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5 장 재림소망의 절정
 현재의 몸을 복위(復位)하지 않음. “몸의 부활”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성경 기자들은 아마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육체적 몸의 복위를 뜻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첫째 이유는 많은 몸들이 병약하거나 흉하게 되기 때문이며, 둘째 이유는 사망할 때 그 몸들은 분해되어 흙으로 다시 돌아가기 때문이다.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 104:29; 전 3:20; 창 3:19). (307.2)
 이러한 성서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죽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똑같은 분자들로 부활한다는 것을 믿어 왔다. 이 신앙은 사도 신경(Apostles Creed)의 최초의 형태 속에서 표현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몸”(body)의 부활보다는 오히려 “육체(flesh)의 부활을 내가 믿노니”라고 진술한다.15 (307.3)
 라틴 기독교의 교부로 알려지는 터툴리안(c. 160~c. 225)은 육체의 부활이라는 자신의 논 문에서 아주 길게 하나님께서 “땅 속에 위탁된 바로 그 육체”를 부활시키실 것이라고 논증한다. 그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것들 모두가 다 부활 때에 회복될 것이라고 호소한다. 터툴리안은 “만일 그것들이 잃어진 바 되어야 한다면, 그것들에 대한 숫 자적인 관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며 이론을 제기한다.”16 (307.4)
 몸은 사람을 뜻함. 부활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는 성경 기자들에게 있어서 “몸”이란 단순히 “사람”과 동의어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므로 해결되어진다. 예를 들어 바울이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롬 8:23)라고 기록할 때, 단지 그는 우리의 전(全) 존재의 구속을 뜻하고 있다. 이 의미는 바울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호소하고 있는 같은 편지서의 후반에서 입증된다. 여기서 우리의 “몸”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분명히 우리의 전(全)존재(total being)를 통해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정의된다. (307.5)
 개성의 보존. 바울의 몸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는 분명히 전인(全人)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마이클 페리(Michael Perry)는 “바울의 용례(用例)에서 ‘몸’은 사람 자신에 대한 ‘어떤 외적인 것’이 아니고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그가 어떤 존재인가(is)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쏘마(soma—몸)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인 ‘인격’(personality)과 가장 가까운 말이다.”17라고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의 관점에서 볼 때, 몸의 부활과 변화를 믿는 것은 내 자신의 인격을 믿는 것을 뜻하며 또 “나(I)”라는 존재가 다시 생명으로 회복되리라는 것을 믿는 것을 뜻한다. 나는 절대적으로 내 자신(myself)일 것이다. 줄여서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에게 나의 개체(individuality), 인격(personality) 그리고 개성(character)을 보존하시도록 위탁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307.6)
 미래의 인격이 지금 형성됨. 위에서 정의한 대로 몸의 부활과 변화에 대한 신앙의 실제적인 적용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강림하실 때 우리의 몸과 함께 우리의 독특한 인격과 개성을 각자에게 회복시킴으로 우리 모두를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은 엘렌 G. 화잇이 적절하게 진술한 것처럼 “금생에서 형성된 품성이 장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18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녀가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개발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우리는 여기서 와 더 나은 생애의 유용성을 위해 품성을 함양해야 한다.”19 (308.1)
 우리의 몸에 대한 관심. 몸의 부활과 변화를 믿는 것은 역시 우리의 몸을 귀하게 취급한다는 뜻도 있는바, 그 이유는 몸에 대하여 또는 몸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부활한 몸의 형체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사용한 씨와 열매의 예는 우리의 현재의 몸과 부활한 몸 사이에 어느 정도 연속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연속성은 자신들의 몸을 하늘 가나안에 도달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세속적인 어떤 것으로 경멸하는 자들의 지나친 금욕주의를 정죄하고 있다. 또한 무슨 일이 몸에 일어나든지 간에 자신의 영혼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그들의 몸을 스스로가 방종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의 자유주의 사상도 정죄한다. (308.2)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을 알아봄. 몸의 부활과 변화를 믿는다는 것은 역시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부활하여 변화한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 반드시 그들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똑같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나를 그녀의 농장 주택을 방문했을 때 한 꼬마아이로 알고 계셨다. 25년 전에 많은 곱슬 머리칼을 가지고 결혼한 나의 아내는 나를 대머리의 남자로 알고 있다. 만약 주님께서 돌아오시지 않으셨다면 손주들은 나를 자주 기억하고 있던 늙은 사람으로 알아볼 것이다. (308.3)
 부활하고 변화될 때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젊거나 또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그들을 보았을 때처럼 늙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독특한 개성과 인격이 하나님에 의해 조심스럽게 보존되어 부활되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국민학교나 또는 고등학교의 친구들을 20년 혹은 30년 후에 만날 때 우리는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의 외모가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는 것으로 인해 크게 놀라는 일이 비일 비재하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얘기를 나눌 때 곧 그들의 독특한 인격들이 실제로 바뀌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여러 해 전에 알았던 마리아, 요한 또는 보브이다. (308.4)
