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경축일들과 제칠일 안식일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경축일들과 성일들과 휴일들이 있다. 나라 차원에서 경축하는 날도 있고 단체나 가족 차원에서 기념하는 날들이 있고 각종 종교적인 성일들이 있다. 휴일 중에도 공휴일이 있고 설날, 추석, 올림픽, 월드컵, 학교 운동회 같은 축제일들과 일요일 같은 회사나 개인이 임의로 일을 하지 않는 사적인 휴무 일이 있다. 제칠일 안식일은 이러한 날들 중에 어떤 날들과 같은 날일까. 제칠일 안식일은 대체로 앞에서 언급한 여러 날들의 여러 가지 성격과 기능들을 한 몸에 지닌 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안식일은 경축일이고 성일이며 휴일이고 잔칫날이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각종 기념일들이나 휴일들은 그 날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기능에 따라 잔칫날, 성일, 휴일 등으로 그 성격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 날들을 제정한 입법의 주체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지기도 한다. 한 개인이나 씨족이나 사회 단체가 제정한 날이 있는가 하면 종교의 이름으로 제정한 날도 있다. 종교적인 성일이라 할지라도 교주나 종교회의가 제정한 날이 있고 신이 직접 제정한 성일이 있다. 국가가 제정했다면 국법이 되겠고 신이 제정했으면 신법이 되겠다. 성경에서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넷째 계명에 의하여 경축일로, 예배일로, 휴일로, 잔칫날로 정한 날이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제정한(막 2:27) 신법의 날이다. (7.1)
 성경 종교의 다른 점과 안식일의 계명
 제칠일 안식일의 계명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마 11:28) 생명들에게 제7일에 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출 20:10). 성경 같은 옛 시대의 경전이 특정한 날을 구별하여 그 날에 모든 힘들게 살아가는 생명체들로 하여금 쉬어 “숨을 돌리게 하라”(출 23:12)는 명령을 10조항으로 된 기본법의 하나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은 이 계명에 나타난 생명 존중의 정신에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십계명의 차별성은 모든 숨쉬는 것들에게 “숨돌림”을 보장한 안식일 계명에 있다고 하겠다. 동서 고금의 윤리적인 전통들은 생명의 게으름을 경계한 나머지 생명들을 노역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휴일도 없이 밤도 없이 쉬지 말고 일하라고만 몰아세운다. 이교의 가르침들은 사람과 육축들이 잠간 쉬어 숨이라도 돌릴까 걱정하는 가르침이다. 지치고 병든 사람들이 쉬어 병을 “고칠까 엿보는”(막 3:2) 가르침이다. 삼강 오륜에 “쉬라”는 계명이 없다. 이교의 가르침들은 애굽 왕 “바로”처럼 언제나 “어찌하여 백성으로 노역을 쉬게 하느냐. 썩 물러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열심히 하여라”(출 5:4) 하고 소리를 질러 왔다. 자강불식(自强不息) 하라고 다그쳐 왔다. (8.1)
 그런데 성경의 넷째 계명은 심지어 육축에게까지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는 한 날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 때문에 성경의 종교는 유교와 다르고 불교와 다르고 다른 윤리 체계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의 종교는 그 어떤 종교보다도 생명의 “숨돌림”을 위하여 애쓰는 종교이다. “상한 갈대”“꺼져가는 심지”(사 42:3; 마 12:20)를 위하여 애쓰는 종교이다. 이 종교의 대표적인 계명이 안식일 계명이다. 목자 같은 하나님의 계명이 안식일 계명이다. (8.2)
 어찌하여 성경의 하나님은 이처럼 쉼을 강조하시는가? 어찌하여 성경의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쉬는 일을 강조하여 제칠일에 쉬지 않거나 쉬지 못하게 하는 자들을 극형으로 다스리시겠다고 하시는가? 안식일의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생명을 낳고 기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산 자의 하나님이시고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마 22:32). 하나님이 참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은 그가 낳은 생명들이 기진하여 죽을까 하는 것이다. 먹지 못해, 마시지 못해, 쉬지 못해 인생 “길에서 기진할까”(마 15:32) 염려하시는 하나님이 안식일의 하나님이다. 인생 길에서 목말라 기진할까 하여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하시는 하나님이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 23:12) 하시는 안식일의 하나님이시다. (9.1)
 안식일의 계명은 일을 강조한다. 6일 동안에 “힘써 네 일을 행하라”고 한다. 6일의 끝에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안식일 계명의 일은 창조와 생명의 일이다. 살자는 것이요 살리자는 것이다. 풍성히 살고 풍성히 살리자는 일이다. 더 높고 더 풍성한 삶을 위한 일이다. 따라서 안식일 계명에서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도 결국 살자고 하는 것이다. 공부도 중요하고 재산도 중요하고 책임도 중요하지만 모두가 생명이 있고 나서의 문제이다. 그래서 안식일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쉬면서 일하고, 숨돌리면서 일하라, 먹으면서 일하라, 마시면서 일하라, 자신의 생명을 돌보면서 일하고 일하는 것들의 생명을 돌보면서 일을 시키라는 것이다. (9.2)
 그런데 왜 성경은 하필이면 특정한 날인 제칠일에 관련하여 쉼을 강조하고 있는가. 안식일 신앙의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는 마땅히 이 점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10.1)
 십계명은 작은 돌비에 기록된 것이다. 성경 종교의 기본 계명을 돌비에 적어 놓았다. 성경을 모르는 전통에 속한 사람들은 작은 돌비에 기록된 10계명에 쉬고 예배드려야 하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는 사실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들은 십계명의 하나로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라는 명령을 예상했다가 예상외로 “일을 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10.2)
 뿐만 아니라 일을 하지 말고 쉬는 날이 특별히 제7일이어야 한다고 정해진 사실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넘어 혼란을 느낄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모든 날이 같은 날이고 인간에게 쉼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어느 특정한 날에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항상 쉼 없음에 부대끼며 있지 않은가. 또 쉼의 필요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닌가. 어찌하여 사람들이 쉼을 누림에 있어서 7일 중 하루가 아니라 꼭 제칠일이어야 하는가. (10.3)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특정한 날에 쉬라는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처럼 간단히 한 문장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자그마치 그 돌비의 3분의 1의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별도의 율법책에서 제칠일이란 이 특정한 날에 쉬고 쉬지 않음에 대한 보상과 처벌이 너무도 엄격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식일 계명의 순종에 대한 축복과 그 불순종에 대한 처벌이 매우 크고 무겁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10.4)
