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11장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통첩:다니엘의 70이레
 다니엘 9장의 70 이레의 중요성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세대주의자 맥클레인(Alva J. McClain)은 “단 하나의 예언적 구절로서 아마도 성서 해석, 호교론, 그리고 종말론의 영역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1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전체 성경에서 이 중요한 메시아적 예언을 “전체 구약에서 [이해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들 중의 하나”2라고 간주한다. (18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는 히브리 성경의 거룩한 영감과 특별히 예언적 예언에 관한 거룩한 영감을 증언하고 있다. 다니엘 9장의 70 이레를 490년으로 계산하는 것은 필연 이스라엘의 약속된 메시아가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이미 오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탈무드가 다니엘의 70이레를 계산하려고 시도하는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한 것은 이해할만하다.3 (185.2)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단 9:24-27).
(185.3)
 예루살렘에 다가올 “멸망의 가증한 것”(마 24:15)과 관련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선지자 다니엘”을 읽고 깨달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권면은 다니엘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미래의 전망을 결정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다니엘 9:27의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과거 BC 167-164년에 있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무도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 자신의 임박한 미래 즉 그 자신의 세대 안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멸망시킬 때에 적용하였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눅 21:20-24). 다니엘 9:26, 27을 예수의 당대에 적용한 것은 AD 70년 타이터스의 인솔 하에 로마 군대가 그들의 우상의 군기를 예루살렘에 “미운 물건”으로 세우고 성전을 파괴하였을 때 확인되었다.4 하트맨(L. F. Hartman)은 다니엘 9:26의 준 예언은 에파피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합법적인 여호와의 희생을 제하고 그 제단 위에 올림푸스의 제우스 상을 세웠을 때 절정에 이른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5만을 언급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여기에 대해 볼드윈(J. G. Baldwin)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이 예언을 성취한다고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다니엘 9:26이 요구하는 대로] 그가 성전도 예루살렘 도성도 파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하는 것에 당황스러워 한다”6고 대답하였다. (186.1)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오실 메시아와 이어지는 메시아의 적들의 황폐함에 대한 70이레 예언을 과거나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그 자신의 시대에 적용하였다. 그리스도는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이스라엘이 그를 왕과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끝내 거절한 것과 연결시켰다(마 21:33-43; 23:37; 눅 19:41-44). 메시아의 강림과 도성과 성전 멸망의 상호 관계는 다니엘 9:26, 27의 결정적인 기별이다. 70이레 기별은 근본적으로 예루살렘이 그 메시아를 거절한 결과를 선포하는 메시아적 예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최후통첩이다. (187.1)
 70 이레의 나뉠 수 없는 통일성
 하나님께서는 “70이레”를 칠십년간의 바벨론 포수가 끝난 이후에(단 9:24) 예루살렘과 유대 백성들 위한 마지막 유예 기간으로 공포하시고 정하셨다. 이 기간의 길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칠 년의 칠십 배 즉 490년(RSV) 이다. 여기서는 연일원칙의 상징주의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가브리엘 천사가 그의 자세한 연대기적 설명을 주실 때, 상징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젤(G. F. Hasel)은 ‘칠십 이레’ 혹은 문자적으로 ‘일 곱 칠십’(sevens seventy)이∙∙∙ 490년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상 학파의 해석자들 사이에는 사실상 만장일치의 동의가 있다”7고 하였다. (187.2)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이 490년 기간 안의 이스라엘 역사는 세 가 지 구별된 국면, 즉 첫째는 7이레, 둘째는 62 이레, 그리고 셋째는 1이레 (25절27절)로 발전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천사는 이 세 국면들 중 어디에도 간격이 있다는 암시는 전혀 하지 않았다. 7이레와 62이레 사이 혹은 62이레와 마지막 1이레 사이에 애매한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제안은 표현된 그대로의 70이레의 단위와 목표(24절 참조)를 깨뜨리는 부자연스러운 가정이다. (187.3)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주석적 생각은 연속되는 70이레는 나누이지 않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다니엘 9:2에 기록된 바벨론 포수 칠십년과 꼭 마찬가지로 단 하나의 단위로 제시되었다. 영(E. J. Young)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예레미야 예언에 간격을 삽입하는 것이 아무런 근거가 없다면, 70이레의 예언에 그렇게 하는 것은 무슨 근거가 있는가? 예레미야의 예언(렘 25:10)에 간격이 있었다면 다니엘은 포로 기간에 대해 결코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8 필립 마우로(Philip Mauro)는 “시간의 전개를 묘사하는 특정한 숫자의 시간 단위는 다만 연속적인 시간 단위를 의미하기 위해 택하여졌을 뿐”9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다른 예언 기간들이 연속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니엘서의 70이레도 연속적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188.1)
 그러나 월부어드는 다니엘 9장의 69번째 이레와 70번째 이레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생각을 지지하기 위해 구약의 메시아적 예언과 다니엘서의 시간 예언 사이의 평행 관계에 관심을 유도하였다. 그러나 구약 예언들이 습관적으로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메시아적 예언에서는 둘을 하나로 용해시킨다는 사실이 다니엘 9장의 특별한 시간 주기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월부어드의 확언에도 불구하고 70이레의 연대기적 단위는 비 연대기적 메시아 예언과 “병행하지 않는다.”10 일반적인 메시아 예언이라고 해서 항상 그리스도의 두 강림을 정확한 역사적 순서로 제시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 순서를 뒤집기도 한다(창 3:15; 슥 9:9). 그런 예들이 다니엘의 69번째 이레와 70번째 이레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주장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헹스텐버그(E. Hengstenberg)는 전통적인 교회 해석을 대표한다. “70 헵도마데스(hebdomades) 혹은 490년은 여기에 시작부터 끝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는 그런 기간으로 예언되어 있다∙∙∙. 무엇이 이보다 더 확실하겠는가? 분명히 70이레는 그 전체 안에서 지나간다. 그런데 어떻게 69이레와 1이레가 함께 70을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그 둘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가?”11 70이레의 단위를 쪼개는 세대주의는 특별히 연속되는 70이레의 핵심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188.2)
