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행복하려거든(시편강해) 제 1장 참으로 행복하려거든 13. 내가 토설(吐說)치 아니할 때에
 타락한 인간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마지막 도덕적 형상인 양심(良心)은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불가사의한 죄책감을 일으켜 인간을 예외 없이 양심 법정에 고발한다.

 — 시편 32편(133.1)
 고자질하는 양심
 19세기 미국의 작가 애드가 앨런 포우(Edgar Allen Poe)는 그의 작품, “고자질하는 양심”(The Tell-Tale Heart)의 주인공을 통하여 죄책감으로 고통당하는 인간의 양심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죽여 자기 집 지하실에 묻어 버렸는데, 이상하게도 죽은 사람의 심장 고동 소리가 그의 귀에 똑똑히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간담이 서늘해졌으며 온몸은 식은 땀으로 축축히 젖었다. 귀를 막아도 잠을 자도 계속 들려 오는 그 섬뜩한 고동치는 소리를 피할래야 피할 길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소리가 지하실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자기 심장의 고동 소리인 것을 깨닫는다. 용서받지 못한 죄책감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묘사한 것이다. 참으로 양심처럼 무서운 증인이 없고 양심처럼 겁나는 비평자도 없다. 그것은 죄를 나무라는 인간 내부의 가차 없는 질책(比責)인 것이다. 도대체 인간의 양심이란 무엇이며, 짓밟힌 양심의 피할 수 없는 고발인 죄책감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133.2)
 “사람이 자기 자신과 더불어 나누는 지식”, 곧 자아의식(自我意識)을 뜻하는 헬라어 “순에이데시스”(suneidesis)에 어원을 둔 양심(conscience)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타락해 버린 인간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마지막 도덕적 형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추락한 비행기의 비밀을 간직한 블랙 박스(Black Box)처럼 사람의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과 자신만이 아는 밀어로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범죄로 파괴될 때마다 불가사의한 고통인 죄책감을 일으켜 인간을 양심 법정에 예외 없이 고발한다. (134.1)
 애원과 탄식, 슬픔과 아픔을 딛고 한치 한치 높다랗게 쌓아올린 시편의 주인공 다윗 대왕의 인생의 공든 탑이 어느 날 갑자기 어이없이 무너져 버린다. 어느 봄날 황혼녘, 낭만의 봇물이 터진 다윗은 싸움터에 나간 신복의 아름다운 아내 밧세바를 엉겁결에 유린하고 후환이 두려워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 장군이 전사하도록 살인을 교사(敎酸)하는 어처구니없는 중죄를 범한다. 그러고는 버젓이 전쟁 미망인 밧세바를 아내로 맞아 아이까지 낳고 태연히 산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태연하지 못했다. 압박해 오는 죄책감에 가슴이 터질 듯 짓눌린 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진상을 이실직고(以實直告)하는 선지자 나단 앞에 다윗은 마침내 엎드려졌다. (134.2)
 그리고 수치와 후회와 두려움에 떨며 모두 아시면서도 일 년 이상이나 기다리신 하나님의 친절한 사랑을 의식하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용서를 애원한다(사무엘하 11, 12장 참조). 그것이 바로 다른 여섯 시편(6, 38, 51, 102, 130, 143편)과 함께 참회시(機梅詩)로 알려진 다음의 시편 32편이다. 또한 같은 경험의 시가 시편 51편이다. 사람의 중심이 있는 책 시편에 마침내 양심 법정이 개정되고 피고가 된 대왕 다윗이 허리를 굽힌 채 얼굴을 감싸 쥐고 출두한다. (135.1)
 털어놓지 않았을 때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吐說)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시편 32편 1~4절). (135.2)
 모든 상처는 아픔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아픔은 치유를 재촉하는 육신의 호소이듯, 상처받은 양심의 아픔인 죄책감은 사유(救有)를 요청하는 심령의 애소인 것이다. 그것은 이 지경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려는 성령의 끈질긴 사태의 개입인 것이다. 죄책감의 치유를 위한 유일한 처방은 십자가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용서이며, 용서를 거절한 죄책감은 불치의 고질(病疾)이 되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질병 가운데 70퍼센트 이상이 불안과 두려움 등 죄의식의 영향을 받은 정신 신체 상관성 질환(Psychosomatic Illness)이라는 것이다. 정상적 기능을 상실한 더럽혀진 양심(디도서 1장 15절 참조)이나 아예 반응하기를 그쳐버린 화인(火印) 맞은 양심(디모데전서 4장 2절 참조)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그친 절망 바로 그것이다. (135.3)
