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5 장 바울과 율법 제 2 부 바울의 율법에 대한 견해
 (4) 율법은 죄의 본질을 드러낸다
 율법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계시로서, 죄의 본질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임을 드러낸다. 바울은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다”(롬 3:20)고 설명하고 있는바, 그 이유는 율법이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깨닫고 그들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지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율법의 이토록 중요한 기능이, 사람의 생애에서 죄를 인정해야할 필요성이 과거의 옛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생애에서도 기본이 된 이 후, 그리스도에 의해서 종결되어질 수 없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115.6)
 율법은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행위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도덕적인 원칙들에 반대되는지를 보여주므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 율법이 죄를 더하므로 분명한 계명들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도록 만든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 참조, 갈 3:19)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명확한 계명들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도록 만들므로, 율법이 범죄에 대한 인식을 증가시킨다(롬 4:15). (116.1)
 율법은 죄에 대한 지각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고의적으로 범하는 기회를 마련하므로 죄를 증가시키기도 한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7:11에서 바울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고 제안한 것이다. “속이고”라는 용어는 뱀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금하신(창 2:17) 그곳에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여 고의적인 불순종으로 인도하기 원했던 바로 그 기회를 찾은 창조의 이야기(창 3:13)를 생각나게 한다. (116.2)
 이러한 의미에서 “죄의 권세는 율법”(고전 15:56)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죽게되며(롬 7:8), 즉, 상대적으로 무기력하게 된다; 그러나 율법이 올 때는 죄가 살아나게 된다(롬 7:9‘죄가 살아남’). 율법이 사람의 죄악적인 욕망에 가져다주는 저항은 그들로 하여금 더 큰 분노를 격동시키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16) (116.3)
 성령의 영향력에 의해 억제되지 않은 죄악적인 인간의 욕망은, 칼빈이 로마서 7:5의 주석에서 놓고 있는 것처럼, “더 큰 분노를 쏟아 부으므로, 그들은 의의 억제로 말미암아 더 많이 물러나게 된다.”17) 따라서 율법은 성령이 없는 곳에서, 죄악적인 욕망과 행동을 공격하므로 “죄를 더한다”(롬 5:20).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생애에서 죄를 들추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이는 죄의 실존을 부정하고 가리우는 것이다. 죄악적인 인간은 “죄를 깨닫게 하는”(롬 3:20) 율법을 필요로 하며, “구속 곧 죄 사함을 얻기 위해”(골 1:14; 참조 엡 1:7) 구세주를 필요로 한다. (116.4)
 (5) 율법의 준수가 율법주의로 인도할 수 있다
 율법의 선함은 그것이 잘못 사용될 때 훼손된다. 바울은 이 진리를 디모데전서 1:8에서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고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바울은 율법의 유효성과 선함을 확증하지만, 그러나 그 율법은 하나님의 의도된 목적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 이 중요한 구별이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도덕적인 원칙들을 준수할 의무가 없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에 의해서 경시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의 도덕적인 원칙들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보여진 사랑의 원칙들로부터 이끌어 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도덕적 원칙의 한 틀만을 가지고 계신다. 바울은 공개적이고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고 남용하는 것을 정죄한다. (116.5)
 남용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행위를 자신의 의를 달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간주한 유대주의자들의 자세에서 발견되었다. 바울은 율법의 준수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잘못 사용하도록 유혹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는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시야에서 의롭게 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의 신뢰가 소망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도록”(롬 3:20)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타락한 상태에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준수 할 수 없다. (116.6)
 유대인들로 하여금 실제로 그분의 율법의 원칙을 범하므로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리는 극악한 죄를 저지르고 있었을 때에라도,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 위해(롬 10:3) “율법을 의지하도록”(롬 2:17) 한 것은 심각한 교만과 자기 기만이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이것은 외형적으로는 의롭고 또 율법에 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눅 16:12-15; 18:11, 12), 내적으로는 부패해 있고 죄악이 가득하며, 영적으로 죽어 있는(마 23:27, 28)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였다. (117.1)
