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Ⅴ 부 다윗: 상처난 왕의 몰락 (삼하 13-24) 제 10 장 강간과 복수, 반란과 귀환-제1편 (삼하 13-17)
 그러나 좋은 목적처럼 보이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려는 사람에게 다윗의 이야기는 한 걸음 물러서게 한다. 그의 이야기는 미끄러운 경사에 대한 견강부회(牽强附會)식 성경의 예증이다. 한 죄가 다른 죄를 불러오고, 한 거짓말이 다른 거짓말을 불러오고, 그리고 엄청난 아픔이 따라온다는 것을 말해준다. (287.4)
 충성된 친구들과 지지자들을 만난 후에 다윗은 더 골치 아픈 두 가지 사건으로 나아간다: 므비보셋의 시종 시바의 경우처럼 애매모호한 것과, 흉측한 욕쟁이 시므이를 만나는 것이다. 매우 이상하게도 다윗의 만남은 정신적 고지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내리 치닫는다. 첫째로, 충성되며, 지금은 두 차례나 유배당한 가드 사람들은 가장 멋지게 보인다.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는, 왜냐하면 그들은 외국인들로서 특별한 선택을 하여 다윗을 따라 나섰기 때문이다. 둘째로,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충성된 제사장들—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다할 뿐이다. 셋째는 충성된 후새로서, 다윗에 대한 그의 맹렬한 충성심은 왕을 위하여 사자굴에 자기 자신을 집어 넣을 정도로 용감하게 하였다. 넷째는 시바로서, 너그럽게도 다윗을 위하여 음식과 탈 짐승들을 가져왔다(삼하 16:1-4). 그러나 (나중 우리가 알게 되겠지만)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므비보셋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른다(19:27). 다섯째, 곧 마지막은 욕하고 돌을 던지는 시므이다. 분명 왕의 친구는 아니나, 어쩌면 여호와를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사실상, 답답한 다윗은 여호와께서 시므이에게 저주하라고 하셨다고 말하였다(16:11). (288.1)
 이 마지막 두 만남은 다시 한번 사울의 집의 망령을 데려온다. 다윗이 산 정상을 지나갈 때에 시바가 너그러운 선물과 좋은 말로 그를 맞았다: “나귀는 앙의 권속들로 타게 하시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 하시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2절). (288.2)
 시바에게 한 다윗의 말 속에 사울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왜냐하면 다윗은 시바를 므비보셋의 청지기로가 아니라 사울의 청지기로 말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네 주인의 손자가 어디 있느뇨”라고 물었다(3절). (288.3)
 시바의 대답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작은 절름발이 소년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구긴다: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3절)라고 대답한다. (288.4)
 일각의 지체 없이 다윗은 므비보셋의 전 재산을 시바에게 양도하였다(4절). 그는 아무 불평 없이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나의 급한 결정은 또 하나의 결정을 낳았다. 그때도 성급하게 다윗은 므비보셋의 재산에 관한 왕명을 바꾸어 재산을 반씩 나누게 한다(19:29). 이 두 경우 모두, 지혜로운 보좌관이 있었다면 왕에게 신명기에 있는 관련되는 말씀을 일렀을 것이었다.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 19:15). (289.1)
 다윗이 므비보셋을 처리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고통스런 아이러니를 본다: 선한 정부의 원칙을 정하고 즉각적으로 표현하게 한 그 단호함이, 압박을 당할 때에 악한 결정을 즉각적으로 하게 하였다. 시글락에서, 회수한 물건을 함께 나누려고 하지 않을 때에 다윗은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지니라”(삼상 30:24, 25)는 영구한 원칙을 세웠다. 므비보셋의 재산을 나누는 결정은, 선하고 영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쁘고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을 만하다. 유사하게도, 아비가일에게 그가 나발의 집을 멸하기 직전에 있었다고 고백하는 다윗의 충동적인 개방성은 애당초 나발의 집을 부수기 위해 무장하도록 한 변덕스런 감정과 동류이다. 그리고 그 동일한 변덕성이 그의 큰 죄를 또한 찾아왔다. 나단의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오”라는 말에, 다윗은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아마도, 지붕 위에서 미녀의 모습을 보고 죄에 떨어졌던 것과 동일한 속도로 고백했을 것이다. (289.2)
 다섯째 만남은 시므이와의 대치인데, 시바와의 대화 중 다윗의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도사리고 있던 것이 공개되는 것이다. 즉 사울의 집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위협이다. 다윗이 시바의 선물에 대하여 물은 후 그는 바로 므비보셋에 관하여 물었다(삼하 16:3). 저는 발 때문에 므비보셋은 왕이 될 자격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아들 미가는 거의 스무 살 가량 되었으며, 후보자로 떠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289.3)
