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5 장 재림소망의 절정
 우리는 평화와 조화 그리고 물질적 번영과 최초의 안식일—아담이 창조된 후 첫날—의 광경이 구약 시대에서 어떻게 장차 올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의미인 마지막 날의 본보기로 그 역활을 감당하고 있는지를 다른 연구를 통해 보았다.23 아담과 동물 사이에 있던 평화와 조화는 세 세상에서 회복될 것이며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릴”(사 11:6) 것이다. (313.4)
 유사하게 창조 때의 번영과 풍요로움은 새 땅에서 회복될 것이며 “그 때에 밭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르며 산들은 단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암 9:13; 사 4:2, 30:23~25; 욜 3:18; 습 3:13). 이 묘사들은 새 세상에서 실제적이고 풍요로운 “지상적” 생애에 대한 모습을 전달해 준다. (313.5)
 도시 생활. 신약은 현세의 세상과 앞으로 올 세상의 생활 사이에 있는 연속성을 동일하게 강조한다. 새 세상의 연속성과 현실성을 알려 주는 데 사용된 가장 강력한 인상은 아마도 도시에 대한 인상이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 11:10)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경험은 모든 믿는 자들의 경험을 표상하였는바 그 이유는 동일한 저자가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4)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313.6)
 신약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묘사로 끝을 맺고 있는바 그 성에는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계 21:27)만이 환영을 받는다. 도시에 대한 모든 상세한 것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왜 거룩한 성이 높은 벽을 가지고 있어 그 벽 너머에 있는 놀라운 정경들을 시민들이 보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가? 분명히 그 높은 벽에 대한 이상은 요한과 자신의 동료들에게 완전한 안전의 보증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날에는 더 높은 성에서 거민들이 더욱 평안한 잠을 밤에 즐길 것이다. (314.1)
 비슷하게 열두 족속의 이름이 열두 대문에 기록된 것과(계 21:12) 그리고 열 두 제자들의 이름이 열두 기초석에 기록된 것(14절)도 신약과 구약의 모든 지역 사회로부터 온 믿는 자들로 구성된 거룩한 성의 시민들을 암시한다. 모든 세밀한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거룩한 성의 계시는 하늘 은신처에서 신비로운 은둔 생활의 모습이 아닌 이 새로운 지구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도시 생활의 모든 모습을 전해 준다. (314.2)
 활동적이고 흥겨운 생활. 거룩한 도성에 대한 성경의 이상은 새 땅에서의 생활이 격리되고 고독한 생활이 아니며 교통하며 흥겹고 또 활동적인 생활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새 땅은 복잡한 국제적인 장소가 될 것이며 인종과 문화 그리고 언어가 다른 모든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며 함께 일할 것이다. 생활은 단조롭거나 지루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양하고 창조적이 될 것이다. (314.3)
 셜리 구트리에(Shirley C. Guthrie)는 “새 예루살렘은 일률적이지 않은 공동 사회가 될 것이며 또 무책임하지 않는 개인 집단이 될 것이다. 개인적인 권리와 공동 사회의 복지 문제는 사랑으로 연합되어 자발적으로 책임을 이행하는 사람들로 된 민주국가에서 공동 사회는 개인을 돕고 또 개인은 공동 사회를 도울 때에 해결될 것이다”24라고 기록하고 있다. (314.4)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도성에서 서로 관련을 맺고 또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창조와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의 성취를 나타낸다.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단지 사는 것만 아니고 함께 순응하여 지구를 다스리며 활동하므로 그러한 것들이 성취되기를 의도하셨다. 구속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동료들에게 화목시키므로 한때 원수로 간주되었던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하셨다. (314.5)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도시 생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도성이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도시 생활의 구조를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것으로 보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지금의 도시들이 하나님의 도성을 거의 반영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견해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와는 반대로 도시들은 하나님과 이웃들을 향한 증오, 적개심 그리고 무관심이 편만한 장소이다. (314.6)
 도시 생활의 지금의 상태가 우리들로 하여금 중요한 도시화의 모습을 죄된 사회 구조로 거절해 버리도록 해서는 안 된다. 도시 생활이 새 땅에서도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사회, 경제, 생태, 정치, 인종적 문제를 유발시키지 않고 서로 관련을 맺고 또 서로 의지하는 복합적인 도시 제도 속에서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 것임을 우 리에게 말해 준다. 더 나아가 장차 하나님의 도성에서 함께 사는 이 이상은 그리스도인들이 혼탁한 도시를 등지고 시골로 도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영향을 끼치면서 도시 안에서 또 도시를 위해서 일하므로 많은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우리가 도전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한다. (314.7)
