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우리가 자유케 되는 것을, 즉 죄에서 자유하여 우리 자신의 생활 방식을 참으로 자유롭게 선택하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생활 속으로 진입해 들어오려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창문을 통해 거기 우리의 문밖에 서 계신 예수님을 살펴보기로 하자. (135.4)
 예수님은 멀고 먼 길을 걸어 우리의 문 앞에 당도하셨다. (135.5)
 젊은 나이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창설에 공이 많았던 제임스 화잇과 엘렌 화잇 부부는 한때 몇몇 친구들의 영적 형편을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그 친구들은 그 때 240km(150 마일)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1856년의 이른 겨울철이었는데 이용할 수 있는 교통 수단으로는 덮개도 없는 썰매가 있을 뿐이었다. 눈은 깊고 바람은 매서워 썰매의 속력은 하루 평균 40 km(25 마일)에 불과하였다. (135.6)
 화잇 부부는 고생 끝에 미시시피 강에 도달했는데 다리가 놓여 있지 않아 위험스러웠다. 얼음의 상태가 나룻배가 지나가기에는 어렵게 되었고 그렇다고 아직 썰매가 지나가기에 안전할 만큼 단단히 굳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썰매를 끄는 말들이 물 위에 떠 있는 얼음 찌꺼기를 첨벙거리며 밟고 지나갈 때 미시시피 강 물이 썰매의 나무 바닥 위로 넘쳐들었다. 제임스와 엘렌은, 그 지역 농부들이 강뚝에서 그들이 물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135.7)
 제임스와 엘렌은 한시 바삐 친구들의 집을 찾아가 다시 예수님을 향해 문을 열도록 권고하려는 일념 뿐이었다. 그들의 고되고 긴 여행은 헛되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들의 권면을 받아들이고 다시 예수님께 마음 문을 열었다. (135.8)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보다도 더 고되고 먼 여행 끝에 우리의 마음 문밖에 도착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그 긴 길가의 모든 문가에서 간절한 사랑으로 문을 두드리셨다. (135.9)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의 문밖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손에는 우리에게 주실 선물들, 즉 흰옷과 안약과 금을 들고 계시다. 그리고, 그분은 세계 전체의 구원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분을 위해 시간을 내놓는 만큼 그분도 우리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신다. 누구든지∙∙∙문을 열면∙∙∙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135.10)
주 네 맘에 들어가시려 하네
   너 왜 모시잖는가?
이 세상에 무엇이 막으리요.
   왜 주께 대답않나?

전에도 항상 기다리셨고
   또 지금도 기다리네
너 마음의 문 열기 원하시며
   맘 문 앞에 서셨네.22
(135.11)
 왕들과 여왕들이 그분과 함께함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여기서 잠깐 동안 우리와 함께 지내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구절에 나타나있듯이 우리로 “이기게” 하여 그분과 더불어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하려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유혹과 죄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는 즉 죄와 싸워 승리한 사람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같이 하리라”(계 3:21)고 하셨다. (136.1)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나타난 모든 약속이 목적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유혹에 대한 싸움에서 승리자가 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생명나무가 약속되었다. 즉 영적으로 냉랭해지려는 유혹을 이기고 그의 첫사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생명나무가 약속된 것이다. 서머나 교회에서 보내는 편지에서는 “이기는 자”에게 둘째 사망으로부터 면제가 약속되었다. 즉 의심과 비통의 유혹을 용감히 극복하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명랑한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둘째 사망으로부터의 면제를 약속하신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이기는 자” 곧 이세벨의 감각적인 유혹을 굳굳하게 물리친 사람들에게 철장과 새벽별이 약속되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다른 약속들이 다른 교회들에게도 뒤따라 제시되었다. (136.2)
 그리스도는 이기셨다.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았다. (136.3)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썼다. 또 다른 기회에 말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하였다. (136.4)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골 1:27) 이시다. (136.5)
 이기는 자들(계 2, 3장), 새로운 피조물(고후 5장),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신부(엡 5장),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단 7장).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신천지에서 영원히 함께, 행복하게 살기에 합당한, 진정한 남녀 그리스도인들의 거대한 집합을 나타내고 있다. 이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면서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 곧 땅도 사망도 그리고 지옥도 억누를 수 없는 능력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자들이다. 그가 들어오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가 우리에게 문을 열기를 바라시는 까닭이 이것이다. (136.6)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평범한 것으로 만족한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인이며 따라서 그것으로 족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되도 별로 괘념치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이상의 것을 바라고 계신다. (136.7)
 필자는 가끔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방들의 문밖에 서 계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고 권하곤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생활의 “집”안으로 모신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흔히 예수님을 응접실에 홀로 남겨둔 채 자신들의 마음의 깊은 곳에 있는 달콤한 죄의 방으로 살그머니 들어가 버리곤 한다. (137.1)
 여러분들이 젊은 사람들이라면 어떤 분들은 온통 녹색으로 꾸민 방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벽이며 가구며 양탄자 등이 전부 초록색이다. 거기에 우리는 발을 뻗고 앉아 우리의 시기심의 초록빛 인형을 어루만질 것이다. 그리고, “선화는 괜히 우쭐대는 거야, 제 부모님들이 부자가 아니라면 누가 자기를 거들떠보기나 할 줄 알구, 내가 그 아이보다는 훨씬 잘났지 뭐야” 라는 푸념을 늘어놓을 것이다. (137.2)
 그때 갑자기 문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예수님께서 초록빛의 방 문 밖에 서서 들어가도 좋으냐고 물으신다. (137.3)
 아니면 우리는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들을 향해 말해주고 싶은 여러 가지 불쾌한 말들을 혼자 되뇌어보는 자주 빛깔의 방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1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