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역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집단들(어떤 의미에서 남은 무리들)이 생겨났으며, 그들은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더 경건한 신앙으로 인도해야 하는 부담을 지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그들의 신앙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한편, 그들은 성경을 그들의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였고 신자들을 다시 성경으로 돌이키기를 열망하였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교리와 실천면에서 여러 모로 이 그룹들과 다르지만, 동시대 사람들을 성경에 더 가까운 신앙으로 인도한다는 의미에서는 공통적으로 남은 자의 이미지가 있다. (997.1)
 A. 발도파와 종교개혁 이전 인물들
 일반적으로 페터 발도(Peter Waldo)가 창시한 것으로 여겨지는 발도파(Waldensian) 운동은 사도시대의 청빈한 생활로 돌아가고 복음을 증거해야 할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강조했다. 이 운동이 발도 자신보다 먼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학술적 증거가 충분히 있다. (998.1)
 14-15세기의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관심사를 보여 주면서 종교 개혁의 가르침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그 중에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9년경-1384년), 얀 후스(John Huss, 1369-1415), 히에로 뉘무스(Jerome, 1370년경-1416년)이 있었다. 각자 활동하면서도, 세 사람은 기성 교회의 의식(儀式)과 교리적 가르침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데 의견을 합하였다. (998.2)
 종교개혁 직전 시대를 앞장서서 갔던 존 위클리프는 설교와 저술을 통하여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성경의 최고 권위를 선양(宣揚)하였다. 그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의견을 달리하였던 여러 문제들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교회의 본성,

   (2) 로마 교황의 역할과 권위,

   (3) 사제직(Priesthood),

   (4) 화목의 교리,

   (5) 성경의 사용과 권위.

