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2 부 예수님과 안식일 제 4장 안식일의 언약은 그리스도의 새언약이다
 그러나 분명히 새 언약에서는 율법과 관련하여 변화가 발생했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진실이다. 그렇지만 그 변화는 도덕적인 율법 자체가 폐했거나 달라졌다는 의미의 변화가 아니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시려는(롬 8:4)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밝아진 신도의 마음과 삶 안에 나타난 변화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영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영의 지도를 받게 되면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된다. 어찌하여 오늘날 복음주의적인 신앙인이 많아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폭력과 범죄와 살인 사건들이 줄어들지 않고 늘어가고 있는가. 이른바 “새 언약적 신앙”을 내세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의무를 태만하게 함으로써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하도록 양심이 방치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253.3)
 율법과 사랑의 이분법은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그 백성의 언약적 관계에 있어서 율법과 사랑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약은 법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더불어 은혜로 체결하여 유지하는 질서정연한 관계를 뜻한다. 따라서 율법은 그러한 관계가 뜻 깊은 것이 되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254.1)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에 있어서 도덕적인 율법은 하나님의 의지와 성품을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과 백성이 그 율법을 지킴으로서 질서정연하고 뜻 깊은 언약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다. 율법은 죄의 결과물이 아니라 사랑의 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의 구속의 사랑을 보여주신 다음에 비로소 십계명을 주시었다(출 20:2).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동정과 성실과 그 밖의 온전하신 뜻을 어떻게 반영하여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254.2)
 십계명은 단순히 열 개의 율법을 하나로 묶은 것이 아니다. 십계명은 사랑의 중요한 10개의 원칙들이다. 여기에는 율법과 사랑의 이분법이 없다. 사랑과 율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는 것이다.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수 없다. 십계명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그들의 동료 인간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제시된 십계명의 정신을 구체화한 것(레 19:18; 신 6:5)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그 한 예로서 설명하시기를 사람은 단순히 한 사람을 실지로 살해하는 것만으로 여섯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인간에 대해 노하거나 모욕하는 것으로도 여섯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마 5:22, 23). 일곱째 계명도 간음을 행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여인을 음탕하게 바라보는 것으로써 범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마 5:28). (254.3)
 그리스도는 사랑의 원칙이 넷째 계명에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 복음서는 안식일 준수의 핵심이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가르치기 위하여 예수님이 안식일에 치료하신 이야기를 자그마치 일곱 개나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선을 행하는 날”(마 12:12)로, “생명을 구제하는 날”(막 3:4)로, 남자와 여자를 육체와 정신적 매임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날(눅 13:12)로, 그리고 제사보다는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날(마 12:7)로 설명하셨다. (255.1)
 옛 언약의 율법과 새 언약의 사랑을 찢어 분열시키는 신학은 두 언약에서 똑같이 사랑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표현되었다는 단순한 진리를 무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단순한 진리를 반복해서 분명히 천명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요 14:21),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하셨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도덕적인 율법을 더 개선하거나 더 단순화한 것이 아니다. 시내산에서 반포한 율법과 동일한 도덕적 원칙이다. (255.2)
 하나님은 두 언약에서 인간의 동일한 도덕적 표준을 제시하셨다. 즉 삶의 거룩성과 온전성이 그것이다. 삶의 온전성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통합을 말한다. 그리고 온전한 삶은 사랑, 믿음, 공의, 용서같은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을 반영하면서 성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두 언약에서 동일하게 십계명에 나타난 도덕적 원칙에 조화되는 삶으로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하라고 그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다. 새 언약에서는 성령이 십계명의 도덕적 원칙들을 교체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도덕적 율법이 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심령 안에서 더욱 활발해지고 강력하게 된다. (256.1)
 예수님과 새 언약의 법
 그리스도가 십계명 대신에 더 단순하고 더 좋은 계명을 주시었다는 주장은 확실히 마태복음 5장 17-19절에서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결정적인 증언과 상반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다. (256.2)
 이 선언에서 그리스도는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밝히시었다. 첫째는 그가 두 번씩이나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시지 않았다고 하신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율법은 지극히 작은 것을 포함하여 전부가 유효하며 중요하여 천지가 없어지기까지 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해서라도 폐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정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256.3)
