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기자들은 근동의 인접 지역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신화적이고 다신교적인 신학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주 명백하게 그것에 대응했다. 마찬가지로 신약 기자들의 신학적 사고 양식은 헬라어로 표현되었지만 성경적 히브리 사상의 궤도 안에 머물렀고 영지주의와 플라톤적인 이원론 같은, 당시 지배적인 주변 문화의 이교적인 사고방식을 흡수하지 않았다. 해석자의 연구 목적은 고대 근동 헬라, 또는 현대적 사고를 성경의 히브리적인 사상 안에 읽어 들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히브리적인 사고방식을 인식하면 본문 안에 있는 수많은 명백한 문제가 해결된다. 예를 들면, 히브리적인 사고는 때때로 인과관계와 기능을 구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력하게 인정하면서 성경 기자는 때때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행하시지 않고 단지 발생하도록 허락하신 것에 대해 그분께 행동의 책임을 돌린다. 따라서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
출 9:12)고 기술하고 있는 구절은 동일한 맥락에서
“바로가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였다”(
출 8:15, 32; 9:34)라고 한 구절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자유롭게 갈 수 있도록 허용하라고 한 반복적인 호소에 반응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되도록 허용하였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결정(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을 내릴 수 있는 환경들(호소와 재앙들)을 가져다 주셨다. 또 다른 예로,
사무엘하 24:1은 하나님이 다윗을 격동시켜 이스라엘을 계수했다고 말한다.
역대상 21:1은 사탄이 그를 격동시켰다고 진술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욥의 불행과 고난을 직접적으로 초래하지 않았고, 사탄이 특정한 범위 안에서 행동하도록 허용하셨다(
욥 1:6-12; 2:6). 그러나 야훼께서 직접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다”(
욥 2:3). 히브리적인 사고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 즉 하나님은 그의 절대주권 안에서 그가 허락하시는 것을 일어나게 하신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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