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22. 야훼 치드케누—우리의 의(義) 여호와 (성품 건설자)
 야훼 치드케누(Yahweh ṣidqenu)라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계시하신 가장 감격적인 진리가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뜻이다(렘 23:6; 33:16). 주께서 이 이름을 당신의 백성에게 소개한 것은 유다 왕국 말년,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전이 불타고 백성은 분산되고 그들의 반역과 죄 값으로 바벨론에 잡혀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이 때 주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자기만 생각하고 양 떼를 돌보지 않은 목자들을 질책하셨다. 그들은 양들에게 하나님을 구속자로 바라보게 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신을 충심으로 따르는 자들에게 당신께서 그들을 친히 돌보실 것과 장차 그들을 돌볼 목자를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다. (320.1)
 충성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원수의 계책에 완전히 맡겨 버리지 않으실 것을 믿고 용기를 얻었다. 한편 예레미야는 그보다 더 나아가 메시야에 초점을 둔 수 백년 걸려 성취될 놀라운 계시를 받았다. 그는 그 계시에서 메시야가 지상에 공의를 세우고 쫓겨났던 당신의 백성을 모아 안정시킬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기별의 핵심은 “야훼 는 우리의 의”라는 사상이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사상이기 때문에 중요한 신학적 지계표가 되었으며 인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그 위치를 굳게 지키게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자기들이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과 언약의 백성으로 새 생활을 시작한 날을 출애굽에 초점을 두어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부터 그들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 그들의 개인적 출애굽의 시발점을 그들이 야훼 치드케누 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를 자기들의 의의 근원으로 경배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따지게 된 것이다(렘 23:5-8). 여호와는 그들의 출로(出路)였다. (320.2)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심이 이처럼 강력하게 표출된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 이전 수백 년 동안 백성이 하나님께 대해 나타냈던 적개심을 고려할 때 놀랍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들의 조상들은 한 세기 또 한 세기 하늘의 기별을 등지고 저희 마음대로 살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자손들이 조상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든 모독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는 오래 참으시며 그들을 반역의 길에서 돌이키려고 호소하셨다. 그러나 자비를 거듭 배척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비가 더 이상 다시 베풀어지지 않는 날이 오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계시를 보았을 때는 보응의 태풍이 배도한 민족의 무방비한 머리들 위에 몰아치기 시작했을 때였다. 벌써 일부 사람들은 포로되어 갔고, 잔류자들은 바벨론 사람들의 압제를 받으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321.1)
 야훼 치드케누 로 오실 메시야의 약속
 그러나 이런 상황 아래서도 하나님은 목이 곧은 당신의 백성을 절망 속에 방치해 두지 않으셨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분노와 고집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눈을 돌려 메시야의 약속을 보게 하시고, 목자요 재판장이요 의의 공급자인 그가 오시면 그들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 줄 것을 알리려고 힘쓰셨다.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받았을 때는 북방의 열 지파는 이미 포로로 잡혀간 지 백여 년 후였고, 유다는 최후의 멸망을 한 십여 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선량하나 때로는 어리석었든 요시야 왕은 바로느고의 이름 없는 궁수(弓手)의 손에 죽었고, 그의 무익한 아들 여호야하스는 바벨론의 꼭두각시로 있다가 석 달만에 폐위되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여호야김이 왕위를 이었으나 그도 이방 통치자에게 반역을 꾀하다가 바벨론으로 잡혀감으로 끝나고 말았다. (321.2)
