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5 장 재림소망의 절정
 바울은 더 나아가 성경에 나오는 부활한 몸에 관한 말씀에 대해 가장 가까이 있는 물질을 제시하기 위해 파종과 수확의 유추법을 발전시켰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2~44). (303.4)
 부활한 몸의 특성
 대조되는 네 가지. 고린도전서 15:42~44에서 바울은 우리의 현재 몸과 부활한 몸 사이에 있는 차이를 4가지의 대조 수단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대조는 그리스도의 재강림때에 변화되어 승천할 산 성도들의 몸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첫째, 우리의 현재의 몸은 질병과 사망에 따라 썩을 수 있으나(파쏘라—pathora) 우리의 부활한 몸은 질병이나 사망에 더 이상 복종하지 않고 썩지 아니할(아프탈시아—aphtharsia) 것이다. 둘째, 우리의 현재의 몸들이 무덤 속에 놓여지는 욕됨(dishonor)을 경험하지만, 우리의 부활한 몸은 안과 밖의 변화되는 영광(glory)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303.5)
 셋째, 우리의 현재의 몸들은 쇠약(weak)하여 쉽게 피곤하고 쇠잔하지만, 우리의 부활한 몸들은 충분히 강하게(power)될 것이다. 넷째, 우리의 현재의 몸들은 (肉一soma psychikon—소마 프쉬키콘)이지만 우리의 부활한 몸들은 신령한(soma pneumaticon—소마 프뉴마티콘) 것이 될 것이다. 이 마지막 대조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부활한 몸, 곧 변화된 몸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영적”인 것이 될 것이며 현재의 신체적 본질에 있는 결핍이 사라질 것을 믿도록 한다. 다른 말로, “영적”이란 신체적인 것의 반대로 이해된다. 이리하여 부활한 몸 곧 변화된 몸은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비(非)육체적 비(非)물질적 요소로 구성이 된다는 것이다. (304.1)
 부활한 “영”의 몸. 바울은 재림 때에 산 자나 죽은 신자들이 전적으로 신체적 물질이 배제된 비물질적이고 비신체적인 몸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으며 또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만일 자신의 편재의 더 큰 배경 속에서 점검하지 않는다면 이 구절 속에 있는 바울의 말은 독자들로 하여금 부활한 몸의 비물질적 견해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견해는 무엇보다도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 사이를 대조하는 것에 의해 신임을 받지 못한다(골 1:18; 고전 15:20). (304.2)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 시라면, 부활한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비슷한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성육신 동안(빌 2:7)에 일시적으로 제쳐놓았던 신성을 회복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러한 비교를 극단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만짐을 당하시고(요 20:17, 27) 또 음식을 드셨(눅 24:38~43)기 때문에 그분의 부활한 몸은 분명히 육체적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똑같은 두 단어(육적—프쉬키코스/영적—프뉴마티코스)를 같은 편지서에서 더 많은 말로 사용하고 있다. (프쉬키코스—psychikos)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신령(프뉴마티코스—pneumatikos)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4, 15).12 (304.3)
 이 구절에서 신령한 사람이란 분명히 육체가 없는 사람(nonphysical person)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은 육적인 충동에 의해 지도를 받는 얻는 사람과는 상반되는 성령에 의해 지도를 받는 사람이다. 유사하게,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 묘사된 현재의 육적인 몸은 죄와 사망의 법에 종속된 사람이며, 한편 미래에 부활할 몸은 성령에 의해 지도를 받을 것이다. 이러므로 부활한 몸이 “영적”으로 불려지는 이유는 그 몸이 육욕적 충동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성령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다. (304.4)
 영(靈)이 인도하심. 이 통찰이 우리에게 후에 나오는 바울의 몇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나니”(고전 15:50). 여기서도 바울은 부활한 몸이 비육체적일 것이라고 말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이 명백한데, 그 이유는 그가 로마서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롬 8:9)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05.1)
 “육신에 있지 않고”라는 구절에 의해, 바울은 분명히 성령에 의해 이끌림을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그들의 육적인 몸을 버렸다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들이 세속적 가치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가치관에 의해 인도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했다(롬 8:4~8). 비록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이 현재의 상태에서 이미 “육신 속에” 있지 않는 것으로 말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왕국에 “혈과 육”이 없다는 언급은 신체적인 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순히 현재의 생애에서 육신적이고 육욕적이며 또 죄악적인 경향성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바, 그 이유는 구속받은 자들은 성령에 의해 완전히 인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305.2)
 신체적인 몸은 악하지 않음. 만약 하나님께서 재림 때에 우리의 현재의 육체적인 몸을 비 신체적이고 비물질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몸으로 변경하신다면 안토니 훼케마(Antony A. Hoekema)가 지각력 있게 지적한 것처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셨었던, 신체를 지닌 인류를 신체 없는(천사와 같이) 다른 종류의 피조물로 불가불 변경하실 수밖에 없으실 것이므로 마귀는 대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물질은 근본적으로 악하게 되었기 때문에 추방되어져야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 있어서 헬라 철학자들이 옳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그러나 물질은 악하지 않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일부이다.13 (305.3)
