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Ⅴ 부 다윗: 상처난 왕의 몰락 (삼하 13-24) 제 10 장 강간과 복수, 반란과 귀환-제1편 (삼하 13-17)
 그러나 암논의 행위가 근친 상간이었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것은 분명히 강간이었다. 이야기는 그가 다말을 강제로 취할 아무 권리도 가지 못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참으로, 다말은 심지어 그녀가 동의했다 하더라도 그와 함께 자는 그것이 처녀인 그녀에게 불합당한 것임을 뜻하였다. 비록 구약에서 약혼하지 않은 처녀에 대한 강간이 일반적으로 간음(약혼한 처녀나 유부녀와의 성 관계)보다는 덜 “심각한” 것으로 인정되었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중한 문제였다. 처녀성은 귀하게 여겨졌으며, 신부에게 기대되는 것이었다. 로빈슨은 그것은 “아직도 대부분의 아시아의 국가들에서 여성의 결혼 조건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G. Robinson, 220). (274.5)
 신명기 22:13-21에는 결혼시에 처녀가 아닌 신부를 돌로 쳐죽이라는 명령이 있다. “그 아비의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21절). 다말은 암논에게 항의했을 때에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괴악한 일[nebalah]을 행치 말라”(삼하 13:12). 찢겨진 옷, 재, 큰 소리로 우는 것은 그녀가 범해졌으며 임신을 하게 되더라도 그녀의 무죄를 확증하는 공적인 증거의 내용들이다. (275.1)
 오라비의 집에서 지내는 다말의 “처량한” 신세는 그녀가 더 이상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강간을 당한 후 그녀의 간청, 즉 “나를 쫓아 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16절)라는 말은 처녀를 강간했으면 그 남자는 책임지고 결혼해야 하는 법을 지적한 것이다(출 22:16; 신 22:28, 29). 출애굽기에서, 범한 사람은 여전히 “빙폐”를 내어야 하지만, 잠시 전에 처녀였던 여자의 아비가 그 결혼의 의무를 무효화시킬 수도 있다. 신명기의 법에는 그런 조항이 없다. 참으로, 그것은 강간의 희생자를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이혼하지 못하게 금하였다(신 22:29). (275.2)
 이 모든 것이 암논에게 아무 힘이 없었다. 그는 다말을 그의 집에서 쫓아내었으며, 무지막지하게 그 상처 위에 모욕까지 더하였다. (275.3)
 왕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새국제역」은 단순히 다윗이 “심히 노하”였다고 말한다(삼하 13:21). 그러나 「새개정표준역」는 「70인역」과 「사해 두루마리」의 확증을 얻은 부가적인 언급을 붙인다.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21절, 「새개정표준역」). 그러나 다윗은 암논이 장자이기 때문에 암논을 사랑했고 그래서 자기 아들 암논을 벌하려 하지 않았다 (275.4)
 요컨대, 다윗은 다시 한번 조처를 취할 수 없는 무능함을 보였다. 암논의 감정이 죄를 짓도록 하였다. 다윗은 그가 벌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암살롬은 피의 복수, 역모로 나아가고, 자기 아비를 살해하고자 궁리하였다. 나단이 실상을 말하였다: “칼이 네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12:10). (275.5)
 이 저주스런 이야기는 사사기의 마지막에 나오는 토막난 첩의 끔찍한 이야기를 자주 반향함으로 고조된다. 폴친은 유사성의 긴 목록을 갖고 나온다(David, 136-138). 예를 들어, 두 이야기는 그녀의 남자에게 야비하게 대접을 받은 여인의 성적 학대를 포함한다.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라고 그 여인의 남편이 사사기 19:28에서 말한다. “일어나 가라”(삼하 13:15)고 암논은 말했다. 이 두 이야기는 그 범죄를 생생한 필치로 묘사한다. 즉 “악을 행치 말라”(삿 19:23, 「새개정표준역」)고 늙은 에브라임 사람이 항변한다. 그것은 다말이 암논에게 한 말 그대로이다(삼하 13:12). 그녀의 외침, 즉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것이니”(12절, 「새개정표준역」)라고 한 말은 사사기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범죄에 대한 공포스런 표현을 반향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삿 19:30, 「새개정표준역」). (276.1)
 그러나 저자의 목적의 관점에서의 가장 기막힌 것은 저자가 사사기의 마지막 장면을 사용하는 것인데, 족속들 사이에서 횡포, 정의의 몰락을 다윗의 치세 말엽의 횡포와 정의의 몰락을 그리는 패턴으로 사용한 것이다. 여인의 보호자들이 사사기에서 실패했듯이, 다말의 보호자들이 거기서 실패하였다. 암살롬은 누이에게 조용히 지내라고 말하였다(삼하 13:20). 그 자신도 “시비간에 말하지 아니하”였다(22절). 그리고 다윗 왕이 화났다. 그것이 전부다(21절). 사사기의 마지막 말은 왕의 부재는 안전도 정의도 없음을 뜻한다고 한다: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새개정표준역」). 이제 왕이 있어도 아무 발전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276.2)
 복수 (13:23-39)
 압살롬은 공격하기 전에 두 해를 기다렸다. 그의 음모는 잘 들어맞았다: 잔치, 초청, 왕의 정중한 거절, 왕 대신 암논과 왕의 아들들로 대신함. (276.3)