 시므이의 욕 지껄임은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 사이의 마찰이 얼마나 쉽게 끓어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이 시므이가 다윗의 고통에 대하여 떠들 때에 무뢰한의 입술에서 나왔다.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8절). (289.4)
 사울 가문의 피를 다윗은 얼마나 많이 그의 손에 묻혔는가? 적어도 일반인들은 아마도 피를 꽤 흘렸으리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 이야기의 연대적 순서는 불분명하지만,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집에 복수한 것은(24:1-14) 이미 역사의 한 장이 되었던 것 같다. 다윗은 그 일이 발생하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21:6). 비록 저자는 구차한 설명을 해가면서 다윗이 그 범죄와 상관이 없다고 하지만 아브넬(3:22-39)과 이스보셋(4:1-12)의 죽음 역시도 다윗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걸음 더 뛰어넘어서, 비판적인 사람은 사울과 요나단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이 다윗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다윗이 그 투쟁 중에서 어느 한 편을 위하여도 싸우지 않았지만, 다윗이 사울의 군대에 가담하여 싸우지 않은 것은 다윗의 불명예이다. 더 나아가, 다윗은 형식적으로라도 블레셋의 동맹이었다. 그는 원수를 지지함으로 이스라엘의 패배를 조장하였다. (290.1)
 이 피비린내 나는 목록 외에도, 미갈과 므비보셋의 이름은 다윗의 집에 대한 불평의 소지를 가진 자로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울의 무자한 딸 미갈은 다윗의 관리하에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은 다윗의 감시의 눈길 아래 왕궁에 격리시켰다. (290.2)
 그러므로 시므이는 욕할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다윗은 심지어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고 있는 그가 떠들도록 놓아둘 용의가 있었다. 시므이가 던진 돌과 티끌은 위험하기보다는 모욕적인 것이었다(16:6, 13). 그러나 위험의 다소를 상관할 것 없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이름을 다 부른 것을 보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고 다윗에게 말하였다(9절). 다윗은 하지 말라고 말했다. 다윗의 생각에, 시므이에 관한 아비새의 표현을 빌자면 “죽은 개”를 통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실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12절). (290.3)
 그래서 시므이는 욕을 계속했고, 돌을 던지고, 진흙을 날렸다. 다윗과 그의 백성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기진맥진한 중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쉬었다”(4절). (291.1)
 ■ 말씀을 적용함
 1. 감정 억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 감정을 억제하여 남들의 필요와 권리를 무시하지 않고 지낼 수 있도록 돕는가? 내 생애의 어느 경우에 암논처럼 감정이 내 가족을 상하게 하였는가? 나는 압살롬처럼 “정의”를 내 손에 거머쥐고 나 자신과 내 가족을 멍들게 한 적이 없는가? (291.2)
 2. 야망. 나는, 압살롬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듯이, 내 야망의 노예가 되어 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남을 이용하고, 심지어 불가능한 약속을 한 적이 있는가? 그러한 행동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291.3)
 3. 정직성. 나는 진실에 관하여 적당히 넘어가는 시험을 받는가 아니면 너무 엄격하여 늘 온전하고 절대적으로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고집이 있는가? 더 정직해야 했었는데 하는 때는 없었는가? “진실”로 사람을 상하게 한 적은 없었는가? 그것은 도움이 되는 상처였는가 다만 해로운 것이었는가? 거짓말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진실이 거짓말이 될 수 있는가? 독자의 대답에 대한 이유들을 대라. (291.4)
 4. 임시적인 혹은 단호한? 나는 충동에 의하여 혹은 단호함의 부족에 의하여 문제에 빠지는가? 다윗의 생애의 어떤 예가 나의 특별한 문제에 도움이 되는가? 도움이 된다면, 어떤 방법으로? (291.5)
 5. 관대함. 나는 (아마도, 시바와 같이) 언제 잘못된 동기로 너그러웠었는가? 내 동기가 순결하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관대해야 할까? 왜 그래야 할까? 아니면, 왜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까? (291.6)
 ■ 말씀을 탐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