 “좋았더라”(창 1:4, 10, 12, 18, 21, 25, 31)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만족함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리고 제칠일에는 자신의 완전한 창조를 축하하시기 위해 쉬셨다(창 2:1~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완전한 창조와 완전한 구속 그리고 이 세상의 최종적인 회복을 축하하시기 위해서 인간 가족에게 안식일을 주셨다(출 20:11; 신 5:15; 눅 4:16~21, 13:10~13; 히 4:9). 이 놀라운 기쁜 소식을 안식일을 통하여 축하하는 제칠일 안식일 준수자인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갑자기 인간 신체의 구조와 조직들을 변경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305.4)
 변경은 불완전함을 내포함. 만일 부활하여 변화된 몸이 처음에 창조되었던 몸과 완전히 달라야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처음 고안한 인간의 몸이 실제로 전혀 완전하지 못했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 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첫 남녀의 신체적 존재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창 1:27)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 아마도 “통성”(unisex)을 창조하도록 강요받으셨을 것이다. 이 논리는 적어도 하나님의 전능성과 불변성을 믿는 사람에게는 불합리하다. 형태나 구조를 변경하는 것이 잘못을 저지른 인간에게는 정상적이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계신 하나님께는 비정상적이다. (305.5)
 천사와 같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냐고 응수할 것이다. 이 구절이 부활 때에 모든 성(性)의 구별이 없어지고 우리의 몸들도 더 이상 육체가 아닐 것이라고 가리키지 않는가? 이런 결론은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이끌어 낸 것일 수 없다. 여기서 예수님은 천사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부활한 몸의 비신체적 특성이나 새 세상에서 성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단지 결혼 제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인바, 그 이유는 세상에 더 이상 자녀를 출생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306.1)
 사두개인들이 만들어 낸 가설적 상황에서 여섯 형제들이 그들의 형수와 연속적으로 결혼한 것은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우기”(마 22:24)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면서 새 세 상에서는 출산을 목적으로 한 결혼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천사들을 언급하신 것은 추측컨대 합법적인 것처럼 보인다. 만약 새 자녀가 이 세상에 출산되지 않는다면 결혼이나 또는 결혼에 딸을 내어줄 가능성이 없을 것은 분명하다. (306.2)
 인간의 생식 능력이 끝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고안하신 인간의 생리적 구조에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사실일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말씀하셨을 때 이미 그런 변화를 생각하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14 추측컨대 이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육과 번성이 지구가 지탱시킬 수 있는 적당한 수의 사람으로 채워질 때까지 계속될 것을 뜻하셨다. (306.3)
 출산의 종결. 죽음의 존재가 없는 완전한 세상에서는 백성과 땅 사이의 최적 균형(optimum balance)이 죄와 사망이 들어온 후보다 훨씬 빨리 도달되었을 것이다. 부활하여 변화된 성도들은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를 내포하고 있는바, 그 이유는 그들이 이 새롭게 된 땅이 적절히 부양할 수 있는 최적 거민의 수를 대표하기 때문이라는 가능한 추측을 하게 된다. 그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식주기를 끝내고 인구 폭발로 야기되고 이 지구의 생태 균형의 붕괴를 예방하기 위한 본래의 계획을 수행하실 수 있다. (306.4)
 이러한 결론은 역시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기록된” 이름들에 대한 말씀들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계 13:8, 17:8, 21:27 ; 단 12:1; 빌 4:3). 그런 이름들은 이 지구에 거주할 의인의 최적 수를 위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을 암시한다. 그것은 또한 이 최적 수가 일단 달성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 속에서 인간의 생식을 끝내시라는 것을 암시한다. 결혼의 출산 기능이 정지되는 것은 두 서로 다른 성(性)을 가진 사람 사이에 있는 밀접한 교제인 결혼의 정지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306.5)
 친밀한 교제의 영속성.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천사들이 인간의 결혼 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비교되는 어떤 친밀한 교제의 형태 속으로 들어올 수 없는 “통성”(通性)의 존재라고 제 시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세 위격들(three persons)이 지극히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는 삼위일체의 존재(triune Being)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또 우리가 그 세 분을 한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 자신이 신성(神性)의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 인격체들 사이에서 가장 친밀한 영속적인 교제를 나누시며 사신다면, 하나님께서 그 자신이 창조 때에 제정하신 친밀한 부부 관계를 궁극적으로 폐지하실 것이라는 믿을 만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306.6)
 창세기 1:27은 하나님의 형상이 남성(male gender)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사실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제시한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창조시에 첫 인간 부부의 남성과 여성의 결합된 특성에서 반사되었다면, 우리는 그런 결합이 궁극적인 재창조 때에도 하나님에 의해 보존될 것임을 믿는 이유가 된다. 창조는 성경에서 마지막 재창조의 원형(prototype)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의 목표는 자신의 처음 창조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그 본래의 완전함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서가 새로운 존재의 창조보다는 오히려 몸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이유이다. (307.1)
 몸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