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4 장 구주와 안식일 제 2 부 신약에 있는 안식일과 구세주
 예수의 쉼과 안식일 사이의 관계가 두 안식일에 일어난 에피소드(12:1-14)의 직접적인 배경에 그 전자를 놓으므로(11:28-30) 마태복음에서 제시되고 있다.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주목받고 있는 것처럼, 그 둘은 구조적으로 뿐만 아니라 “그 때”(12:1)라는 구절에 의해 시간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다.53) 언급하고자 하는 시간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들판을 통과했던 한 안식일이었다. (93.5)
 마태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쉼을 안식일에 주셨다는 사실은 그 둘이 서로 시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 둘 사이의 신학적인 연결은 예수에 의해서 제시된 메시야의 쉼이 어떻게 안식일과 관련되어 있는 지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는 두 안식일 에피소드에 의해서 분명해진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꺾은 것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는(마 12:1-8) 예수의 쉼을 구속의 쉼(redemption-rest), 특별히 안식일에 열심히 일했으나 여전히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들의 예(마 12:5)를 들어 호소하므로 주석하고 있다.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는 예수의 쉼을 회복의 쉼(restoration-rest)-특별히 안식일에 웅덩이에 빠져 있는 한 마리의 양을 구출하시는 그리스도의 예증을 통해서-으로 해석한다(마 12:11, 12). (94.1)
 제사장들은 비록 더 많은 봉사와 희생을 안식일에 드리지만 왜 “죄의식이 없었는가”?(민 28:8, 9). 분명히 그것은 그들이 주일 중에 다른 한 날을 택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한 준비가 구약에서는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한 준비의 부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 준수를 안식일 계명의 기초로 정당화하려고 시도하는 칠일 중 한 날 원칙(one-day-in-seven principle)에 직접적으로 도전한다. 「안식일에서 주의 날」이란 제목의 학술 세미나의 편집장인 도날드 카르손(Donald Carson)은, “만약 구약 원칙이 실제로 예배와 쉼을 위한 일곱째 날(the seventh day) 대신에 칠 일 중 한 날이었다면, 우리는 구약의 법이 제사장들을 위해 다른 어떤 날을 쉬는 것에 대해서 기술할 수도 있었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 결핍은 구약 사상에서 일곱째 날의 중요성을 확증하며, 아울러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일요일을 동일한 것으로 보려는 자들이 크게 의존하고 있는 칠일 중 하루 원칙에 반대한다.”54) (94.2)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수행한 활동들은 그 자체가 계명에 의해서는 분명히 정죄를 받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의 목적을 이루고 있었고 또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를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자신이나 자신의 제자들이 그 날에 하나님의 희생제사의 법을 성취시키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행한 봉사의 예증을 들어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의 행동을 어떻게 옹호할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그 뒤에 연이어 나오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진술, 곧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나니”(마 12:6)에서 발견된다. (94.3)
 성전과 그곳에서의 봉사의 상징적인 기능이 이제 참 대제사장(True High Priest)의 봉사로 말미암아 성취되었고 또 대치되었다. 따라서, 안식일에, 그리고 안식일에 대한 언급에서 조차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희생 제사,” 즉 부족한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봉사를 강조하고 계시므로, 그의 제자들, 곧 새 제사장직을 맡은 자들도 그가 행한 것처럼 행해야 한다. 요한복음 7:22, 23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꼭 같은 개념을 표현하고 계신다.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언약의 축복을 할례 행위를 통해 새로 태어난 자들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일하셔야만 한다. (94.4)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제사장들에 의해서 표상적으로 수행된 구속의 행위 가운데서 자신의 안식일 봉사를 정당화하는 유용한 근거를 찾고 계시는 바, 그 이유는 그분께서는 그 날을 “성전보다 더 큰 어떤 것”(12:6)으로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제사장에 의해서 수행된 성전 봉사와 희생제물을 통해 표상적으로 제시된 구속55)이 이제는 메시야이신 인자의 구원의 봉사를 통해서 실제적으로 마련되어지고 있다.56) 따라서 마치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안식일 봉사를 수행함에서 “죄의식이 없었던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성전보다 더 크신 이를 섬기는 데에 죄의식이 없었다.”57) (94.5)
 성전과 그곳에서의 봉사는 예수에게 그분의 안식일 신학을 설명하는 유용한 골격을 마련하여 준다. 이것은 그것들의 구속적인 기능이 그분의 사명과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하신 목적을 가장 잘 예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구원의 사명을 안식일로 확인하시므로, 계명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것을 나타내시고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봉사를 통해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과거의 창조를 기념하는 시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도와주므로 구원의 축복을 경험하는 시간도 된다. (95.1)
 불행하게도 안식일의 인도주의적인 국면이 그리스도 당시에 많이 잊혀졌다. 의식들에 대한 요구들이 인간의 필요에 봉사하도록 요구하는 주장들을 대신했다. 마태가 보고한 진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안식일에 대한 곡해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 12:7)라고 말씀하시므로 공개적으로 공격하신다. 그리스도에게는, 제자들이 비록 완전히 쉬어야되는 안식일의 법을 범했지만, 계명의 참 뜻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이기 때문에 “무죄”인 것이다. (95.2)
 “자비”“제사”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 말씀은 선지자 호세아가 자신의 책에서 마치 하나님께서 많은 값비싼 희생 제물들을 통해서 화목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삼상 15:22 참조) “양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고 있는”(호 5:6) 백성들을 책망하는 말씀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호 6:6)임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이 자비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는 도움의 행위 가운데서 표현되는 동정적인 자세가 그 특징이다. 마태복음에서는, 특별히 “자비”는 언약의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해야할 도움과 구제의 행위를 의미한다(마 5:7; 9:13; 12:7; 23:23). 바리새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해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동정심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경험한 굶주림은 그들의 마음에 어떤 친절한 느낌이나 또는 도움을 주고자하는 열성으로 불을 부쳐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제자들을 정죄하고 있었다. (95.3)
 안식일이 하나님의 구속의 행위를 인정하고 또 그 날을 기념한 이래, 친절한 행위로 보여주는 이 사랑이 그리스도에게는 안식일의 참 준수를 나타낸다. 사실, 안식일은 애굽의 속박과(신 5:15) 죄의 모든 굴레(눅 4:18, 19; 13:16; 요 5:17)로부터 하나님의 구속을 기념하는 것으로, 안식일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비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과 자비를 표현하므로 경험하는 날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 안식일 봉사의 질서는 첫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살아있는 사랑을 요구하며, 그 다음은 예전의 규정들을 성취하는 것이다. 복음서가 건전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설교 사역에 대해서는 적게 말하고 불쌍한 죄인들에게 동정과 자비의 봉사를 하신 것에 대해서는 더 많이 말하고 있는 것에 있다. (95.4)
 권위인가 법인가?
