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가 이스라엘에 오신 것은 신정주의,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국가로서의 유대 백성에게 극적인 시험이었다. 메시아로서, 나사렛 예수는 “걸림돌”이며,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롬 9:32, 33; 벧전 2:4-8)였다. (980.1)
 이스라엘과 야훼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분의 속죄의 희생에 대한 응답으로 결정되었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을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정의하셨다. 아들과 아버지 관계는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마 12:48-50).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안식을 얻기 위해 그분께로 나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참조 사 45:22);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마 12:30). (980.2)
 그리스도는 제일 먼저, 예언자들이 예고한 대로 약속된 메시아(마 10:5, 6; 15:24; 참조 렘 23:3-5; 겔 34:15, 16, 23, 24)인 그분 자신에게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모으기 위해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과 심판 아래 죽음을 당하는 그분의 사명에는 땅의 모든 민족에게 유익을 주려는 의도가 있음을 또한 선포하였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980.3)
 장래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모일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는 다음과같이 선언하셨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참조 사 56:8). 이 주장은 그분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믿는 믿음의 결정을 요구했다. 그분의 보편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12명의 사도들을 불러 모았다. 그 수를 볼 때, 그들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표한다. 자신에게로 부르시고 사도로 위임하신 12명의 제자들로 시작하여(막 3:14, 15), 그리스도는 새 이스라엘을 구성하였다. 그들은 메시아에게 속한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이었으며, 그분은 그들을 “나의 교회[에클레시아]”라고 불렀다(마 16:18). 이 새로운 유기체에게, 그 자체의 구조와 권위와 함께, 그분은 “천국의 열쇠”(19절; 참조 18:17)를 주었다. (980.4)
 유대 나라에 관한 그리스도의 최종 결정은 그분의 사역 끝 무렵에 내려졌다. 그때 유대 지도자들은 그분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메시아라고 하는 주장을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죄의 분량이 다 찼다고 알려준다(마 23:32). 그분의 선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였다. 이 엄중한 결정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아니며, 메시아와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들일 사람들로 대체될 것임을 함축한다. (980.5)
 그리스도는 세대주의 저자들이 선호하는 것처럼, 먼 훗날 유대인의 또 다른 “세대”에게 하나님의 왕국(신정 체제)을 약속하지 않았다. 모든 종족과 민족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동서로부터”(마 8:11, 12) 올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분의 교회(“나의 교회”, 마 16:18)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나라를 대신할 것이었다. (981.1)
 예수께서는 친히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누구인지 확인해 주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참조 22:29)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진정한 이스라엘이라고 분명히 확인한 것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그분의 양떼, 또는 양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로써 더욱 힘을 얻는다(사 40:11; 렘 31:10; 겔 34:12-14). (981.2)
 제자들을 불러 왕국을 받을 작은 무리를 이루게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핵을 형성하였다(눅 12:32).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약속과 의무를 유업으로 받을 신실한 이스라엘의 남은 무리로서 그분의 교회를 창조하셨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전체 유대 민족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신정 체제를 이스라엘 나라로부터 취하여 간 직접적인 결과로 모세가 레위기 26장신명기 28장에서 명시한 언약적 저주가 내렸다. (981.3)
 그리스도는 병아리를 세심하게 돌보는 암탉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대한 동경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들은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분은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37, 28)라고 다짐하셨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임할 그 도성의 끔찍한 미래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이 “보살핌을 받는 날”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적들의 손에 겪게 될 파멸을 그리스도께서는 묘사하셨다(눅 19:42-44). (981.4)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은 “그들이 보살핌을 받는 날”이었다. 유대 민족에게서 메시아가 거두어지는 것의 결과는 엄청났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신정 체제의 상실은 최후의 때까지 이를 것이다(눅 21:24; 살전 2:16).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충실한 남은 자인 자신의 적은 양떼에게 멸망의 도성에서 도망하라고 강력히 촉구하셨다(마 24:15-20; 막 13:14; 눅 21:20-24). (981.5)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의 국가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참된 언약 백성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메시아 왕이신 예수를 거부함으로써, 유대 민족 지도자들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결정적인 시험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열두 사도와 하나님의 언약을 갱신하셨다. 그는 고대 이스라엘을 불렀던 신성한 소명을 자신의 메시아적 양떼에게 부여하여, 세상의 빛이 되고(마 5:14)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게(마 28:19) 하셨다. 하나님은 만인을 위한 거룩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유대 민족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부한 것 때문에 그분의 계획이 좌절되거나 지연될 수 는 없었다. (981.6)