 이 모든 문제에서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와 명백한 뜻에 기초를 두었으며, 그는 교회와 그의 동포들도 거기로 돌아오기를 원했다. 위클리프의 견해는 보헤미아의 후스와 그의 친구 제롬의 지지를 받았는데, 두 사람 모두 신앙으로 말미암아 순교를 당했다 (998.3)
 B. 루터, 칼뱅, 츠빙글리
 16세기의 루터(Luther, 1483-1546년), 츠빙글리(Zwingli, 1484-1531년), 칼뱅(Calvin, 1509-1564년)의 항거는 교회 관료들의 방탕한 생활이나 교회 관행의 남용에 반대하는것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의 본질, 구조, 질서, 성례전, 구원의 메시지와 관련된 교리를 철저히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항의는 신학적인 것이었다. 앞서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오직 성경(솔라 스크립투라)에 기초하여, 교회 정책과 구속(救噴)에 관한 사도들의 가르침에 근본적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998.4)
 마르틴 루터의 교회론은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과 순종을 행사해야 할 책임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을 토대로 그는 중세 교회의 배교의 구체적인 형태로서, 화체설(化體說) 교리와 미사의 제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갱신으로 간주하는 것과 교회의 중보 기능을 지적했다 이로써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끝내 돌이킬 수 없이 절교하게 되었다. 그가 보기에 성경에서 발견하는 복음이 선포될 때,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아무리 약하고 죄 많을지라도) 있다. 그는 참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히 믿는 남은 자들로 분명히 한정하였다. (998.5)
 스위스의 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관한 루터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 했는데, 그 또한 성경의 저자들에게 직접 배웠다고 주장하였다. 취리히와 베른의 명목상 그리스도교 사회의 중심에서 성경, 오직 성경만을 최고의 권위로 회복하려는 그의 노력은 어떤 면에서 루터가 달성한 것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으로 이어졌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회복하기 위해 그는 성경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998.6)
 프랑스의 신학자인 장 칼뱅은 유명한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보내는 답변서”(1539년)로써 루터의 존경을 받았는데, 여기에서 그는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교부(敎父)들과 공의회의 권위의 관계를 논의했다. 독일의 개혁자와 함께 그는 개신교가 널리 퍼진 비난과는 달리 교회의 조화와 평화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 로마가톨릭교회가 후대에 변경시킨 것들에 반대하여 초기 교부들이 이해한 대로 옛날 사도들의 가르침을 회복시키려고 한다는 데 동의했다. 루터와 츠빙글리처럼 칼뱅은 성경의 말씀이 충실하게 전파되는 곳에서만 비록 소수라도 사도들의 진정한 교회가 모이게 된다고 공언했다. 그의 신학적 통찰력, 숙련된 주석, 분명하고 정확한 언어와 체계적인 발표로써 그는 개혁자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가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교회를 성경적 순수성으로 회복시키는 임무를 받았다고 믿었다. (998.7)
 C. 재침례파
 유아세례를 거부한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16세기의 재침례파(Anabaptists)는 성경적인 침례를 다시 시작하고 성경의 모든 가르침에 충실하게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스위스 형제단, 남부 독일 형제단, 후터파(Hutterites), 네덜란드의 메노파(Mennonites) 등 유럽 대륙의 다양한 단체들도 평화주의와 무저항주의를 가르쳤다. 교회와 국가의 연합을 반대하고 종교적 관용과 자유를 확고히 옹호함으로써 로마가톨릭과 개신교파 양쪽으로부터 자주 박해를 받았던 재침례파는 신약에 제시된 대로 교회의 사도적 개념을 되찾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회복을 추구했다. 그들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벨론을 떠날 것을 촉구했다. “사도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적혀있는 그대로 하는것 뿐이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일요일을 예배의 날로 지켰지만, 모라비아와 실레지아의 일부 재침례파 단체는 창조 시에 제정된 대로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다(Hasel 1967, 101-121; 1968, 19-28; Muller 110-130). (999.1)
 D. 청교도
 16세기 청교도들은 성공회(the Anglican Church)를 비논리적이고 부패한 형태로부터 정화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교회정부와 공적 예배의 모든 세부사항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요구했다. T. 카트라이트(T. Cartright), R. 필드(R. Field), W. 트래버스(W. Travers)는 장로교 정치 체제를 옹호하며, 주교제도 자체를 비난했다. 17세기에 들어 점점 더 많은 청교도들이, 장로교와 회중교도들 사이에서까지 삶의 교리적 순결과 삶의 성결에 대해 더 많은 우려를 표명했다. (999.2)
 토머스 헬뤼즈(Thomas Helwys) 같은 침례교 청교도들은 유아 세례를 적그리스도의 배교에 연관 지었고 개신교 교회들에서 그것을 유지하는 관행은 개혁이 불완전하다는 증거라고 비난했다. 에드워드 스테네트(Edward Stennett)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제7일 안식일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주일 중 일곱째 날 준수의 회복을 옹호했다(Muller 167). 1650년대 중반까지 다수의 제칠 일침례교회가 잉글랜드에 설립되었다. (999.3)
 마찬가지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일부 청교도들이 성경 예언, 특히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연구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조세프 미드(Joshep Mede), 윌리엄(William Hicks), 존 네이피어(John Napier) 등은 이 두 책의 해석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그 안의 이상(異像)들이 시간 순으로 유기적이고 관련 있는 전체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Ball 193-212). (999.4)
 청교도는 궁극적인 이슈는 믿음과 실천에 있어서 누구에게 권위가 있는가 하는 문제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로마 교황권을 적그리스도라고 하였으며(그리스도의 반대자라는 의미에서), 당대의 사람들에게 로마가 톨릭교회에서 나오라고 권고하고, 종교 개혁의 해석을 이어나갔다. (999.5)
 E. 독일 경건주의 운동
 독일 경건주의의 창시자 중 하나인 17세기의 필립 야콥 쉬페너(Philipp Jacob Spener)는 당시의 생기 잃은 공적 개신교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자 하였다. 쉬페너와 그의 제자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교조적 정통주의를 배타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독일 루터교회에서 살아있는 신앙이 끊어졌음을 확신했다. (999.6)
 재침례파와 마찬가지로 쉬페너와 프랑케는 개혁을 논리적 결론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즉 성경에 묘사된 대로 초기교회의 가르침과 생활방식을 복원하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윤리적 모티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독립적인 견해와 평신도에게 교회 생활의 진정한 역할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에 대하여 루터교의 정통파에서 반대가 증가하였다. 루터교회의 개혁에 대한 쉬펜서와 프랑케의 열정은 개인 신자들의 내면적 종교 생활에 대한 주장과 함께 유럽의 개신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