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5 장 재림소망의 절정
 모든 세 인용 구절들(행 24:15; 단 12:2; 요 5:28, 29)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은 모두 동시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계시록 20장은 두 다른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리킨다. 신자들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승리의 재림 때에 먼저 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 릇하리라”(계 20:6). 불신자들의 부활인 둘째 부활은 천년기의 끝에 있으며 결과는 정죄와 둘째 사망이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계 20:14, 15).9 (300.4)
 사실이 국면보다 더 중요함. 한 비평적인 현대 독자에게는 신자와 불신자들의 한번 있는 일반적인 부활과 일천년에 의해 나누어지는 두 부활에 대해 계시록이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 사이에는 분명한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분명한 모순이 신약 기자들을 동요시키지는 않았는 바 그 이유는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의 실재(reality)는 부활의 양상(modality) 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부활에 대한 대부분의 말씀들이 국면(phases) 보다는 사실(fact)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00.5)
 우리는 똑같은 원칙이 심판에도 적용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성경의 언급들이 그것의 국면보다도 실재와 종국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심판의 재림전 국면과 재림후 국면을 명백히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이 있다는 것을 보아 왔다. (301.1)
 이러한 사실의 빛 가운데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다른 여러 교회와는 달리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신자들의 부활과 불신자들의 부활 사이에 실제적인 구별이 있다는 것을 수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악한 자들의 부활의 특성과 그들의 마지막 멸망 전에 존재하는 형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나타내 보이지 않은 것을 추측하는 것은 건전하지 못하다. (301.2)
 구별되는 두 부활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이 견지하고 있는 것처럼, 두 구별된 부활에 대한 신앙은 오히려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의 독특한 신앙 형태이다. 우리는 모든 죽은 의인들의 부활과 모든 산 의인들의 변화는 천년기가 시작되는 때인 그리스도의 인격적이고, 가시적이며 또 영광스런 재강림의 때에 동시에 있을 것을 믿는다. 살아 있는 악인들은 그 때에 멸망당할 것이며 죽은 악인들은 천년기의 끝에 있을 두번째 부활 때까지 무덤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301.3)
 천년 기간 동안에 구속받은 자들은 하늘에 있을 것이며 사단은 사람들이 없는 이 지구에 격리되어 있을 것이다. 천년기의 끝에 죽은 악인들은 부활할 것이다. 이 사건은 사단으로 하여금 구속받은 자들이 지상으로 내려올 때 이 세상의 통치권을 얻고자 한 번의 마지막 공격을 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멸망시키므로 악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심판을 집행할 것이다(둘째 사망—계 20:13~15). 그 후에 하나님은 이 지구를 재창조할 것이며 그 곳에서 구속받은 자들이 영원히 안전하게 거할 것이다. (301.4)
 다른 견해들과 비교해 볼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주석이 덜 복잡하고 성경과 더욱 일치한다. 어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세 번 또는 네 번의 부활은 없으며, 단지 두 번 곧 의인을 위해서 한 번 그리고 악인을 위해서 한 번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곧 모든 구속받은 자들이 부활하며 동시에 보상을 받는 것을 뜻하며 또 이와 유사하게 모든 악인들이 부활하여 동시에 형벌을 받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지상에 살고 있는 자에게와 천년기 동안 하늘에 있는 자들 사이에 혼란은 없다. 지상에 있는 유대인의 천년왕국과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왕국 사이에 구분은 없으며, 하나님의 한 왕국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301.5)
 몸의 부활
 몸의 부활에 대한 반대. 신자들은 부활시나 변화될 때 어떤 몸을 받게 될 것인가? 그것은 실제적인 몸인가 영적인 몸인가? 그것은 현재의 몸과 비슷한가 아니면 전적으로 다른가? 우리의 개인적인 신분이 어떻게 보존될 것인가? 내 부친은 73세이고 내 모친은 71세가 될 것인가? 부활한 신체의 특성에 대한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 전에 몸의 부활 교리에 도전하여 일어난 두 주요 반대를 간단히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이러한 반대의 근간은 한편으로는 철학적 관념론(philosophical idealism)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물질주의(scientific materialism)이다. (301.6)
 철학적 관념론. 헬라의 철학적 관념론은 물질적 존재를 악한 것으로 보아 그것을 배척했다. 구원은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철학적 이원론(dualism)은 그리스도인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몸의 부활의 교리를 거절하는바 그 이유는 악하다고 보는 물질적 존재가 계속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활할 때에 구속받은 자는 실제적인 몸을 얻지 못할 것이며 비물질적인 영의 몸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302.1)
