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천년 후 재림설의 부상
 대니얼 휘트비(1638-1726년)는 영국에서 태어나서 옥스퍼드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샐리스베리의 세인트 에드먼드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두 권으로 된 〈신약 풀어쓰기와 주석(Paraphrase and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에서 휘트비는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기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1062.1)
 휘트비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첫째 부활을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였고, 이 사건을 아직 미래에 있을것으로 보았다. “첫째 부활”은 성령을 크게 부어주시는 사건이며, 유대인들이 나라를 세우고, 교황과 투르크 족을 뒤엎을 것이다. 이 사건들은 천년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며 복음으로 확신시키는 능력으로 전진할 것이다. 성령의 인도 아래 회심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는 세계 전체를 향해 전진할 것이며 모든 나라들에 큰 빛을 비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사탄을 결박되어 있을 것이며 복음의 승리는 세상 끝까지 제자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에 신빙성을 더 할 것이다. 영광스러운 지상 천년기 끝에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 황금시대 이후에 끝이 올 것이며 그리스도는 모두를 심판하시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려고 오실 것이다. (1062.2)
 천년 후 재림설은 18세기와 19세기 동안 인기를 타고 상승하였다. 그것은 인간상황에 관한 매우 낙관적인 견해였으며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먼 미래로 밀어내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형태의 천년기 이해가 대각성의 최고 신학자인 조너썬 에드워즈에 의하여 북미로 소개되었다. 이런 노선의 사상이 그의 빛나는 외손자 티모씨 드와이트(1752-1817년)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그는 예일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고, 설교자, 저술가, 행정가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천년 후 재림설은 미국과 유럽에서 18세기와 19세기에 지성적인 그리스도교인의 표가 되었다. 그 사상은 앞에 있는 황금시대 동안 지상에 천년기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과 협력할 자리를 제공하였다. (1062.3)
 이러한 가르침은 19세기 중엽에 미국에서 우세한 것이었으며 재림신도들의 천년 전 재림설과 반대의 입장에 있었다. 날짜를 정하는 문제를 반대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지상의 교회 앞에 황금시대가 놓여있는데 갑자기 주님이 오신다는 것에 더 반대의 초점을 맞추었다. 초기 재림교회 저술가인 제임스 화잇은 이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이 주제에 관한 인기 있는 입장은 세계가 회심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행복 상태는 천년 동안 지속될 것이며, 그 동안 그리스도가 자신의 백성들과 영적으로 다스릴 것이다.”(17). (1062.4)
 재림교회가 유아기에 있을 때 천년 후 재림설은 최고를 구가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목사 데이비드 브라운의 영향력 있는 책 〈재림(The Second Advent)이1846년에 선을 보였다(1849년에 개정됨). 여러 해 동안 이 책은 천년 후 재림설의 교과서처럼 여겨졌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다른 중요한 저술은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찰스 하지(18기년)의 〈조직 신학〉이다. 이 입장을 지지한 프린스턴의 다른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 중에는 W. G. T. 셰드(W. G. T. Shedd), R. L. 대브니(R. L. Dabney), B. Η. 스미쓰(B. Η. Smith), A. Η. 스트롱(A. H. Strong), B. B. 워필드(B. B. Warfield)가 있다(Boettner 10). (1062.5)
 20세기 후반 동안 천년 후 재림설에 대한 지지가 증발하였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계속되는 폭력, 저질스런 비인간성 등의 이 세기의 어두운 현실은 영광스런 미래에 대한 비전을 어둡게 하였다. 이제 천년기에 관한 논쟁은 주로 무천년설과 천년 전 재림설 지지자들 사이에만 존재한다. (1063.1)
 6. 무천년설 재고
 이미 기술된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으로 무천년설적 해석 방법을 정리하였다. 그의 견해는 매우 영향력이 커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내에서 전통적인 입장이 되었다.” 아직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무천년설은 우세함이 “보수적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들에서” 널리 퍼져있다(LaRondelle September 1982). (1063.2)
