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Ⅴ 부 다윗: 상처난 왕의 몰락 (삼하 13-24) 제 10 장 강간과 복수, 반란과 귀환-제1편 (삼하 13-17)
 폴친은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법전을 무시한 것을 흉악하다(flagrant)는 말로 표현한다(David, 150). 신명기부터 열왕기하까지의 역사 속에서 “공의”“의”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적용되는 ṣ—d—q라는 어근의 동사형은 사무엘하 15장과 두 다른 문맥, 즉 신명기 25장열왕기상 8장에만 나타난다. 신명기 25:1-3에서는 재판장에게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책임을 주었다. 압살롬의 이복 아우 솔로몬은 여호와께 구하기를 유죄자를 정죄하고 무죄자의 무죄함을 선포하시라는 동일한 내용을 기도 속에서 말하였다(왕상 8:32). 솔로몬이 설교한 바를 그대로 실행하였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적어도 그는 그것을 바로 설교(혹 기도)했다. (283.2)
 대조적으로, 압살롬은 모든 사람의 경우가 “옳고 바르다”(삼하 15:3)라고 말함으로 백성의 마음을 훔쳤다. 그는 죄인을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더불어 말한 모든 사람은 무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언뜻 보기에는 자기 아버지의 법률 제도를 재정비하는 신실한 시도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그것은 이스라엘의 전통의 기초에서부터 떠난 심각한 일탈이었다. 15:4의 압살롬의 주장에 대한 폴친의 번역은 히브리어를 정확하게 번역한 것이다.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는 자는 내게로 올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옳다[ṣ—d—q] 선포하리라(David, 151, 저자의 강조).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뇌물 공여이며 절도이다. (283.3)
 4년간 마음을 훔친 후에 압살롬은 나라를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준비를 끝냈다. 유배시에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빙자하여, 그는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서 여호와께 경배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구하였다(7, 8절). 여호와의 이름이 13-20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타날 때는 꼭 의심스러운 사람의 입술에 의해서나 의심스러운 정황 속에서 그 이름이 나온다. 여기서는 두 가지가 다 어울려 있다. 그러나 다윗은 “평안히 가라”고 말하면서 허락하였다(9절). (283.4)
 그리하여 압살롬은 평안히 갔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전쟁에 있었다. (284.1)
 놀랍게도, 압살롬은 어떤 이들과는 은밀하게, 다른 이들과는 드러내놓고 일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그는 사자들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보내어”(10절), 나팔 소리가 날 때에 자기에게 대한 충성의 맹세를 하라고 하였다—아마도 헤브론에서 지정된 나팔소리에 맞춰 일련의 나팔들이 그 소식을 온 땅에 전하였을 것이다. 다른 한 편,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그를 대동하고 간 200명의 인사들은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갔다(11절). (284.2)
 압살롬의 지지 세력은 그가 헤브론에서부터 그의 반란의 총화를 모을 수 있었다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바로 그곳은 그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유다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곳이다(2:4). 반란이 공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별 의심 없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200명에 대한 언급(15:11)은 재빠른 공개적 발표를 암시한다. 만일 압살롬이 참으로 희생을 드렸다면—15:12의 히브리어는 그(「새국제역」과 「새개정표준역」)가 드렸는지 아히도벨(REB)이 드렸는지 분명치 않다—그것은 그의 아버지와의 마지막 결별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15:12의 마지막 문장은 더 점진적이고 더 간교한 세력 구축을 암시한다: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284.3)
 도망하는 왕(15:13-16:14)
 위협의 심각성이 마침내 왕궁에서까지 느껴지자, 다윗은 그 일의 추이에 대하여 암울하게 표현하였다. 압살롬이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15:14). 그래서 왕은 그의 가족 전체가 그를 따르도록 하고 떠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열 명의 후궁들로 궁을 지키게 하였다(16절). 그가 압살롬을 유혹하였는가? (284.4)
 저자가 제시한 바에 따르면,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도망은 늘어진, 거의 지루한 사건이었고, 종교적 상징성이 힘겹게 눌린 일이었다. 그 성으로부터 얼마 떨어진 곳에, 행렬이 멈추었고, 다윗의 부하들이 그의 앞서 가도록 하였다(17, 18절).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섯 사람과의 의미심장한 만남을 기록한다—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600명의 부하들, 법궤를 멘 사독과 아비아달, 아렉 사람 후새, 므비보셋의 청지기 시바, 욕쟁이 베냐민 사람 시므이. (285.1)
 이 장이 끝나기 전에, 다윗은 감람산 꼭대기에 올라갈 것이고—머리를 감싸고, 맨발로 울면서 갈 것이다(30-32절). 다른 모든 사람도 그들의 머리를 감싸고 울면서 올라갔다(30절). 그의 첫째 목표는 정상이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였다”고 저자는 전한다(32절, 「새개정표준역」). 「새국제역」의 해석은 그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과거에 놓지만(그곳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던 곳이다), 그것은 히브리어로는 증명할 수 없는 주장이다. 전체적으로 이 슬픈 이동은 종교적 사건을 암시한다. 만일 15:24의 「새국제역」이 옳다면(히브리어는 문제시되고 있다), 종교적 국면이 더욱 중요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이 법궤를 중요한 위치에 놓았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더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285.2)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의 십자가로의 길을 묘사할 때에 다윗의 경험을 반영하였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주석가들이 많음은 또한 흥미있는 것이다. 유사하게도 유다의 죽음은 다윗의 친구요 고문이었으나 압살롬에게 넘어간 아히도벨의 자살을 상기시킨다. (285.3)
 길에서 다윗의 만남들은 첫째가 가드로부터 다윗을 따라온 600명의 지도자인 가드 사람 잇대였다. 다윗은 잇대의 충성심에 대하여 놀라고 감사하였다. 여호와와 다윗에 대한 헌신은 13-20장에서 볼 수 있는 소수의 밝은 면들 중의 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심과 우리 주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생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15:21). 잇대는 600명의 가드 사람 전사들에게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큰 무리를 데려온 것이다. (285.4)
 다윗은 다음으로 아비아달과 법궤를 멘 레위 사람들과 함께 온 제사장 사독에게 말한다. 다윗은 제사장들과 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궤가 자기의 개인적 이익을 초월하는 상징임을 인정하였다. 사독의 귀환, 그의 이름은 “정의” 혹은 “의”를 뜻하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이 다시 정의와 의로 다스려질 것을 바라는 다윗의 기대를 상징할 수 있다. (286.1)
 인간적인 차원에서,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은 첩보 활동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하였다. 그들은 다윗에게 성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보고해야 하였다(35, 36절). 제사장 일가가 다윗에게 대한 충성을 유지하면서도 압살롬을 지지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매우 힘든 노릇이었다. (286.2)
 아렉 사람 후새와의 다윗의 만남은 3부로 된 이야기의 결론 부분으로 저자에 의하여 전해지고 있다:

 (1) 아히도벨이 모반자들 속에 가담함;

 (2) “오, 여호와여, 아히도벨의 도모를 어리석게 하소서”라는 다윗의 기도;

 (3) 다윗이 산꼭대기에 이름. 그때에 후새가 옷을 찢고, 머리에는 재를 얹고 거기서 다윗을 만남(31, 32절). (286.3)
 13-20장에서, 다윗과 여호와와의 유일한 대화는 이동 중 지리적으로 높은 지점에 이르렀을 때에, 그리고 심리적으로 그의 삶 속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이르렀던 여기에서 있었다. 주석가들이 자주 언급하는 것처럼, 기도가 마치자마자 응답—후새는 다윗의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졌다. 사실상 그는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할” 하나님의 도구가 될 것이었다(17:14). 다윗은 후새를 압살롬의 고문으로서 일하도록 예루살렘에 돌려보냈다. 그는 다윗에게 충성하면서 유배당한 왕의 이익을 예루살렘에서 도모하는 가운에 역적에게 충성을 맹세하여야 하였다(15:32-37). (286.4)
 성경은 후새에게 준 왕의 명령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말한다. 역적 압살롬을 패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다윗이 사용한 거짓말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는 것을 보여주는가? Brewer's Dictionary of Phrase and Fable (제14판, 1989)에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는 말은 “여러 교황들에 의하여 자주 정죄된 거짓 교리이며, 그것은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하여 악한 수단을 사용해도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풀이되어 있다. 이 사전의 내용은 이 설명을 영국 시인 매튜 프라이어(Matthew Prior, 1664-1721)의 시 “한스 카블”(Hans Carvel)의 한 구절과 균형을 이루게 한다. (286.5)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시켜야 한다.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만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악과 싸우는 것이므로
   마귀를 이용하는 것도 합법적인 것이다.
(287.1)
 적어도 두 구절에 있어서 사무엘상∙하의 저자는 여호와의 목적을 이루고자 잘못된 말들을 사용하는 인간의 노력과 여호와를 연결시켰다. 사무엘상 16:2에서 여호와는 사울에게 부분적인 사실만을 이야기하도록 사무엘에게 권하였다. 여기, 사무엘하 15-17장에서 속임은 더 깊이 들어갔고, 굵은 거짓말들이 포함되었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속임을 당한 자는 “선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다. 참으로, 사울과 압살롬은 그들의 권력과 지위에 대한 개인적 열망 때문에 “무죄한 자”를 멸하고자 애쓴다. 구약에서, “사사로운 이익”“의도”는 진실을 고하는 것(truth telling)을 이해하는 관건이다. (287.2)
 의도의 중요성은 신 19:16-19에 강조되어 있다. 거기서 “위증을 하는 것”은 상호적인 말로 묘사되어 있다: 무엇이든지 “위증하는 자가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것이 형벌이 된다. 그러므로 의도는 거짓 증거를 금한 명령의 이해와 적용을 위한 관건이 된다(출 20:16; 신 5:20). (2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