 어떤 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행위가 안식일 법안에서 합법적이라는 것(legality)을 증명하기보다는 안식일 법을 초월하는 자신의 권위(authority)를 보여주기 위해서 다윗과 제사장의 예를 사용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는, 본 구절에서 관건이 되고 있는 것은 “안식일의 합법성보다는 권위에 대한 질문이다”.58) 제사장과 그리스도 사이의 대조는 이른바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안식일을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59) 그러한 논리에서 나온 궁극적인 결론은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아마도 예배의 날을 변경하기를 기대하는 듯 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일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까지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60) 그런 논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서 일요일 준수에 대한 근거를 발견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논증에 의해 합법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없다. (95.5)
 그리스도께서는 다윗과 제사장들의 예를 들어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안식일 법을 대치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하셨는가? 인간의 권위 그 자체가 하나님의 법을 초월하는 합당한 기준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권위와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는 지속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이 예수의 이론 가운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바리새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율법이 다윗이나 또는 제사장들과 같은 중요한 인물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제자들이 행한 것과 같은 그러한 예외적인 행동이 법에 의해서 고려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그리스도께서 두 번씩이나 “율법에서 읽지 못했느냐. . . ?”라고 물으시는 반대 질문에 의해서 분명하게 지적되고 있다(마 12:5; 3절 참조). (96.1)
 예수께서 제자들의 행위의 합법성을 옹호하기 위한 판례를 율법 안에서(율법 밖이 아님) 찾고 계신다. 그때에 제자들은 그들의 권위(또는 그리스도의 권위)가 율법을 초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행위가 율법 자체의 의도성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무죄”였다. 데이빗 힐(David Hill)은 마태복음 12:5에 대한 자신의 주석에서 이 점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그 구절은 율법 그 자체 안에서 제자들의 행위에 대한 한 판례를 마련하고 있으므로,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 행위를 율법 안에다 확실하게 놓고 있다.”61) (96.2)
 율법의 해석자이신 그리스도
 모든 율법은 해석되어야 한다. 제사장들의 경우가 한 적절한 예가 된다. 율법은 그들로 하여금 안식일에 일하도록 명했으며(민 28:9; 레 24:8),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율법, 곧 안식일의 쉼을 범하도록 했다(출 20:8-10). 이것은 법의 자구(letter)가 차별을 두고 적용될 수 없지만, 그러나 특별한 경우들에 적용할 때는 차별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 사회에서 대법원은 그 땅의 법들의 의향에 대한 최종적인 해석 자로 행동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마 12:8; 막 2:28)이라고 선언하시므로 주장하시는 권위이다. 그것은 안식일 계명을 폐기하거나 아니면 대치시키기 위한 권위가 아니라 그 계명의 참 하나님의 의도를 나타내시는 권위이다.62) (96.3)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결백하다는 것을 옹호하시기 위해 다섯 가지의 의미심장한 논증을 제시하시므로 넷째 계명의 참 뜻을 해석하시는 분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셨다. 그 첫째는, 주님께서 율법이 예외로 인정하는 일반적인 원칙을 유효하도록 하기 위해 다윗을 언급하신다(마 12:3; 막 2:25).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그 계명이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응하여 돕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제사장들에 의해 사용되는 안식일의 예외적인 한 예를 마련하신다(마 12:5).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이 제사장들과 똑 같은 안식일의 특권을 누리기를 주장하신다. 왜냐하면 성전과 그곳에서의 제사장 봉사의 탁월한 원형으로(마 12:6), 그와 그의 추종자들 역시,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가난한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봉사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96.4)
 넷째,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마 12:7)는 호세아의 진술을 인용하시므로, 예수께서는 안식일 준수의 우선권에 대한 질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봉사를 하는 것이 그 첫째요 그리고 의식적인 법들의 성취는 그 다음이라고 설명하신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대한 자신의 주권, 즉 안식일이 인간의 복리를 위해서 제정되었다(막 2:28)는 기본적인 원칙을 재확인하시므로 그 날의 의미를 해석하는 자신의 대권을 주장하신다. 결론적으로, 안식일에 대한 인간의 필요를 부정하는 것은 그 날의 본래의 목적을 곡해하는 것이다. (96.5)
 손 마른 사람
 안식일의 주권에 대한 그리스도의 선포는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신 두 번째의 이야기가 있은 바로 직후에 나온다(마 12:9-21; 막 3:1-6 참조). 이 치유의 기능은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의 치유와 회복을 제시하시므로 안식일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어떻게 주장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