 똑같은 법칙이 부활한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아보는 데도 적용된다. 우리들은 그들의 신체적인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바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독특한 인격과 개성을 부활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한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몸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영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전인(全人)을 철저히 다루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 성령의 전”(고전 6:19)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재강림 때에 기적적으로 부활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309.1)
 3. 마지막 심판
 재림에 수반되는 것. 위에서 논의한 신자와 불신자의 부활은 마지막 심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바, 그 이유는 부활이 심판을 가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13장에서 마지막 심판이 분명히 성경에서는 재림에 수반되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주요 목적은 결정적으로 최종적이고도 영속적인 방법으로 악을 처리할 마지막 심판을 집행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 진리를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마 25:31, 32) 하리라는 말씀에서 제시하셨다. 이 구별의 결과로 악한 자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갈”(마 25:46) 것이다. (309.2)
 바울은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동일한 근본적인 진리를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 2:6~8). 이와 같은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재강림의 근본적인 역할이 모든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고 새 세상으로 인도할 최종적이고도 우주적인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309.3)
 평가 국면과 집행 국면. 우리는 제14장에서 마지막 심판의 집행 국면이 평가 국면 뒤에 따른다는 것을 보았다. 두 국면이 성경에서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은 것은 이미 본 것처럼 성경 기자들에게는 마지막 심판의 사실(fact)이 그 심판의 국면(phase)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심판이 평가 국면(evaluative)집행 국면(executive)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제시하는 여러 성경 구절들을 발견했다. 집행 국면은 그리스도께서 재 강림하실 때 먼저 살아 있는 성도들과 부활한 성도들은 영생의 선물로 보상하실 것이며 또 살아 있는 죄인들은 멸망시키실 것이다(살후 1:7~9). 그리고 두번째로는 천년이 지난 뒤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시대의 부활한 불신자들을 영원한 죽음으로 형벌하실 것이다(“둘째 사망”계 20:6, 14, 21:8). (309.4)
 평가 국면은 재림 전과 후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재림 전 심판과 재림 후 심판으로 이름을 붙였다. 이 두 심판은 모두 보상이나 형벌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집행 행위 이전에 있는 사법적 절차를 포함하고 있다. 이 둘은 모두 도덕적 존재자들로 하여금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다른 사람들은 정죄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평가하여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둘 모두는 지성을 가진 도덕적 존재자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309.5)
 두 결과들. 마지막 심판의 재림 전 평가 국면과 재림 후 평가 국면 사이에 있는 차이점은 근본적으로 그것들의 결과에 달려 있다. 우리가 제14장에서 본 것처럼 재림 전 평가 심판은 타락하지 아니한 하늘 거민들 앞에서 거행되며, 또 부활한 성도들과 살아 있는 성도들을 영생의 선물로 보상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신다. 다른 한편으로 재림 후 평가 국면은 구원받은 사람들 앞에서 행해지며, 천년 후에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으로 내려오셔서 부활한 악인들을 영원한 사망으로 형벌하시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신다. (310.1)
 마지막 심판의 궁극적인 결과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첫번째는 자신의 재림 때에, 그 후는 천년기의 끝에 집행되어 의인들에게는 영생을 그리고 불의한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주어진다. 이러한 마지막 심판에 대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교도들은 성서가 이 사건에 대해 통일성과 종국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고양시키고, 재림에 대한 우리의 기대감을 강화시킨다. (310.2)
 신뢰의 근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결정적이고도 최종적인 승리인 마지막 심판에 대한 성서적 견해는 신자들을 옹호하고 구원하며 또 불신자들을 정죄하고 멸망시키기 위해 그분의 강림 때와 그리고 그 후에 있을 그리스도에 의한 집행 심판으로 우리에게 확신과 신뢰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선과 악 사이에 현재의 쟁투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강림의 때에 최종적이고도 결정적인 방법으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재확신시킨다.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롬 2:16)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뢰하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금생에서 능히 우리를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심판의 날에 “그 영광 앞에 흠이 없고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유 24)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이 우리로 하여금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딛 2:12)도록 영감을 주어 촉구하고 있는바,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해 오실 때 그분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자는 자라야”(마 7:21) 천국으로 초청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310.3)
 제 3 부 그리스도의 강림의 결과
 1. 이 세상의 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