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의 결혼 언약 제 3 장 결혼과 성(性) 2. 성의 성서적 개념
 신약은 성을 사람의 전체 인격과 연관지어 동기를 더욱 강조함으로 구약을 능가하였다. 예수께서는 배우자 외에 타인에게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을 범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마 5:27-28). 죄는 외부의 행동뿐만 아니라 내적 생각 곧 성서가 말하는 마음으로 부터 오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 15:19-20). (105.1)
 성교의 난잡함은 신약 시대의 그리스-로마 세계에 편만하게 유행하였다. “음행”의 모든 형태를 멀리 삼가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교회에 이방인들을 포함시키기 위하여 열렸던 예루살렘 총회의 여러 안건들 중 하나가 되었었다(행 15:21, 29). (105.2)
 사도 바울은 그의 한 서신에서 그가 이방인들을 개종시킬 때가 졌던 어려움을 말하는데 곧 그들의 성적 불결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기록한다.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살전 4:2-5). 여기서 바울은 강한 성욕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는 일시적인 관계에 들어가지 말고 영원한 결혼 관계로 들어감으로 만족함을 가지라고 교훈한다. 그런 관계는 “거룩함과 존 귀함”으로 특정지어진다. (105.3)
 바울은 매우 분명하게 음행을 정죄한다. 그는 성교를 축제화까지 했던 성교의 중심지에 살았던 지중해의 고린도 교회에게 묻는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 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 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6-20). (106.1)
 정죄의 이유들
 위의 구절(고전 6:16~20)에서 바울은 왜 성경이 혼외의 성교를 강력히 정죄하는지를 말하며 우리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성은 전적으로 헌신한 “한 몸”의 연합으로 표현되는, 모든 인간 상호교제에서 가장 친분이 두터운 친교로 나타난다. 그와 같은 서약의 연합은 관심이 그저 상업적이고 오락적인 음녀와 갖는, 되는 대로의 성적 연합으로 표현되거나 경험될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성적 결합에서 경험으로 하나 된다는 것은 오로지 음탕한 한 몸이 될 뿐이다. (106.2)
 음행은 다른 어떤 죄보다 개인에게 더욱 깊이 그리고 영원히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심각한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자기 몸 안에 짓는 죄로 묘사한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 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게걸스럽게 먹거나 술취함 같은 모든 호색의 죄들은 사람의 몸 안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들은 음욕의 죄만큼 인격에 영원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먹거나 마시는 데 탐닉하는 것은 극복 될 수 있고, 훔친 물건은 되돌려 줄 수 있고, 거짓말은 취소하거나 진실로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한 번 범해진 성행위는 원상복구를 할 수가 없다. 결코 원상복구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한 부부 상호의 관계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철저하게 일어나야만 한다. 때때로 그들 두 사람에게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어떤 것이 찍혀질 수도 있다. 음녀와의 성교도 그 영원한 흔적을 남긴다. 그 것은 지울 수 없는 양심의 오점으로 남는다. (106.3)
 “부도덕한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한다.” 이 진리는 결혼 전의 성교를 죄악시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공공연하게 거절될 수 있으나, 결혼 생활에서 성교를 조절함으로 만족하려는 자에게는 도움이 된다. 어떤 자들은 심지어 결혼하기로 결정한 자와의 성교는 성적 적합성을 보중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그런 태도는, 혼전의 성관계는 결혼을 위한 최악의 준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인데 그와 같은 이유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107.1)
 서약 없는 성
 우선, 혼인 전의 성교는 서약이 없는 것이다. 그때는 만약 배우 자를 싫어하면 바꿀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와 같은 되는 대로의 관계는 인간적 만족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는 목적을 저하시키므로 인격의 고결성을 파괴한다. 성교 후에 마음의 상처를 느끼는 자들은, 재차 행함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그 행위를 그만두거나, 다른 사람의 감정에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저들의 육체를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어떤 경우든지 상처를 주고 왜곡된 성교는 사랑하는 자에 대하여 진정하고 친밀하게 관계를 갖기 위해 사용해야 할 가능성을 망치기 때문이다. 성교가 한 번은 한 짝과 재미를 즐기는 수단이 되고, 다른 때는 다른 짝과 진정한 사랑과 서약을 표하는 방법으로 사용될 수는 없다. 성교를 나눌 다양한 대상을 갖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결혼 배우자에게 성교를 통하여 전적 헌신과 최후의 친교를 표현하기가, 불가능은 아니지만,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07.2)
 약혼한 부부가 잠자리를 함께 할 때 그들이 서로 진정한 서약을 표현하지 않은 것을 아마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온전히 그리고 최후로 서로에게 헌신하였더라면 그들은 결혼을 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약혼은 결혼을 위한 준비이지 결혼은 아닌 것이다. 결혼 서약을 할 때까지 관계가 깨질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만약 한 쌍이 성교를 즐겼다면 그들은 그들의 관계를 서로 양보하며 해결해야 한다. 뒤따라 일어날 파약은 영원한 감정의 손상을 남길 것이다. 우리가 성관계를 통하여 관계에 인을 칠 수 있는 것은 말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배우자에게 책임을 지고 오직 기꺼이 하나 되고자 할 때뿐인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성교는 궁극적인 혼신의 서약이며 최후의 친교라고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 (108.1)
 결혼증서와 결혼식은 단지 형식이 아닌 결혼 서약을 이루는 방 편이다. 아크테마이어(Elizabeth Achtemeier)는 설명한다. “그들의 연합에 법적으로 인을 치기 위하여 서두르는 그런(동거하는) 젊은 이는 서로의 서약이 전적으로 된 것이 아닌 것을 증거한다. 결혼 증서와 예식은 법적 형식뿐만 아니라 또한 책임의 상징도 된다. 그들은 공중 앞에서 그들이 사적으로 확신하는 것을 숨김없이 말했다. 나는 나의 짝에게 대한 책임이 있다.—모든 사랑의 감정과 결혼 생활의 영적인 면뿐만 아니라 금전, 건강, 보험, 그리고 재산 같은 복잡하게 들끓는 세상의 모든 일에도 또한 책임이 있다. 예를 들면, 그저 함께 동거하던 두 사람은 한 사람이 다가오는 회계 감사를 위한 납세자 명단에 있든지, 다른 사람이 교통 사고를 내서 법정에 출두하든지 서로에게 아무런 의무가 없다. 그러나 결혼 증서를 가진 사람들은 결혼 그 자체의 책임을 가지며 결혼에 서약함으로 공동책임을 받아들인 것이다. 곧 사회가 공동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성년들에게 부과하는 의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14 (1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