 이 말씀에는 해석학상의 어떤 함정같은 것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구약의 도덕적 율법이 더 단순하고 더 나은 율법으로 교체된다는 암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사명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게 하고 신성 모독적이 되며 안식일을 범하고 부모를 모욕하고 살인하고 훔치고 간음하고 폄론하고 시기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분명한 증언들을 도외시하고 몇 안 되는 애매 모호한 성경절들(고후 3:6-11; 히 8:9; 갈 3, 4장)을 구실로 삼아 옛 언약을 더 단순하고 더 좋은 신약의 법으로 대체했다는 주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57.1)
 사도 바울이 구원의 문맥에서 율법을 논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의로움이 되느냐 하는 문제), 특별히 유대주의자들과 논쟁하는 자리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소용없다고 확실히 단언한 바 있다(롬 3:20).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행실(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 곧 성화의 문제)에 대하여 말할 때, 특별히 도덕 폐기론자들과 논쟁하는 마당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의 가치와 유효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롬 7:12, 13:8-10; 고전 7:1-9). 이것은 너무나 엄연한 사실이다. (257.2)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5장 17-19절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 다 성취되었으므로 결국 폐했다는 주장들이 있다. 마태복음 5장 21-43절에서 예수님께서 여섯 차례에 걸쳐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은 옛 언약의 억압적인 본성을 철저히 폐할 수 있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지 옛 계명을 강조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러한가? 다음에서 따져보자. (257.3)
 율법의 계속성
 위와 같은 주장에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같은 주장은 모두 본문의 직접적인 문맥을 자세히 살피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7-19에서는 분명히 밝히기를 율법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끝남으로 끝나는 것이라 하였다. 즉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어도 천지는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율법의 기능은 지금 뿐만아니라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258.1)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 . .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예수님의 주장은 옛 언약의 억압적인 본성을 완전히 철폐시키려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위의 표현이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사용되었지만 그 때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언급하시는 계명의 의무로부터 사람들을 면제시키는 조치를 취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계명들의 더 철저한 준수를 제자들에게 요구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대신에 오히려 모든 계명의 준수를 더욱 강조하시었다. (258.2)
 그리스도는 율법을 수정하거나 교체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율법으로 하여금 사람의 행동에만 영향을 끼치게 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동기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하려는 의도를 나타내셨다. 율법은 살인을 정죄했지만 예수님은 분노까지 정죄하셨다(마 5:21-26). 율법은 간음을 정죄했지만 예수님은 음욕가지 정죄하셨다(마 5:27, 28). 이것은 분명히 율법의 교체나 철폐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강화시키는 조치였다. 분노와 음욕은 율법으로 억제될 수 없다. 법이라는 것은 사람의 외적인 행동을 규제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순종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내적 동기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려 하였다. (258.3)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리라”(마 5:18)하신 말씀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의 생애와 봉사를 통한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적 성취를 지적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옳다. 이 말은 율법과 선지자의 어떤 특별한 측면들 예컨대 레위 제사장들이 행하는 제사들과 메시야적 예언같은 것들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의해 종식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해석을 예수님이 언급하신 하나님의 율법의 도덕적인 측면에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 분명히 단언하기를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이 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21-48절의 전제에서 본다면 “다 이룸”은 율법과 선지자의 더 풍성한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뜻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반복하여 율법의 최고 해석자로 행세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십계명의 창세적 정신에 기초하여 율법의 형식적 순종과 랍비들의 일부 할라카 전통들을 공격하셨다(마 15:3-6, 9:13, 12:7, 23:1-39). (259.1)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의 대체물로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의 재 강조와 계승으로 제시되었다. 마태는 예수 안에서 율법과 선지자가 끝났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예수 안에서 율법이 실현되고 연속되고 있다고 보았다. 마태복음 7장 12절의 황금률은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 사상으로 소개되었다. 마태복음 19장 16-19절에서 부자 청년은 그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중에 다섯 개의 계명들을 거명하셨다. (2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