 다른 전통에서도 특정 기념일이나 공휴일이나 경축일들이 법으로 정해지고 있지만 대부분 연례적인 기념일이고 일요일 같은 공휴일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부리는 사용주들에게는 관련법규의 강제적 구속력이 강력하게 작용하지만 일반 시민이나 피고용인이 그 특정한 날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법적 구속력이 엄격한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나 도덕 전통에서도 예배하고 쉬고 즐기는 특정한 날들이 제정되어 있으나 그 날이 기본적인 계명으로 규정되는 일은 거의 없다.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치는 도덕적 차원에서 7일마다 제칠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도록” 요구하는 일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10.5)
 그런데 성경에서는 다르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는 도덕적인 교훈과 같은 차원에서 매주마다 제칠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 계명을 불순종하는 사람은 십계명의 다른 계명을 범하는 경우와 같은 차원이거나 그 이상의 차원에서 징계를 받게 되어 있다. (11.1)
 왜 안식일의 하나님과 안식일의 종교는 특정한 날에 대하여 이토록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일하라는 교훈이 더 중요하지 쉬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가, 비가 오면 쉴 수밖에 없고 날이 어두우면 쉴 수밖에 없고 일이 없으면 쉴 수밖에 없는 것인데 왜 이토록 정규적인 휴식을 강조하는 것일까. 그리고 날짜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한가, 쉬면 그만이지 왜 쉬는 날자가 문제인가. 특정한 날짜에 대한 관심에 따라서 사람의 성격과 운명이 달라지는가. 일요일에 쉬면 사람의 성격이 나빠지고 토요일에 쉬면 사람의 성격이 좋아진다는 말인가. 쉬는 날짜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는가. 도대체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일하라고 독촉하는 대신에 사람들에게 쉬어가면서 살라고 안달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며 특정한 날의 쉼에 대하여 까다로운 안식일의 종교는 어떤 종교일까. (11.2)
 날짜를 가르치고 있는 창세기 1장
 그러나 우리는 그 보다 먼저 성경의 종교와 성경의 하나님이 쉼과 관련하여 제칠일 안식일 곧 특정한 날짜를 대단히 중요시한다는 사실에 앞서 날 자체, 시간 자체, 그리고 날짜 자체에 대한 특별한 관심에서 다른 신들에 대하여 자신을 차별화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해야 한다. (12.1)
 성경은 무엇보다도 날을 중요시하고 있다. 날을 중요시하고 날짜를 중요시하고 있는 점에 있어서 성경의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생존의 조건은 시간과 공간이다. 공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간 자신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았던 때가 없다. 공간과 물질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오히려 지나칠 정도이다. 공간과 물질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소유욕과 지배욕으로 표현되어 왔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는 오히려 이 지나친 소유욕과 지배욕을 문제로 삼기까지 되었다. (12.2)
 그러나 시간에 대해서는 사정이 달랐다. 사람의 눈에 시간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물질과 공간에 눈이 멀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시간의 심각성을 소홀히 여긴다. 사람들은 삶의 문제의 전부가 물질과 공간으로 해결되는 줄로 알기 쉽다. 그리하여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놓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 하면”(눅 12:19, 20)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오늘밤으로” 자기의 생명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그렇게 욕심을 부려 모았던 공간과 물질이 생명에게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로소 공간과 물질이 사람의 생명의 전부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성경은 이 사실을 깨우치고 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것이다”(히 11:1). 시간 같이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은 세계가 실재인 것이다. 보아도 모르겠고 들어도 모를 것 같은(사 6:9) 세계가 참 세계인 것이다. 보이는 색계(色界)는 눈에만 그렇게 보이고 귀에만 그렇게 들릴 뿐이고 실지로는 안개 같고 구름 같은 도깨비 같은 헛것들의 세계인 것이다. (12.3)
 성경이 사람들에게 날과 날짜의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 1장에서부터 잘 나타나고 있다. 성경 창세기 1장은 날들을 셈하는 것으로 채우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다,” 둘째 날이다, 셋째 날이다 하고 가르치고 있다. 날들의 선후를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의 기초나 되는 듯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날들의 셈법”을 가르치고 있다. “날 계수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모세처럼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분노의 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두려워하지 못하는 까닭이(시 90:11) 모두 우리가 날짜를 제대로 셈하지 못하고 우리의 날들을 제대로 계수하지 못함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지혜의 출발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었다면 성경의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자기를 아는 지식은 곧 자기의 나이를 계수하는 지식이었다는 것이다. 델포이의 신이 소크라테스에게 “네 자신은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창세기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 몇 살이냐”라고 묻고 있다. 나이 값을 해야 한다는 자각이 “지혜의 마음을 얻는” 출발이라는 것이다. (13.1)
 보통 날과 특별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