 그래서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의 윤허를 얻어 유다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원래 맛다니야 (왕하 24:17)로 “여호와의 선물”이란 뜻이었으나 오만한 바벨론 왕은 마치 이스라엘이 섬겨야 할 분이 누구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 즉 “여호와의 의”로 개명해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당신의 백성이 세상의 폭군이 강제로 명명한 의를 능가하는 메시야 임금의 선물인 의를 바라보게 하셨다. 그래도 백성은 또다시 그에게 등을 돌렸고(렘 32:33), 지도자들은 이방의 풍습을 쫓기에 정신이 없었다(겔 8:1 상단). 하나님의 심판은 점점 더 무섭게 그들 주변에 내리고 선지자의 경고는 화급을 다투어 전해졌지만 유다국의 상황은 가속적으로 내리막길을 가다가 드디어는 “구제 불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대하 36:16). 그들의 상태를 진단한 하늘 의원의 결론은 “치유 불능”이었다(렘 14:19). (322.1)
 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부르심이 주어진 시간적 요인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또 다른 진실의 일면을 보여준다. 비록 그의 백성은 한심스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생활 여건 속에 허덕일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관심은 오히려 그들의 영적 측면에 있었다. 이 기별을 통해 그는 그들의 생각과 정력을 덧없는 세상살이를 벗어나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에 쏟도록 만들기를 원하셨다. 고생과 죽음, 집 없고 양식 없는 슬픔은 사람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절망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결별은 영원한 소망의 상실을 의미한다. (322.2)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시대적 사조나 정서는 잠시 왔다가 영원히 사라지는 것임을 선지자는 강조했다. 그러나 하늘의 가치 체제는 영구 불변이라고 그는 가르쳤다. 예레미야는 또 말하기를 나라는 버림을 받아도 각 개인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배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 족보나 전통적 세력을 의지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단순히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 아니고, 거듭 남을 통해 되는 것이었다. 메시야는 성령의 역사로 당신을 위한 새 백성을 만드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그는 당신의 의를 허락하시기로 약속하셨다. 비록 그들은 받을 자격이 없었고 그들이 원할 때, 그들은 그 의를 구주로부터 선물 받아 의로운 생활이 가능해진다. (323.1)
 야훼 치드케누 이신 하나님의 특성은 예수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드러났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가 되셨다”(고전 1:30)고 바울은 확언했다. 그는 로마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telos, 텔로스, ‘끝, 궁극적 목표, 목적’)이 되시니라”(롬 10:4)고 말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과 의의 밀접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없다면 참된 의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다. 의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정리된 질적인 생활과(시 119:172),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것과 같은 특성들을 함유한다. (323.2)
 히브리어 체덱(ṣeḏeq)은 그와 유관한 동사와 마찬가지로 곧고 정직함을 말한다. 이것은 “직각”을 의미하는 라틴어 렉투스(rectus)와 동일한 뜻이며, 이 말에서 rectitude (“정직, 청렴, [판단의] 정확, 곧음”)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다. 이 말은 또한 벽돌공이 벽돌을 곧게 쌓기 위해 사용하는 먹줄을 말한다. 그러므로 의는 하나님의 잣대에 따라, 즉 그가 그으신 직선에 따라 곧고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경은 체덱 이란 이 히브리어를 동격의 다른 말로 해설해 주는 경우가 있고, 특히 번역 성경의 경우는 “의” 대신 다른 말을 사용한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323.3)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을 고하느니라”(사 45:19). 그러므로 의는 정직(사 45:19), 곧고 정직한 길(시 23:3), 옳은 것(욥 36:3), 상거래에 쓰는 공정한 저울(레 19:36), 율법의 요구에 맞는 합당한 제물(신 33:19), 공정한 재판장(시 35:24, 28), 공의(시 89:14; 97:2), 순결, 흠없음(시 37:6), 구원(사 45:8; 51:5; 시 132:9, 16)의 뜻을 가진 말이다. (324.1)
