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이 심했던 것만큼 파고(波高) 또한 높았던 다윗의 인생 바다는 방랑과 우여 곡절로 쉴새없이 요동했어도, 그의 인생 바다 밑에는 고고(孤高)히 흐르는 영혼의 해류가 있다.

 — 시편 27편(123.1)
 사람이 무서운 세상
 사람이 무서운 세상이다. 밤길에 가까이 오는 낯선 사람이 무섭고, 불필요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도 겁이 난다. 골목마다 세워진 방범 초소며 높다란 담장과 둘러친 철조망, 촘촘히 꽂힌 유리 조각 등 모두 사람이 무서운 세상의 살풍경이다. 칼자루를 잡은 정적(政敵)의 존재는 얼마나 불안한 것인가? 그뿐이랴. 명예와 인기를 위해 목숨을 내거는 연예와 스포츠계, 생활 전선인 직장에서 저지르는 정신적 살상(微傷)인 배신과 시기, 중상 모략 등 모두 살벌한 이야기다. 아, 정말 사람이 무섭다. 무서운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리”라는 사회학이 넋두리가 현실이 될 때 우리는 사람에게 시련을 당하여 몸둘 곳을 몰라 전전긍긍하는 시편의 다윗을 얼마쯤 이해하게 될 것이다. 목동시절 곰과 사자를 겁내지 않았던 다윗이 두려워한 것은 인간이었다. (123.2)
 정신 질환 중에는 사람 대하기를 무서워하는 대인(對人) 공포증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를 “안드로포비아”(anthrophobia)라고 한다. 요사이 겪는 인간 공포증 같은 것이다. 사람이 점점 더 무서워지는 세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사람을 겁내지 않고 사는 비결이 아쉽다. 이래저래 혼란이 심해지고 있는 세상에서 불안의 강박감(强迫感)에 사로잡혀 노이로제 환자로 바뀌고 있는 현대인이 가엾어진다. 진정제로도 가라앉지 못하고, 수면제로도 잠들지 않고 각성제로도 깨어나지 않는 오늘의 이 짙은 불안에서 벗어나는 피어 프리(fear free)의 처방이 시편 27편에 다윗의 임상 실험을 거쳐 제시되어 있다. (124.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시편 27편 1~3절). (124.2)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시편 27편의 주인공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해 하려는 사울 왕의 정규군에게 쫓기며 기약 없는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순간순간을 말초적인 불안에 에워싸여 살아야 했다(사무엘상 22장 참조). 그러한 다윗이 인간 공포증에서 벗어나고 불안의 강박감에서 해방된 불퇴전(不退轉)의 노래가 바로 깅징시(强壯詩 • The Tonic Psalm)로 알려진 시편 27편이다. (125.1)
 다윗의 전망(展望)은 참으로 어두웠으나 상망(上望)할 때 거기 빛이 있었다. 그것은 어두움속에서 겁에 질린 아이가 쳐다보는 엄마의 얼굴에서 비쳐 나오는 그런 빛이었다.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편 56편 13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라”(시편 80편 19절). 하나님의 얼굴빛을 바라보는 사람은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흑암 중에서도 결코 실족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바라보며 살아온 다윗은,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가 사람에게 쫓길 때 쉽사리 몸을 피할 수 있는 견고한 “마오즈”(maoz) 곧, “내 생명의 요새”(우리말 성경에는 “능력”)였으므로 더더구나 겁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소리친다.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인간 공포증을 이기는 천래(天來)의 비방이다. (125.2)
 4세기 동방의 설교 잘하는 교부였던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이 사회악을 꾸짖고 황후 유독시아(Eudoxia)의 사치를 나무라다가 위협을 당하여 귀양살이를 가게 됐다. 그는 태연히 말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할까? 죽음인가?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인 줄 안다. 내가 사는 땅에서 쫓겨나는 귀양살이인가? 아니다.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나의 소유를 잃는 것인가?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떠날 때도 가지고 갈 것이 없는 것이다. 저들이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처럼 될 것이고, 저들이 나를 구덩이에 던져 넣으면 나는 예레미야같이 될 것이고, 굴에 던져 넣으면 다니엘과 같이 될 것이고 돌로 친다면 스데반처럼 될 것이고, 목을 벤다면 침례 요한같이 될 것이고, 나를 매질한다면 사도 바울같이 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편 56편 4, 11절). (125.3)
 해면(海面)은 심한 풍랑으로 물결이 험해도 바다 밑은 격랑에 아랑곳없이 잠잠하듯,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신뢰한 다윗은 이러한 때, “오히려 안연(優然)히 거하리”라고 노래할 수 있었다. (126.1)
 청하였던 한 가지 일
 해면의 파도는 풍랑에 쫓겨 떠밀려 가도 바다 밑을 흐르는 잔잔한 해류(海流)는 물길을 따라 제 갈 곳을 향해 의연히 흘러간다. 풍랑이 심했던 것만큼 파고(波高) 또한 높았던 다윗의 인생 바다는 방랑(放浪)과 우여곡절(辻餘曲折)로 쉴새없이 요동했어도, 그의 인생 바다 밑에는 고고(孤高)히 흐르는 영혼의 해류가 있었다. 그것이 풍운아(風雲兒) 다윗을 인생 향해길의, 허다한 조난에서 지켜 난파(難破)를 면케한 인생 해저의 비밀이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였던 한 가지 요청이었다. (126.2)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殿)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편 27편 4~6절). (127.1)
진정제로도 가라앉지 못하고, 수면제로도 잠들지 않고 각성제로도 깨어나지 않는 오늘의 이 짙은 불안에서 벗어나는 피어 프리(fear free)의 처방이 시편 27편에 다윗의 임상 실험을 거쳐 제시되어 있다.
