰 결핍으로 제시되고 있다. 성일의 결핍은 성소의 결핍보다 더 중요한 뜻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진정한 신앙인에게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등 예배할 곳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요 4:21-24). (17.1)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우리는 위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사도 바울의 권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롬 14:5)는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모든 날은 똑같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평등한 날이기도 하지만 각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낫기도 하고 저 날이 이 날보다 더 못하기도 하다. 모든 날을 평등한 날로 보는 입장에도 이유와 명분이 있고 한 날을 다른 날들보다 더 낫고 더 특별한 날로 보는 입장에도 이유와 명분이 있다. 모든 날을 평등하게 보는 것도, 그리고 이 날을 저 날보다 더 낫게 보는 것도 모두 “자기 마음에서 확정할” 일이다(롬 14:5). 모두 개인의 도덕적 신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17.2)
 그러면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도덕적 신념은 어떤 것인가. 모든 공간을 똑같이 여기고 모든 사람을 똑같게 보는 평등주의의 신념일 것이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다는 신념, 날이면 다 같은 날이지 날 위에 날이 있느냐란 신념, 곧 평등과 보편의 신념일 것이다. 때문에 사도 바울의 생각처럼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개인의 신념은 존중되어야 한다. 프랑스 혁명의 평등 이상처럼 이러한 정신은 사람들에게서 존중받아야 한다. 그리고 실지로 모든 날은 대등한 날이고 평등한 날이다. 어느 날은 차별을 당하고 무시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8.1)
 그렇다면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도덕적 신념은 어떤 것일까. 제칠일을 다른 여섯 날보다 다르게 보는 신념은 어떤 것일까? 모든 공간과 모든 사물을 똑같이 여겨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차별의 신념일 것이다. 평등이 도덕적인 신념이지만 차별도 도덕적인 신념이다. 내 물건과 네 물건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도덕적이 아니다.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않는 태도는 못된 태도이다. 같은 이유에서 노약자를 보통 사람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도덕적인 태도가 아니다. 배고픈 사람의 처지와 배부른 사람의 처지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부도덕적이다. 남의 집 여자와 자기의 아내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부도덕한 것이다. 아버지의 공간과 자기의 공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큰 산과 작은 산, 큰 강과 작은 강을 똑같이 같다 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18.2)
 그래서 만물은 같으면서 다르다. “같다”고 강조되어야 할 국면이 있고 “다르다” 해야 할 경우가 있다. 날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혁명이 사람은 모두 같다 했을 때 우리에게는 부모도 없고 어른도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를 특별하게 여겨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누구는 우리와 같이 배도 고프지 않고 사랑과 미움의 감정도 없고 우리처럼 죄와 의에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19.1)
 바울 사도는 만물을 보통성과 특별성, 평등성과 차별성의 두 원리에서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이 의도했던 말은 이러했을 것이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을 이해하겠다,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날들이 어떻게 다 같은 날이 되겠는가, 그리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모든 날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지 뭐 다른 것이 있겠느냐 . . . ”“날들이 같다” 하든지 “날들이 다르다” 하는 이야기는 날들의 물리적 조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날들의 가치에 대한 문제인 만큼 이것은 사람의 도덕적 가치관에 연관된 문제라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그 날이 “누구에게” 어떠한 날이냐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사람들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신념과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신념으로 나뉘어 질 수 있지만 동시에 동일한 사람이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신념과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신념에 다같이 동참할 수 있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다는 민주사회의 평등주의와 노약자와 일반인을 구별하고 부모와 자식을 구별하는 분별심이 꼭 서로 충돌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윤리나 사유 재산을 존중하는 정신이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다같이 존중하자고 하는 민주사회의 평등 사상과 꼭 충돌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9.2)
 그렇다면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떤 날인가. 우리 각 사람에게 부모님의 생신일이 있고 그 날이 각 사람에게 존중되어야 하듯이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저 날보다 낫게 여겨야 할 날인가, 아니면 모든 날과 같이 똑같게 여겨야 할 날인가. 아니면 저 날보다 낫게 여겨도 무방하고 똑같이 취급해도 무방한 날인가.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안식일의 문제도 결국 안식일이 “누구에게 어떤 날인가” 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3월 1일이 한국 사람에게 어떤 날이고 8월 15일이 한국 사람에게 어떤 날이냐 하는 것처럼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떤 날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의 문제 곧 그들의 도덕적 신념의 문제가 될 것이다. 3월 1일이 한국 사람에게는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미국 사람에게는 모든 날과 똑같은 날인 것처럼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특별한 날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모든 날과 똑같은 날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20.1)
 자신에게는 분명히 저 날보다 이 날이 더 중요한 날인데도 불구하고 이 날을 모든 날과 같이 여긴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태도일 것이다. 자신에게 이 사람은 분명히 저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과 같게 취급한다면 틀림없이 잘못된 태도일 것이다. 그 사람은 나의 그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크게 모욕을 느낄 것이다. (20.2)
 그러나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크게 보아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의 한 분”이고 나의 아내도 다른 여자들과 같은 “여자의 한 사람”이다. 그가 다른 것은 수많은 같은 요소 가운데의 다름일 뿐이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모든 날의 공통적 특성을 안식일도 가지고 있다. 안식일은 그러한 보통 날들의 하나이면서 다른 보통 날과 다른 것이다. 그 안에 평등성과 특수성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식일 신앙인도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정신과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정신”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20.3)
 성일로서의 안식일
 왜 내게 성일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인가. 왜 성일 있는 삶이 성일 없는 삶보다 더 좋은 삶인가. 왜 성경은 성일과 성소와 성도를 강조하여 가르치는가. 하나님 자신이 창조의 목표를 거룩에 두고, 삶의 목표를 거룩에 두고, 역사의 목표를 거룩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차별적 본성이 거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거룩을 최고의 목적으로 추구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거룩과 연관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자기“됨”의 어떤 충족감을 갖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창세기의 날들은 “좋은” 날들에서 “심히 좋은” 날로 그리고 다시 “복되고 거룩한” 날로 행진하고 있고 사람은 “좋은” 사람에서 “심히 좋은” 사람으로 그리고 다시 “복되고 거룩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 거룩한 날이 복된 날인 것이다. 거룩한 사람이 복된 사람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거룩한 나라가 하늘나라이고 거룩한 삶이 구원받은 삶이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곧 행복한 삶을 살고 구원받은 삶을 사는 것이다.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