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5 장 재림소망의 절정
 그리스도의 재강림의 궁극적인 결과는 이 세상을 본래의 완전한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다. 믿는 자들의 부활과 변화 마지막 심판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의 부활과 멸망, 이 모든 것들은 구속사의 마지막 행위인 “새 하늘과 새 땅”(계 21:1; 벧후 3:13)의 창조를 인도하는 예비적 사건들이다. (310.4)
 창조와 구속의 목적은 죄의 결과가 모든 창조물로부터 제거되어 새롭고 완전한 질서가 하나님에 의해 설립될 때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실락원(Paradise Lost)이 복락원(Paradis Restored)이 될 때에서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목적이 충분히 실현될 것이다. (310.5)
 새 땅은 구약 약속의 성취임.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가 우리의 대대의 거처가 될 것이라고 창조 때에 인류에게 약속하셨다(창 1:28). 죄의 결과로 우리의 첫 부모들은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되어 저주 아래 있는(창 3:17) 지금의 지구로 쫓겨났다. 그러나 타락한 후 하나님께서 즉시 설정하신 마지막 승리의 약속은(창 3:15) 새 땅에서의 복락원에 대한 명백한 보증이 담겨져 있다. (311.1)
 같은 보증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 속에도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8).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에게도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라. 그러나 이 약속은 분명히 아브라함 자신에게는 결코 성취되지 않았는바, 그 이유는 그가 가나안에서 소유하고 있었던 땅은 당시 헷 족속(창 23장)으로부터 구입한 묘실이었기 때문이다. (311.2)
 구약 약속의 확장.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상속에 대해 더 큰 성취를 내다보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소개한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 11:10). 아브라함이 내다본 “성”은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인 바 세대주의자들이 가르친 것처럼 유대인들이 모든 팔레스타인 땅을 회복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상속할 세계를 건설하실 때이다. (311.3)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단지 가나안 땅만 아니라 “새 세상의 후사”가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것을 제시하고 있다(롬 4:13). 땅에 대한 같은 넓은 개념이 그리스도의 팔복 가운데서도 볼 수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고요하고 평화로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약속은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다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새 땅의 모형이 된다(히 4:9). 그러므로 새 땅은 당신의 백성에게 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성취를 나타낸다. (311.4)
 현재의 땅의 파멸인가? 재생인가? “새 하늘과 새 땅”이란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현재의 우주가 완전히 파멸된 다음, 하나님께서 지금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실 것이라는 뜻인가? (311.5)
 상당히 많은 신학자들은 현재의 지구가 완전히 파멸되고 전혀 새로운 세계가 된다는 개념을 선호한다. 설득력이 있는 구절로서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311.6)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죄의 영향에 대해 그분의 마지막 심판을 집행하실 때 대격변의 사건에 의해 지구가 완전히 변화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한 소멸이나 파멸의 개념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이 지구의 재생과 회복의 개념을 지지한다. 중요한 네 가지 이유가 주어질 것이다. (311.7)
 2. 지구를 다시 새롭게 하는 이유들
 새 기원이 아닌 질의 갱신. 첫째, 베드로후서 3장 13절요한계시록 12장 1절에서 이 세상이 새롭게 되는 것(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된 헬라어는 카이노스(Kainos)이며, 네오스(neos)가 아니다. 이 두 용어 사이에는 의미 심장한 차이가 있다. J. 벰(J. Bebm)은 네오스“때나 혹은 기원에 있어서 새 것이며”, 카이노스는 성격에 있어서 새 것으로서, 통상적인 느낌과는 다르고, 옛 것보다는 낫고, 가치나 혹은 매력에 있어서 우월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이란 표현은 현재에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광스럽고 새롭게 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새로운 우주의 창조를 의미한다. (312.1)
 카이노스의 뜻에 대한 좋은 예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발견되는데 바울은 기록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카이노스)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카이노스)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개개인의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변화되므로 새로운 피조물 또는 창조물이 되는 것과 같이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정결하게 되고 또 회복되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새로운(new)” 이란 말은 옛 것에서 계속된다는 뜻을 견지하고 있다. (312.2)
 쇠퇴로부터 해방됨. 이 세상의 파멸보다는 재생을 선호하는 두번째 이유는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고 한 바울의 진술이다. 바울이 이 세상의 궁극적인 회복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창조물이 새롭게 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며, 이 세상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완전히 다른 어떤 창조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312.3)
 몸의 부활. 세번째 이유는 믿는 자들의 부활한 몸에 의해 제시된 연속성(continuity)이다. 성경은 몸의 부활을 새로운 인간의 영혼 또는 영을 창조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 형태와 새 땅의 형태 사이에 분명한 연계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만약 이것이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도 진리라면 인간외의 창조에 있어서도 동등하게 진리임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우리가 가지게 된다. (312.4)
 사단의 패배. 파멸보다는 재생을 선호하는 네번째 이유는 파멸은 사단의 승리를 나타내며 하나님에게 있어서 승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토니 훼케마가 적절히 설명한 것처럼 “사단은 지금의 우주와 땅을 처참하게 부패시키는 데 성공해 왔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부패를 전적으로 제거하는 데 속수 무책인 것처럼 보여 왔다. 그러나 사단은 그렇게 하는 데 승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사단은 결정적으로 패해왔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인류를 기만한 이 지구를 새롭게(renew)하시고 최종적으로 모든 사단의 사악한 음모의 결과를 그 땅으로부터 추방시킬 때 그 패배의 모든 국면을 충분히 드러내실 것이다.”21 (312.5)
 현재의 지구가 새롭게 되는 것이 실제로 내포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상실된 것으로 단념하고 그 퇴락을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마지막 때에 그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세계를 개선(betterment)하기 위해 일해야만 한다. 우리의 사명은 구별된 그리스도인 생활 양식을 발전시키고 증진시켜서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내세를 위해서도 가치 있도록 하는 것이다. (312.6)
 3. 새 땅에 대한 성서적 견해
 새 세상에 대한 잘못된 개념. 엘렌 G. 화잇은 “장래의 유업이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처럼 생각되는 일을 염려하여 우리의 본향을 바라보게 해주는 바로 그 진리를 신령적으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두려움은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장차 올 세계를 구속받은 영혼들이 끊임없이 노래하고 기도할 우주 공간 어느 곳에 있는 영적인 은신처로 믿도록 인도한다. 이런 잘못된 개념은 잘 알려진 찬송가의 가사에서조차 반영되어 있는 바 그 하나는 “영광과 한없이 즐거운 맨션에서 찬란한 하늘에 계신 당신을 영원히 경배 하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313.1)
 우주 공간 어느 곳에 있는 영계(靈界)에서 흰 옷을 입고 하프를 치며 찬송하고 명상하면서 영원한 날을 보낸다는 사상은 거대한 도시의 경치와 소리를 사랑하는 20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의 흥미는 거의 끌 수가 없다. 우리는 제12장에서 이런 새 세상에 대한 잘못된 개념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이 지구에서 그들의 실제 생활의 끝으로 보게 된 이후, 그리스도의 재강림에 대한 기대감을 꺾어버리는 데 기여해 온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것을 보았다. (313.2)
 성서적 실재론(realism). 공간 어느 곳에 있는 하늘 영적 낙원(spiritual paradise)에 대한 광경은 성경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헬라 철학에 의해 고무된 것이다. 구약과 신약 모두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 계 21:1)을 공간 어느 곳에 있는 전혀 딴 세상이 아닌, 그 원래의 안전함으로 새롭게 되고 변화된 지금의 하늘과 땅으로 말한다. (3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