(127.2)
 고향을 떠나 외롭게 사는 사람은 사향(思鄕)으로 마음의 고향에 살고, 그리운 벗을 떠난 사람은 사우(思友)로 생각 속에서 벗을 만나며, 헤어져 사는 연인들은 상사(相思)로 서로의 그리움을 나눈다. 역적으로 수배되어 추적을 받으며 고향을 떠나고,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된 성소로 가는 길마저 막혀진 울적한 방랑의 날 동안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한없는 사모(思慕) 속에 살았다. 비참해진 죄인이 용서받는 곳, 연약한 마음이 힘을 얻는 곳, 억울한 심정을 펼쳐 놓는 곳, 외롭고 괴로운 심령이 위로 받는 곳, 어떠한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이 약속된 곳, 쫓기는 자에게 안전이 보장된 곳—그곳이 성소였다. 그 곳에서 다윗은 언제나 용납하시고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감싸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자애로운 앞모습을 보았으며, 사필 귀정(事必歸正)을 보증하시는 공의로운신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토록 절절한 체험이 다윗으로 하여금 인자하고 진실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심과 그분이 계시는 집 성소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본문의 성전 사모곡(思母曲)을 하염없이 노래하게 한 것이다. (127.3)
 사람이 만들어 낸 불안으로 출렁거리는 마음을 하나님의 집에 정박(旋泊)시킨 다윗의 인생 해저에는 평온이 해류처럼 흐르고 있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안으로 파도치는 마음의 닻을 하나님께 깊이 내린 사람만이, 격랑치는 환난 날에 “그 초막 비밀한 곳”, “그 장막 은밀한 곳”, “그 바위 높은 곳”에 감추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것이다. 외로움과 괴로움, 서러움과 억울함으로 땅에 떨구어졌던 방랑자의 머리는 마침내, “원수 위에 들”릴 것이다. 그리고 마음으로만 그리워한 하나님의 집에 발로 나아가 감사로 벅찬 예배를 드리고, 억눌러 온 찬양을 터뜨려, 방랑길에서 하염없이 부르던 성전 사모곡을 대신할 것이다. 그것이 격랑치던 인간 역사의 표류(漂流)가 끝나는 날, 소망의 항구에 이르게 된 성도들의 체험의 노래인 것이다(요한계시록 7장 15~17절 참조). (128.1)
 인파 많고 풍파 높은 세상을 살아갈 때
 본 시편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7절에 접어들면서 시인은 갑자기 음조를 바꾸어 탄원하며 울부짖기 시작한다. 인생의 항해가 실제로 전개되는 인파(人波) 많고 풍파(風波) 높은 세상의 현실로 떠오른 것이다. 입으로는 찬양을 드높이는 순간에도 밀려오는 세파(世波)는 여전히 인생의 뱃전을 세차게 치고 있기 때문이다. (128.2)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함이니이다”

   (시편 27편 7~12절). (129.1)
 배가 물 위에 떠가면 항진(航進)이지만, 물이 배 위로 덮쳐 오르면 난파(難破)되어 침몰하듯, 하나님에 대한 믿음(faith)이 솟아오르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fear)이 가라앉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덮쳐 오르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가라앉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텁고 검은 구름이 마음을 덮을 때는 산 믿음으로 흑암을 꿰뚫고 구름을 흩어 버릴 때이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된 약속들을 의지하는 것”(엘렌 G. 화잇, 초기문집. 76. 77)이다. 그래서 다윗은 인생의 풍파가 뱃전을 세차게 후려칠 때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을 불렀으며, 폭풍우가 몰아쳐 머리 위의 별빛이 사라질 때 그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애타게 찾았다. 심한 풍랑으로 인생의 뱃머리가 어지러울 때 그는 평탄한 길을 가르쳐 주시도록 구급(救急)을 탄원했다. 광풍이 대작 하던 갈릴리 밤 호수에서 작은 배에 몸을 맡긴 채 사경을 헤매던 제자들에게 다가오시며,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태복음 14장 27절)고 말씀하시던 주님의 그 음성을 기다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풍파(風波)보다 더 무서운 인파(人波)에 삼키워 난파되지 않도록, “내 생명을 내 원수의 손에 맡기지 마” 시기를 애원했다. 부디 무자비한 사람의 손에 빠져들어 주님 없이 죽어가지 않도록 ∙∙∙ . (1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