 한 가닥의 죄책감도 갖지 않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가련한 여인이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혀 예수님께 끌려왔을 때 희한한 판결이 내려졌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탄원한 여인에게는 무죄를 선고하여 죄책감을 없애 주셨고, 죄책감도 없이 달려들었던 고소인들에게는 “양심의 가책을 받”(요한복음 8장 9절)게 하여 죄책감을 일으키시고 유죄를 자인(自認)하게 한 후 돌려보내셨다. 그것은 예외가 아니라 양심 법정의 재판장이신 예수님의 확정된 판례(判例)이다. 죄인만을 구원하러 오신 우리 주님의 역설적인 복음이다. (136.1)
모든 상처는 아픔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아픔은 치유를 재촉하는 육신의 호소이듯, 상처받은 양심의 아픔인 죄책감은 사유(私有)를 요청하는 심령의 애소인 것이다.
(136.2)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원인은 죄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사는 동안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참으로 행복한 인생이라고 시편 1편은 노래했다. 그러나 그 시편의 주인공 다윗은 이러한 행복의 정로를 벗어나 죄인의 길에 들어섬으로써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시편 1편 3절)이 되는 대신,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고, “나의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다고 애처롭게 고백한다. (136.3)
 사람이 단번에 깊은 죄에 빠지는 것이 아님을 죄의 네 가지 다른 표현을 써서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는 마음으로 거역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페솨아”(peshà), 곧 “허물”(transgression)을 범한다. 그런 다음에는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곁길로 들어서는 “하티아”(chatàah), 곧 “죄”(sin)에 빠진다. 이제 처신이 죄에 익숙해져서 도덕적인 악습인 “아온” Cawon), 곧 “불의”(iniquity)한 사람으로 굳어 간다. 마침내 그는 자신에게도 정직하지 못한 자기 기만에 빠지는 “레미아”(remiyyah), 곧 “간사”(guile)한 사람이 되고 만다. 볼장을 다 본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편에서라도 인간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마지막 형상인 양심을 통하여 호소하시는 성령의 탄원을 따르기만 하면 그는 다시 그리고 여전히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다윗은 자신의 경우를 실례로 보증하고 있다. 상처는 의사에게 보여야 고치고 죄악은 하나님께 털어 놓아야 용서를 받는다. 다윗처럼 말이다. (137.1)
 무겁고 무서운 짐—죄의 짐
 죄의 짐은 무거운 것이므로 한시 바삐 회개함으로써 벗어야 한다는 호소를 들은 한 불신자가 전도 목사에게 반문해 왔다. “도대체 죄 짐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달아 보셨나요? 나는 한 번도 죄 짐이 무겁다고 느껴본 것이 없어요.” “그렇습니까? 만일 여기에 죽은 사람이 누워있는데 그 위에 무거운 짐을 올려 놓으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야 알 까닭이 없지요. 죽은 사람인데.” “맞습니다. 죽은 사람이 무게를 느끼지 못하듯 죄 가운데서 죽어 있는 사람은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선생님처럼 말입니다.” (137.2)
 죄 짐은 무거운 것이며 죄의식은 무서운 것이다. 죄책감을 처리 하지 못한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예수님께서 마신잔을 그처럼 쓰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열시킨 것은 인류의 대리자인 그에게(하나님) 아버지의 분노를 가져오게 한 죄의식이었다”(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3권. 287). 양심의 고통을 견디다 못한 다윗은 마침내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마음을 찢기 시작한다. (138.1)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시편 32편 5~7절). (138.2)
 다윗의 회개는 그의 범죄만큼이나 철두 철미한 것이었다. (139.1)
            4.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단번에 용서하셨다.

      ↗ 3. 자신이 저지른 악을 낱낱이 고백했다.

   ↗ 2. 자신이 죄를 범한 변명하거나 숨기지 않았다.

 ↗ 1.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철저히 자복(伯服)했다. (139.2)
어떤 이유로든지 죄를 지었거든 노새나 말처럼 고집을 세워 버티지 말아야 한다. 버티면서 시간을 끈다고 될 일이 아니다. 죄짓고 사는 인생 길은 슬픔의 길이요 가시밭 길이다.
(1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