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5 장. 안식일:구속의 기쁜 소식 II. 신약에 나타난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들
 2. 초기의 안식일 치료 봉사
 누가와 마가에 의하면 치료에 대한 최초의 두 이야기는 안식일에 발생한 것이었다(막 1:21~31; 눅 4:31~39). 누가는 이 이야기를 나사렛에서의 설교에 곧이어 소개하고 있다. 첫번째의 치료 이야기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안식일 예배를 드리던 중에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 영적 치료의 이야기이다(눅 4:31~37; 막 1:21~28). 두번째 이야기는 시몬의 집에서 예배를 필한 다음에 시몬 의 장모를 고쳐준 육체적 치료의 이야기이다(눅 4:38~39; 막 1:29~31). 후자의 사건은 온 가족의 기쁨과 그 장모의 봉사로 연결되고 있다. 누가는 기술 하기를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리라”(눅 4:39)고 하였다. 최초로 이루어진 이와 같은 치료 행위 속에서 단지 미진한 형태로만 들어나 있던 해방, 기쁨, 봉사의 주제가 그 후에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봉사활동의 빛 속에서 안식일의 의미와의 관련성이 좀더 뚜렷하게 부각되어 나타났다. (131.1)
 3. 불구 여인
 안식일에 있는 자유. 단지 누가만이 소개하고 있는 이 불구된 여인의 치료 이야기속에 예수님의 구속 봉사와 안식일의 관계가 좀더 뚜렷하게 부각되어 나타난다(눅 13:10~17). 이 짤막한 이야기 속에 “자유롭게 하다”루에인이라는 동사를 세번씩이나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을 끄는 현상이다. 영어 개역 성경(R. S. V)에서는 이 동사가 매번 “자유롭게 하다, 풀어주다. 놓아주다”(13:12, 15, 16) 등 다른 동의어로 번역되어 있다. 이처럼 세번씩이나 되풀이 하여 이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가 이 동사를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사용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동사는 제일 처음 예수께서 “여자여 네가 병에서 놓였다고 하셨을 때 나오고 있다(12절).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이 계시자 18년 동안을 꼬부라져 지내오던 그 여인이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1, 13절). (131.2)
 이에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신 일 때문에 분노한다. 회당장의 분노로 말미암아 우리의 시선은 한 곳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시 만연되고 있던, 안식일에 대한 곡해와 또 안식일을 그 본연의 의미로 회복시키려는 예수님의 노력, 이 두 사이의 대조이다. 회당장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준수되어야 하는 규칙들을 의미했으며 예수님에게는 이 날이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131.3)
 안식일의 기능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다시 두 차례에 걸쳐 “자유롭게 하다”라는 동사를 활용하시고 계시다. 먼저는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고 하셨을 때 사용하셨다(눅 13:15). 이처럼 동물을 풀어 주는 개념 위에 수사학적 의문형을 이용하여 “그러면 십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푸는것이 합당치 아니하느냐”(눅 13:15)라는 명백한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132.1)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소 전제에서 대 전제로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얼마나 안식일의 관념이 삐뚜러져 있는가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안식일에 소나 나귀를 풀어 물을 먹이는 것(필시 물을 먹이지 않으면 살이 빠져 값이 내려갈 것을 걱정하여)은 합법적인데도 고통당하는 여인을 안식일에 육체적인 쇠고랑과 영적인 질병에서 풀어주는 것은 위법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서는 안식일을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본래의 목적으로 회복시켜 놓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당시 만연되어 있는 잘못된 관념에 대항하여 행동하시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 있어서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계명의 요구하는 의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규칙들 때문에 대부분 그 빛을 잃게 되버린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려고 다투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59 (132.2)
 안식일 해방과 구세주의 구속(救贖). 사단에게 매인바 된 희생자를 안식일에 풀어준다는 표현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눌린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눅 4:18)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케 한다. 안식일에 아브라함의 딸을 육체적, 영적 사슬에서 자유케 하신 예수님의 행위는 자신이 선언하신 메시야적 안식일 해방의 구체적 실례가(눅 4:21) 아닐 수 없다. 이 두 사이의 연결성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 일례로서 해럴드 리젠펠드(Harald Riesenfeld)는 지적하기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행위들은 그동안 유대민족의 종말적인 기대감 속에서 안식일이 지적해온 어떤 것이 예수님의 인격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표징으로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60고 하였다. (132.3)
 조지 브래드포드 케이어드(George Bradford Caird)는 논평하기를 “사단의 횡포로 부터 희생자들을 자유케 해 주는 일들은 일주일 내내 계속되어야 한다. 안식일은 그러한 활동을 해서는 안되는 날이기는 커녕 오히려 가장 적합한 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주일에 하루씩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위하여 제정하신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 왕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 즉 온갖 속박으로부터의 최종적인 해방을 때 주일 마다 하루씩 미리 맛보는 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단의 지배에서 풀어주기 위하여 남녀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 두는 일은 안식일을 모독하는 일이 아니라 안식일의 목적을 성취하키는 일”61이라고 하였다. (132.4)
 