 바리새인들의 사상은 하나님의 율법의 오용을 포기하기를 거절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원시교회 속에 그 길을 마련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가 할례와 같이, 그분의 인성과 그분의 사업을 표상한 의식적인 부분들을 이루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갈 2:14)고 하였다. 이러한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했고, 또 모세의 율법에 있는 구별된 언약들을 지켜야만 했다(행 15:1). 다른 말로, 은혜에 의해서 주어지는 구원은 유대인의 의식들을 준수하므로 보충되어야만 했다. (117.2)
 바울은 모세의 율법에 관해 유대인들의 자세에 어색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도 회심하기 전에는 그 자신이 그들과 꼭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리새인으로 성장했으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 교육을 받았다(빌 3:5; 행 22:3). 그는 자신을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갈 1:14)고 서술한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입장에서, 바울은 “율법의 의”에 관한 한 “흠이 없는 자”(빌 3:6)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117.3)
 회심 후에, 바울은 그가 영적으로 살았고 의로웠다고 믿는 기만 가운데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 자신이 영적으로 죽었고 불의한 자였음을 발견했다. 성령의 영향하에서, 바울은 “율법에 기초하고 있었”(빌 3:9)던 자신의 의가 바리새인들의 사상의 전형적인 한 예증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상이 “선생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막 10:20)라고 예수께 한 부자 청년 법관의 대답에서 반사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의 문제점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절대적인 요구를 하나님의 율법에서 이해하는 대신에, 예수께서 “사람의 유전”(막 7:8)이라고 말씀하신 유대인의 구전 법에 따라 그 의를 축소한데 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계명의 더욱 넓은 의미를 바울의 양심에 가져다주었을 때, 스스로 의롭다는 자만심은 정죄를 받았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117.4)
 바울은 자신의 편지서에서 율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율법주의(legalism)에 대한 자신의 철저한 거절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사람의 의를 율법주의적인 율법의 준수에 의해서 세우려는 시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무상의 선물로 받을 수 있도록 마련하신 그 의에 대해서 사람을 눈멀게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롬 10:3 참조). 이것은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편만한 율법주의가 가져다준 문제로서, 즉 율법의 목적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율법 그 자체만을 준수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율법에 노예가 되도록 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바로 이 이유로 인해서 바울은 할례가 그리스도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권장하므로 갈라디아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거짓 교사들을 강하게 반대했다. 이렇게 하므로, 그들은 구원이 믿음으로보다는 오히려 행위에 의해서 주어지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업적이라는 율법주의 적인 명분을 선전하고 있었다. (117.5)
 할례와 같은 의식들의 준수를 통해서 구원을 권장하므로, 이 거짓 교사들은 전혀 복음이 아닌(갈 1:7-9) “다른 복음”(갈 1:6)을 전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구원이란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이것을 간직하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2, 4). 여기서 바울이 반대하고 있는 것은 율법을 오용, 즉 예수를 통해 마련된 은혜에 의거한 구원을 경시하고, 오히려 할례와 같은 의식들을 행하므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는 시도임이 분명하다. (118.1)
 (6) 율법은 결코 구원의 수단이 되도록 의도되지 않음
 바울은 회심 후에 구약의 율법이 특성상 결코 율법주의 적으로, 즉 구원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신실히 순종하므로 자신의 공로나 또는 칭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점차적으로 그는 율법의 기능이 죄의 본질과 인간의 행위의 도덕적인 표준을 드러내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순종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118.2)
 이러한 진리가 갈라디아서 2: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이탤릭체 강조)는 말에서 표현되고 있다. 율법의 기능에 대한 바울의 새로운 이해, 즉 율법 그 자체, 곧 그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율법은 결코 구원의 길로서 의도된 것이 아니고, 죄를 드러내고 구세주의 필요성을 지적하도록 고안되었다. 이것은 특별히 약속, 예언들, 의식적인 예전들, 그리고 구세주와 그리고 그분의 구속의 행위를 통해서 앞을 내다보게 하는 모세의 율법의 표상들에 있어서 진리였다. 모든 시대의 성경의 위대한 교훈들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눅 24:27)하셨다. (118.3)
 바울은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갈 3:17, 21) 구원의 약속을 무효화 하지 아니하였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 율법이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갈 3:19)으로 부가되었다. 모세의 율법의 기능은 구속론 적인 것이 아니라 표상 적인 것으로, 곧 그것은 외형적인 예식들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에게 앞으로 오실 구세주와 그들이 생애 해야 할 도덕적인 원칙들을 가리키도록 주어졌다. (118.4)
 (7) 율법은 앞으로 올 구세주를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