 의의 양면성, 그 안팎
 의는 인간과 하나님, 인간 상호간, 그리고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의무에 적용된다(레 19:35, 36). 공의란 흔히 증거를 정확한 저울에 다는 것에 비유되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공정하게 취급해 주시기를 호소했다(욥 33:26). 체덱(ṣedeq)은 정직한 평가와 판단을 암시한다(시 4:5). 이 말은 통치자가 공의를 베풀고 억압받는 자들의 탄원을 들어주며 각 사람이 받을 상과 벌을 내리는 것에 사용되었다(신 16:18-20). 그는 판결을 내림에 있어 어떠한 왜곡이나 남용이 있어서도 안 된다(사 5:23). 여호와께서는 그런 의로운 사람을 찾고 계신다(사 5:7). (324.2)
 의는 그러므로 율법이나 곧은 논리가 전혀 흠잡을 수 없는 성품이다. 가장 높은 하늘의 표준으로 따져도 거기엔 추호의 착오나 오점이 있을 수 없다(에 9:13; 느 9:8; 시 7:9, 11; 112:4; 119:137). 의는 하나님의 의로운 행적에 나타나는 그의 성품의 질이다(삿 5:11; 삼상 12:7). 재판장이신 그의 판결은 의롭다(시 19:9; 119:138; 딤후 4:8; 계 16:7). 예수는 그의 대제사장 기도에서 아버지를 “의로우신” 분으로 부르셨다(요 17:25).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회개하는 죄인을 대표하는 의로운 대언자로 나타내신다(요일 2:1). (324.3)
 이런 성품과 대조적으로 전 인간 가족은 예외 없이 어떤 의로움도 가진 것이 없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그의 짧은 문장에 요약했다.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도다”(롬 3:10). 이 구절은 복음이 없이는 인류에게 어떠한 희망도 있을 수 없음을 지적하는 일련의 성구 중의 하나이다. 인간은 자기가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의를 자신의 힘으로는 얻을 길이 없다. 인류는 죄를 범했으므로 하나님의 이상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다른 주인을 섬기고 어김없이 그로부터 사망을 그 삯으로 받고 있다(롬 6:17, 23). 그러면 인류는 어찌될 것인가? (324.4)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복음의 기별
 인간은 여하한 개인적 노력을 통해서도 그가 가졌던 원래의 무죄한 상태를 회복할 수 없음을 복음은 강조한다. 그리스도 당시에 가장 결사적이고 엄격한 생활을 한 사람들은 바리새인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높은 표준을 설정하고 굳은 결심과 엄격한 생활로 자기를 다스렸다. 그들은 의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생활을 규범으로 다스리며 피나는 노력을 쏟았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그들도 그들처럼 멸망할 것이라 하셨다(마 5:20). 이것은 모든 시대의 제자들을 위해 주신 말씀이다. (325.1)
 죄인은 어떠한 인간적 노력과 “공로”로도 의인이 될 수 없다. 그는 오직 외적(外的) 근원인 구주로부터만 참된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말하는 사도 바울의 지적을 일일이 검토해 볼 때 우리는 그의 주장의 절정을 로마서 3:10-11에서 발견한다: “의인은 없도다. 없도다. 하나도 없도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글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출발점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믿지 않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려 하심이라”(롬 11:3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를 받을 기회가 올 때, 받고 안 받는 것은 각 사람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다. (325.2)
 사람이 하나님의 이상(理想) 수준으로 자기를 높일 힘이 없음을 인정하고 자기의 무력함과 속절없음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져야 한다. 바로 그 시점에서 구원의 기별이 가진 효능이 그 모든 영광과 함께 나타난다. 복음이란 죄인이 하나님의 의도를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롬 3:25), 죄의 채무를 갚아 주고(마 18:23-35), 받을 처벌이 해결되고(히 9:28), 율법의 저주 아래서 해방되었음(요 5:24; 롬 8:1)을 알리는 하늘의 선언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값없이 은혜의 힘을 제공하는 것이다(롬 1:16). 은혜의 힘은 회개하고 용서받은 죄인으로 하여금 매순간 자기의 주요 모범이신(갈 2:19, 20) 그리스도의 의로 살게 하는 하나님의 힘이다. 이처럼 복음은 구주를 의롭고 공의로운 분으로 나타낸다. 그는 야훼 치드케누 이시다. (3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