안식일에 예수님의 봉사를 통하여 축복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그들이 육체와 영혼이 치료를 받은 기념일, 사단의 속박을 벗어나 주님의 자유로 탈출한 기념일이었다.
(133.1)
 또 폴 K. 지윗트(Paul K. Jewett)는 말하기를 “우리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행위 속에서 사랑과 동정과 자비의 행위 뿐만 아니라 메시야적 안식일, 즉 구약 성경의 안식일 안식의 성취가 우리들의 세계 속에 진입해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진정한 ‘안식년적 행위들’을 발견한다. 따라서 모든 날들 가운데서도 안식일은 치료의 행위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날”62이라고 하였다. (134.1)
 C. F. 에반스도 비슷한 취지로 지적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안식일에도 계속 치료행위를 하셨다 ∙∙∙ 바리새 법에는 단지 생명이 위급할 경우에만 안식일에 치료 행위가 허용되어 있다는 회당장의 주장에 응답하여 예수께서는 택하신 족속의 자손을 사단의 속박으로부터 구출하는 치료 행위는 안식일에 적합한 행위라고 주장하셨다(눅 13:14~16). 안식일은 하나님에게 속한 평화와 안식의 기념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능과 관련된 활동은 모두 메시야적 질서의 도래 표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은 이러한 활동에 특별히 적합한 날”63이라고 하였다. (134.2)
 일부 학자들은 이같은 해석을 배척하고 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안식일에 소나 나귀를 풀어 물을 마시게 하는 것과 여인을 사단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행위를 비교한 것은 안식일이 그리스도께서 자비의 활동을 하기에 특별히 적합한 날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동물들을 풀어 물을 먹이는 일은 안식일과 상관없이 매일같이 하는 일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구원의 활동도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안식일임에도 구하고 수행되었던 것64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34.3)
 이같은 논증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소인(訴因)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첫째로 안식일 계명의 수혜자(受事者)들 가운데는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라고 말하여(신 5:14) 분명히 짐승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말못하는 짐승에게 까지라도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안식일에 특별히 적합한 일이었다.65 두번째는 안식일에는 말고 다른 날 “엿새” 동안에 치료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회당장의 항의에 대하여(눅 13:14) 예수님은 오히려 여인이 “안식일에” 그녀의 매임에서 풀리어나야 한다고, 응대하신 점이다(눅 13:16). 이것을 미루어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는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을 치료해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 날이 가장 적합한 날이기 때문에 그녀를 치료해 주시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66 (134.4)
 주님께서 안식일에 그 병든 여인에게 베풀어주신 육체적, 신체적 자유는 그리스도가 선포하신(눅 4:18~21) 안식일 해방의 구체적 실현의 명목적인 표현이었다. 안식일의 이와 같은 구속적인 의미는 이제 곧 검토코저 하는 두 개의 다른 사건들 속에서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사건들을 취급하기에 앞서 혹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개입을 지켜 본 그 여인과 무리들은 안식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지 모르겠다. 누가는 전하기를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무리는 ∙∙∙ 기뻐하였으며”(눅 13:17)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다(눅 13:13). 치료를 받은 그 여인과 또 그리스도의 안식일 봉사로 축복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분명히 자신들의 육체와 영혼이 치료를 받은 기념일 즉 사단의 매임에서부터 구세주의 자유로 놓임을 입는 기념일이 되었던 것이다. (134.5)
 4. 중풍환자와 소경
 유사성. 요한이 전하는 두개의 안식일 기적들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와 안식일의 관계가 더욱 뚜렷해 지고 있다(요 5:1~18; 1~41). 이 두 이야기는 본질적인 유사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하나로 묶어서 검토할 수가 있다. 두 사람 모두 만성적인 병을 앓고 있었다. 한 사람은 38년간을 앓고 있었고(요 5:5) 다른 사람은 나면서 소경된 자였다(요 9:2). 두 사람의 경우 모두 그리스도께서 주신 분부는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중풍병 환자에게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 하시고 소경에게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 9:7) 하셨다. 이 두 행위 모두가 랍비의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었으며 또 이 두 행위 모두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자료로 이용되었다(요 5:10, 16; 9:14~16). 이 두 경우 모두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 봉사가 안식일 계명에 의하여 방해받지 않고 오히려 계획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같은 비난을 반박하였다(요 5:17; 7:23; 9:4). 그리스도의 변명 이유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9:4)는 유명한 선언을 통하여 천명되었다. (135.1)
 안식일의 부정(否定)인가 아니면 명료화인가? 당신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라는 말로 안식일 파괴자라는 비난에 응수하셨을 때 그리스도가 실제로 뜻하신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과 자신의 추종자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의무를 철폐시키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본보기를 이용하신 것인가 아니면 안식일의 진정한 본성과 의미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인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안식일 계명의 거부를 뜻하는가 아니면 명료화를 의미하는가? 앞에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이제까지 일하신다”는 구절에 대한 기본적인 주석이 역사적으로 셋이 있어 왔는데 그것들은

   (1) 계속적인 창조,

   (2) 계속적인 돌보심,

   (3) 구속적인 활동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살핀 바 있다.67 (135.2)
 이와 같은 각기 다른 세가지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선언을 안식일 계명의 암시적인(일부는 명백한) 폐기로 생각하는 점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135.3)
 이같은 결론은 이 귀절에 대한 정당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가 아니면 이 귀절에 대한 자의적(慈義的)인 가정일 뿐인가? 이 문제에 답하고 또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의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어제까지”라는 부사 레오스 아르티라는 단어의 역활과 “일하시고 있다”는 동사 에르가제타이라는 단어의 의미 그리고 이 귀절의 신학적인 함축성에 대하여 간략히 검토해야 하겠다. (1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