 무천년설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19세기 독일의 신학자 테오도르 클리포트(Thedodr Kliefoth)는 1,000년이 중간상태에 적용된다고 보았다. 초림과 재림 사이의 지상 교회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의 견해는 부활 전에 성도들이 하늘에서 통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 다른 견해는 H. 비텐하르트(H. Bietenhard)의 “종말역사적”입장인데 “천년기는 이 세대를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기간”이며 “단 하나의 메시아 왕국의 온전한 나타남의 마지막 국면”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때에 “교회는 천년 교회로 나타날 것이며 사탄은 결박될 것이다.”(Berkouwer 299). 어떤 무천년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 20장의 1,000년은 현재의 시간을 말한다고 본다. 다른 이들은 이 기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1063.3)
 7. 천년 전 재림설의 재부상
 19세기가 시작하면서 예언과 그리스도의 속히 오심에 관한관심이 영국과 미국에서 널리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언적 부흥에 관계하였고 예언 해석상 역사적 방법을 지지하면서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재림을 선포하였다. (1063.4)
 헨리 드러먼드(Henry Drummond)는 1826-1830년에 올베리 파크에서 일련의 예언 연구 집회들을 뒷받침하였다. 이 집회들의 특징은 전천년적, 역사적 해석이었다. 에드워드 어빙은 천년 전 재림설 운동의 성장에 무게를 더하였다. (1063.5)
 파워스코트 하우스에 있었던 다른 여러 성경 연구회로부터 두 가지 새로운 해석이 흘러나왔다 미래주의와 다비주의(Darbyism)였다 미래주의는 스페인의 예수회 수사 리베라의 예언적 방법을 되살린 것이다. 1590년에 나온 그의 책은 적그리스도가 교황이라는 초점을 버리고 3년 반 동안 교회를 직접 핍박할 미래의 어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게 하였다. 이 견해는 영국과 미국의 예언 연구회들에서 다시 살아났으며 천년 전 재림설을 앞세우게 되었다. (1063.6)
 천년 전 재림설의 다른 날개는 플리머쓰 형제단의 J. N. 다비(J. N. Darby, 1800-1882년)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파워스코트 하우스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다작하는 저술가로서 그는 근대 세대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다비는 교회가 환란 전에 휴거한다는 것을 지지하였다. 이것이 이 방법의 특징이었다. 그는 1859-1874년에 미국을 여섯 번이나 방문하였고, 그 결과 세대주의가 미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미국의 예언 해석, 성경 연구회 운동은 이런 관심에서부터 자라난 것이며 많은 성경 학도들이 1883-1897년의 나이아가라에서 있었던 연구회들과 같은 성경 대회에 참여하였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 모임은 핍박 전의 비밀 휴거를 받아들이는 그룹과 교회가 핍박을 통과할 것이라는 그룹으로 나뉘게 되었다. 후자를 환란 후 재림론자(post-tribulationsts)라 부른다. (1063.7)
 다비의 환란 전 휴거설의 영향력 있는 추종자 가운데 C. I. 스코필드(C. I. Scofield 1843-1921 년)가 있다. 그는〈스코필드 주해 성경〉을 만들었다. 이 책은 세대주의적 교리를 파급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천년 전 재림설은 세대주의의 중요한 일면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재림 뒤에 이어 나오는 지상의 천년기는 이 가르침에서 두드러지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학파의 해석자들 사이에도 서로 다른 관점들이 있다. (1064.1)
 오늘날 천년 전 재림론자들은 두 그룹 즉 역사적 천년 전 재림론자들과 세대주의적 천년 전 재림론자들로 나뉜 것이다. 두 그룹은 천년기를 두 문자적 부활 사이에 놓는다. 둘 다 왕국은 신자들이 겪을 짧은 환란의 때 직후에 있을 영광스런 재림에 의해 시작될 것이라고 믿는다. 두 그룹은 천년 왕국이 이 땅에서 진행될 것을 믿는다. 그러나 역사적 천년 전 재림론자들은 교회를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보는 반면, 세대주의적 천년 전 재림론자들은 이스라엘에 관한 구약의 예언이 국가와 예루살렘 성전의 문자적 회복과 함께 그대로 성취될 것을 기대한다. (1064.2)
 8. 재림교회의 이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1840년대의 밀러가 전한 재림 각성의 기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윌리엄 밀러는 그 당시 많은 집단에서 사용하던 천년 후 재림설과 반대되는 천년 전 재림설을 채택하였다. 천년후 재림설은 세상과 황금시대에 관하여 낙관적인 견해를 가졌다. 황금시대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복음의 능력에 의하여 곧 시작될 것이었다. 윌리엄 밀러는 1843년에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까지 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주장으로 그 설을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1064.3)
 밀러가 천년 전 재림론자였지만 이 견해의 모든 요소들과 다 조화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밀러와 문자주의자들은 천년기 전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1,000년을 사이에 두고 두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다. 그러나 밀러는 천년기 동안에 구약의 예언들이 유대인들에게 성취될 것이라는 문자주의자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았다. (10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