 이 견해의 근본적인 잘못은 물질은 악하므로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가정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견해는 인간의 몸을 포함해서 물질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물이라고 가르치는 성경 구절들에 의해 분명히 신임을 얻지 못한다(창 1:4, 10, 12, 18, 21, 25, 31). 시편 기자는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편 139:13, 14)고 선언한다. (302.2)
 과학적 물질주의. 과학적 물질주의는 물질을 유일한 궁극적인 실체로 본다. 우리가 선택의 부산물로가 아니라 오히려 기회의 부산물로 보여지는 물질내에 살고 있는 이상 우리가 죽을 때가 곧 끝이다. 이 견해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몸이 부활한다는 어떤 개념도 배척한다. 그들은 단지 불멸이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이나 또는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준 유전적인 특성이라고 믿는다. (302.3)
 그런 견해는 성경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마저도 부정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亞)원자(subatomic) 과학 시대에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심히 적은 분자를 여전히 통제하신다는 것이 납득하지 못할 만한 것은 아니다.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全)존재를 포함하여 모든 사물들을 여전히 통제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을 뜻한다. (302.4)
 부활의 사실. 몸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 신앙은 영혼의 불멸 개념과 같은 어떤 철학적 추측이나 욕구 사고(思考)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그런 사건이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므로 이미 있었다는 확신에서 일어난 것이다. 인자가 모든 사람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분에게 일어난 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일어날 것에 대한 실마리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무덤 속에서 육체를 가지시고 부활하셨으므로 우리도 역시 유사한 형체로 부활할 것을 믿는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302.5)
 예수님은 정당하게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골 1:18)로 불려지는바 그 이유는 조지-라드(George Eldon Ladd)가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그분께서는 새로운 존재 질서 곧 부활 생명의 첫째 자리에 서 계시기” 때문이다.11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은 신자들의 부활을 확실성 있게 만든바,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승리를 실증해 보였기 때문이다. (302.6)
 예수님의 부활이 종말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음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라는 바울의 진술 가운데서 입증된다. (302.7)
 “첫열매”란 표현은 오늘날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다. 그러나 성경 시대에는 수확의 첫 산물이 새로운 추수를 허락하신 것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에 풍부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드려진 첫 열매는 단순한 새로운 수확에 대한 소망만이 아니라 실제 소망의 시작으로 보여졌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첫열매”로서 신자들의 부활을 가능케 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확실하게 만들었다. (302.8)
 성경 어떤 곳에서보다 몸의 부활에 대한 가장 확실한 말씀이 주어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우리의 부활이 얼마나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존되어 있는지를 강조하여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 15:14, 15, 17, 18).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과 그리스도의 재강림 때에 우리를 부활시키시리라는 그분의 약속에 대한 신앙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위해 사망을 추방하시리라는 것을 증거하신 것은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이기 때문이다. (303.1)
 부활한 몸의 특성.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재강림 때에 잠자는 성도들과 살아 있는 성도들에게 어떤 몸을 주실 것인가?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고린도교인들에 의해 일어난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논증을 가지고 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5~38). (303.2)
 바울은 씨라는 유추 수단을 통해서 우리의 현재 몸과 미래에 부활의 몸, 곧 변화된 몸 사이에 연속성(continuity)과 불연속성(discontinuity)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연속성은 씨와 그것에서 발아된 새로운 식물 사이의 관계에 의해 설립된다. 불연속성이란 뿌려진 씨와 그것에서 나온 새로운 식물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뿌려진 각 종류의 씨앗에 몸체를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장사지낸 바 된 개개인에게 육체를 주신다는 것이다. 병든 몸이 씨앗처럼 땅 속에 묻혔다는 사실이 씨앗의 유추법을 바울에게 제시하도록 한 것 같다. (3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