 4. 새 땅의 생활을 예상해 봄
 실재에 대한 윤곽. 새땅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말하는 주요 성경 구절들(사 65:17~25, 66:22, 23; 계 21:1~22:5)은 단지 우리에게 그곳에서의 생활이 실제로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지극히 적은 윤곽만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생활과 환경을 구체화하려는 어떤 시도나 장차 올 세계에 대한 추구는 지극히 제한된 것이며 또한 그 실제를 묘사하려는 노력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고전 2:9)한 것으로 불완전한 것이다. (315.1)
 성경 기자들로 하여금 지옥보다 천국을 묘사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도록 하는 것은 새 땅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밀턴의 복락원(Paradise Regained)은 실락원(Paradise Lost)의 힘과 실제에 대한 지극히 희미한 반영에 불과하다. 지옥(Inferno)에 대한 현실성과 생생함이 결여되어 있는 단테의 낙원(Paradise)에서도 그것은 역시 마찬가지이다. 새 땅에서의 생활에 대한 제한된 하나님의 계시에서 우리는 성경에 의해 제시된 의미 심장한 몇 가지의 국면만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315.2)
 하나님의 임재. 새 땅에서의 생활의 가장 독특하고 우선적인 국면은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전례 없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이와 비슷한 말씀들이 하나님의 자비의 언약에 중심이 되는 약속들로서(창 17:7; 렘 31:33; 히 8:10 참조) 새 땅에서 충분히 실현될 것이다. (315.3)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비유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존재란 표현으로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운명을 자신이 친히 신랑(마 25:1~13)이나 임금(마 22:1~10)이 되실 곳인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으며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주인이 되셔서 자신의 신실한 종들에게 보상을 주시기 위해 돌아오셔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 눅 12:35~38 참조)라고 말씀하실 것에 비유하였다. (315.4)
 새 땅에 하나님께서 실제로 임재하시므로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계 21:23). 이 구절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 땅과 새 하늘이 인간이 거하는 지구와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통합될 것임을 지적한다. (315.5)
 믿는 자들은 새 땅에서 아담과 하와가 매 안식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방문하셨을 때 경험했던 똑같은 복스런 교제를 즐기게 될 것이다. 타락이 복스런 교제를 끊어 놓았지만 안식일은 미래의 회복을 신자들이 기억하도록 남아 있었다(히 4:9). 우리의 매주일의 안식일 축제는 새 땅에서 하나님과의 미래의 교제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함양시킨다.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안식할 때 볼 것이며, 우리가 봄으로 사랑하게 되고 우리가 사랑할 때 찬양하게 될 것인바 바로 이것이 영원한 날에 있을 최고의 안식일”이 될 것이다.25 (315.6)
 모든 믿는 자들과 교제함. 우리가 삼위일체와 함께 즐기게 될 교제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대 세계 모든 곳에서 온 믿는 자들과 교제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오늘날은 단지 우리의 시대에 직접 우리 주위에 있는 자들과만 교제를 나눌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새 땅에서는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서 살았던 부조들, 선지자들, 제자들, 순교자들, 선교사들, 개척자들, 우리의 조상들과 후손들 그리고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까지 우리의 교제가 확장될 것이다. (316.1)
 이 웅장한 교제는 어린양의 큰 혼인 잔치로 상징되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은 복이”(계 19:9) 있는 자들이다. 이 교제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가 포함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았던 위대한 인물들과 개인적 교제를 함으로 얻을 수 있는 영감과 정보를 추측하기란 불가능하다. (316.2)
 악이 없음. 지금의 우리의 생활과 새 땅에서의 생활 사이에 있는 가장 주목할 만한 차이는 우리의 생활을 제한시키거나 해롭게 하는 모든 것들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형태의 악의 궁극적 원천이 되는 마귀는 불못에서 파멸될 것이다(계 20:10). 결과적으로 우리의 안과 주위에 더 이상의 악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의 증오, 질시, 두려움, 적개심, 차별 대우, 기만, 압제, 살상, 과열 경쟁, 정치 경쟁, 인종 분규, 경기 침체, 기아, 빈부의 불균형 또는 질병과 사망들이 존재하지 않을 새 세상에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3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