 압살롬은 그의 감정을 잘 감추었다. 암논이나 다윗이 반칙 게임을 할 것이라는 의심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어쩌면 압살롬에게 한 다윗의 질문에 혹 있을 수도 있다: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26절). 저자는 단순히 “압살롬이 간청하”였다고 말한다(27절). 그러자 다윗이 동의하였다. 압살롬의 명령에 암논을 쳐죽일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이미 권력의 기초를 다져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277.1)
 압살롬의 부하들이 쳤을 때에, 왕의 다른 아들들은 도망하였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죽었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들렸다. 암논의 친구 요나답은 압살롬의 잔치 자리에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왕의 아들들이 나귀를 타고 돌아오기 전에 그 소문을 다윗에게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5절). 요나답은 일종의 이중 첩자로 행동한 것 같다. 암논의 강간이 그를 압살롬의 진영에 온전히 합류하게 하지 않았다면, 압살롬과 암논을 둘 다 섬겼다. 어쨌든 그는 다윗에게 압살롬이 암논만 죽였다고 확인하여 주었다. 분명히 요나답은 압살롬의 생각을 읽었다. (277.2)
 왕가가 소동에 빠져 있을 때에 압살롬은 그술 왕에게로 도망하여 자기 모친의 백성 중에서 도피처를 얻었다(3:3; 13:37). 저자는 다윗의 감정의 일부만을 표현함으로 우리를 안달하게 한다: “다윗은 날마다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하니라”(37절). 우리는 그 눈물이 죽은 아들을 위한 것인지, 도망한 아들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277.3)
 13장의 끝 절에 와서야 비로소 다윗이 장자 암논의 죽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압살롬에 대한 그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은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했다고 암시한다. 그러면 압살롬의 3년간의 유배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오도록 할 때에 왜 요압이 속임수를 사용했는가? 압살롬이 돌아온 후에도 그는 왕을 두 해나 알현할 수 없었다. 훗날, 압살롬의 반란시에 다윗의 뜻은 분명히 전달되었다—그의 감정은 매우 강하여 그의 정부의 정책을 주도하였다: “나를 위하여 청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자기 아비 다윗을 멸하려고 획책하는 그 아들을 대항하여 전쟁에 나갈 때에 다윗이 그의 군대에게 이런 소리를 한 것이다(18:5). 요압에 의하면,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마지막 슬픔의 표현이 온 나라를 앗아갈 뻔하였다(19:5-7). (277.4)
 그러나 여기서 다윗의 감정은 더 모호하다. 앤더슨은 13:39의 특이한 히브리어를 이렇게 번역한다: “왕의 분노가 압살롬에게 대하여 맹렬하게 뻗쳐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암논이 죽었다는 불쾌한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하였기 때문이다”(Anderson, 182). 이런 번역은 14장의 사건들과 압살롬이 권력과 영향력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짐작하도록 준비시킨다. (278.1)
 반역자가 돌아옴(14:1-33)
 마지막에 압살롬을 죽일 사람인 요압은 14장 시작점에서 분명히 압살롬 진영의 사람이다. 그는 드고아의 “슬기 있는 여인”을 설득하여 다윗에게 비유를 베풀게 한다. 그의 전체 목적이 분명하지만, 요압의 다투는 형제들의 이야기는 나단의 부자/빈자의 이야기보다 더 복잡하다. 14:1에서 히브리어 전치사 (àl)은 이야기 속에서 모호성을 가지고 계속 나타난다. 다윗은 압살롬을 “위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àl)은 두 의미가 다 가능하다. 「새국제역」은 다윗이 압살롬을 (위하여) 그리워하는 것으로, 앤더슨은 “반대하는” 것으로(Anderson, 182), 「새개정표준역」과 머카터(McCarter, Ⅱ Samuel, 335)는 그 둘을 다 취한다: “왕의 마음은 압살롬에게[on, (àl)] 있었다”(1절, 「새개정표준역」). (278.2)
 어쨌든, 다윗을 설득하여 압살롬을 데려와야 한다고 그가 믿었음으로, 요압은 공교한 공작을 하였다. “슬기로운” 여인은 과부이며 그의 두 아들이 싸우다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죽였다는 이야기로 자기의 형편을 말한다. 그 부족은 남은 아들을 죽임으로 살인의 죄를 갚으려고 한다. 그녀는 왕에게 이 일에 간섭하여 그녀의 “남은 불씨를 끄지” 말기를 간구한다(7절, 「새개정표준역」). (278.3)
 다말의 강간에 대하여 암논을 벌하지 못한 다윗의 무능함을 고려할 때에, 이 비유의 복잡성은 왕이 얽혀있는 상황을 충분히 대변한다. 분명히, 요압의 의도는 압살롬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긴장 관계에 있는 세 가지 관심사—피값을 치름, 피 흘린 죄, 계승—를 서로 옭아매었다. (279.1)
 복수는 부족 시대의 정의를 실천하는 원시적 형태이며, 고엘(goʼel), 즉 친족 보수자(avenger, “구속자”[redeemer])가 살인자를 찾아내어 죽이는 제도이다(민 35:6-28). 피 흘린 죄는 무죄한 사람의 피를 불법적으로 흘림으로 생기는 것이며, 범인이 누구인지 모를지라도 속죄가 요구되는 죄이다(신 21:1-9). (2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