 베드로가 성령의 부어주심을 요엘의 말세에 대한 예언의 직접적 성취라고 해석한 것은(행 2:16-21) 교회가 구약에서 예상하거나 예측하지 못했던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오히려 그것은 요엘이 남은 무리에 대하여 예언한 것의 놀라운 성취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세운 계획의 사후적 고안이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메시아적 이스라엘로 나타난 거룩한 진보와 실현이다. (981.7)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에 부어진 직후에 베드로는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행 3:24)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관한 구약의 예언은 오순절 이후로 사도교회의 형성을 통하여 그 성취를 본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교회가 모든 시대를 거쳐, 특히 마지막 때에 사도적 신앙을 완전히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남은 무리에 대한 구약의 약속들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982.1)
 베드로는 소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던 당대의 그리스도 교회들을 이스라엘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로부른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후 2:9; 참조 출 19:5, 6). 사도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나타냈던 모든 사항이 이제 교회에 적용된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베드로의 교회론적 해석이다(출 19:5, 6). 이 적용은 메시아적 예언에 대한 기독론적인 해석의 산물(産物)이다. 교회론적인 적용은 기독론적 성취의 유기체적 확장일 뿐이다. 몸이 머리에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교회도 메시아에게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교회론적 해석은 이스라엘의 옛 언약에 있던 민족적 ·국가적인 한정을 완전히 제거한다 새로운 언약 백성은 더 이상 인종이나 국가의 유대가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특징지어진다. 이 사람들을 베드로는 영적 이스라엘, “거룩한 나라”라고 불렀다. (982.2)
 바울은 실제로 이방 땅인 갈라디아의 교회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이라고 부른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교회의 유대인 구성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지만, 이 서신의 역사적 맥락은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이방인 그리스도교인과 다른, 또는 그보다 높은 유대인 그리스도교인의 지위 또는 그러한 주장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침례 받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하나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갈 3:26-28).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이라는 바울의 표현은, 앞서 모든 그리스도인 신자를 일컬어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라고 묘사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982.3)
 사도는 교회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 이해를 에베소서에서 강력하게 확인한다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얻었으며 이스라엘과 동일한 소망 안에서 기뻐한다(엡 2:12, 13).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19, 20절). (982.4)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16절). 그는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 장벽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14, 15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세 율법을 폐지한 듯이 보이는 언급이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 메시아의 이스라엘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분의 목적은 “이 둘[유대인과 이방인]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이 목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실현되었으며(16절), 하나님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알려졌다(20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함께”라는 말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언약의 약속 안에서 완전히 평등하다는 것을 세 번 강조한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 분열의 벽을 재건하는 것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982.5)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 유대인 그리스도교인들과 유대인들에대하여 생겨나는 적대적인 태도에 직면해 있었다. 그런 반유대교를 그는 거부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안의 유대인과 이방인 파벌에게 어떤 우월성이나 특권을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롬 11:18, 25; 12:3).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은 믿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서신의 절정에 도달한다. 그는 이방인이 그리스도에게 회심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한 그루 감람나무에 야생 감람나무 가지를 접붙이는 것으로 묘사한다(롬 11:17-24). 이와 같이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과 그리스도의 교회와 맺은 그분의 새 언약의 영적 연합과 연속성을 가시화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이방인들은 합법적으로 감람나무, 즉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편입되고 아브라함의 뿌리를 공유한다(18절). 로마서 11장의 감람나무 재배의 비유가 주는 교훈은 구약 이스라엘의 뿌리와 몸통에 연결되어 교회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17, 18절).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바울의 특별한 부담은 민족적 이스라엘에 관한 하나님의 “신비”의 계시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25, 26절). (983.1)
 바울이 여러 세대가 순서대로 연속되는 것을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많은 이방인들의 구원에 많은 유대인이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보았다.그리고그는그일이 “지금” 일어나는 것을본다. “너희[이방인 그리스도인]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유대인이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0-32절). (983.2)
 바울은 모든 이방인이 구원받는 방법 말고는 달리 유대인이 구원받을 방법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가 부활하신 이스라엘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이다(롬 10:9, 10).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조건을 분명히 말한다;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롬 11:23).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의 혈연관계를 믿고, 따라서 하나님의 종말적 축복이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었다고 기대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었다(참조 마 3:7-9; 요 8:33, 34). 이스라엘이 민족적인 이점(利點)을 자랑하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참조 롬 2:25-29) 사도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2, 13)고 선언한다. (9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