 이레들을 나누는 근거들
 월부어드에 따르면, 마지막 한 주를 전체 70이레에서 분리하여 막연한 미래에 삽입하는 것은 세대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하다.”12 이 당혹스러운 분리를 인정하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맥클레인은 “그런 방식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13라고 물으면서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하였다. (189.1)
 첫째로,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질 것이요”(단 9:26)는 다니엘의 표현은 메시아의 죽음이 칠십 번째 이레 전에 발생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육십이 이레 후에 있다. 따라서 그것은 69번째 이레와 70번째 이레 사이에 올 수밖에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다음에 언급된) 예루살렘의 멸망(26절) 이후에 우리는 27절에 기록된 마지막 이레를 접하게 된다. (189.2)
 26절과 27절에 대한 이러한 문자적 독법은 다니엘이 필연코 이 두 절에서 엄격한 연대기적 순서를 제시하였다는 개념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 그런 생각은 자체적으로 분명한 공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월부어드는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는 일흔 번째가 아니라 예순 아홉 번째 이레 후에 끊어진다”14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일흔 번째가 아니라”는 이 마지막 구절은 다니엘 9:26, 27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월부어드의 근거 없는 상상력의 소산이다. 이러한 가정은 문학적 분석의 관점과 신학적 주석의 관점 양측 모두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15 (189.3)
 다니엘이 70이레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정해지고 메시아가 첫 예순 아홉 이레 후에 “끊어질 것”이라고 선포하였을 때, 자연스러운 가정은 메시아의 죽음이 마지막 이레 중 어느 때에 발생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페인(J. B. Payne)은 “그것[메시아가 끊어짐]이 일흔 번째 이레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16고 결론을 내렸다. (190.1)
 맥클레인의 두 번째 주장은 “예언을 기록함에 있어 도성의 멸망[26 절] 이 마지막 이레[27절] 전에 위치하고 있다”17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흔 번째 이레의 사건들은 예루살렘 멸망 전에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세대주의자들은 27절을 또 다른 하나님의 대적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무려 19세기 이상이 지난 다음에 갑자기 등장하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주장은 26절과 27절이 사건들을 엄격한 연대기적 순서로 기록하는 현대의 산문 형식으로 기술되었다는 가정 위에서만 타당하다. (190.2)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각주 15번을 보라)은 세대주의의 문자적 독법이 다니엘 9:24-27에 나타난 히브리 시의 “정교한 반복” 스타일을 인식하지 못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페인(J. B. Payne)은 그것을 “계시적 패턴” 이라고 불렀다.18 이러한 스타일의 패턴은 24절과 25절에도 나타난다. 페인은 다니엘 9:25, 269:24에 이어진다고 볼 수 없다. 대신에 25, 26절은 24절에 주어진 전체 칠십 이레를 요약한다 정교하게 반복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분명해 보인다. 26절에 대한 27절의 관계도 분명하다. 페인은 “모든 부류의 주석가들이 27절이 26절을 반복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특별히 각각의 절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언어의 일치로 확인된다”19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우리는 27절에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다시 언급되고, 언급되지도 않은 간격이 아니라 이제 좀 더 명료하게 마지막 이레의 “절반에” 위치한 것을 이해하게 된다. 26절과 27절은 메시아와 파괴하는 자(26절), 메시아와 황폐케 하는 자(27절)로서 구조상 상호 관계가 있다. 26절과 27절에 나타나 있는(25절에도 시적 배열이 있다)20 히브리 대구법의 단순한 시적 스타일은 무리하게 간격을 나눈 것에 대해 가장 철저한 문법적 주석으로 한 대답이다. (190.3)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예루살렘과 성소의 파괴(26절)가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거의 70년이 지나 일어났기 때문에 490년 밖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반론은 만일 예루살렘과 성소의 파괴가 24절에 언급된 70이레 예언의 여섯 가지 목표 중 하나라면 타당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메시아의 기름부음 받음과 그의 대속적 죽음은 분명히 40년 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예언되었지만 예루살렘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 이 거룩한 심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 40년까지 연기되었다. 그래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듣고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191.1)
 일혼 번째 이레를 구분하는 맥클레인의 세 번째 이유는 “24절의 무서운 사건들의 성취는 알려진 역사에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21 는 것이다. 그가 뜻하는 바는 유대인의 역사 가운데서는 죄가 끝나며 영원한 의가 시작되는 것을 어디에서도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죄악이 속하는 것도, 이상과 예언이 응하는 것도 지성소가 기름부음을 받는 것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191.2)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적인 성서해석자들은 그와 같은 생각을 표식을 놓친 것으로 간주하여 거절한다. 24절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자 자신이 성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새 제사제도를 향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이스라엘의 죄를 위한 완전한 속죄를 이루었고 이스라엘을 위한 영원한 의를 제공하였다.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은 그의 희생의 죽으심의 은전 안으로 들어가 그의 의의 흰 옷으로 입힘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침례(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와 죽으심은 다니엘의 이상을 확증하여 주었다. 그의 승천은 하늘 성소에서 새로운 대제 사장직에22 취임하셨음을 의미하였다. 그것이 지상에서는 오순절 날 하나님의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나타났다(행 2:33; 히 7:12, 22; 8:1, 2; 9:23, 24). 그러므로 영(E. J. Young)은 다니엘 9:24에 대해 “이 구절은 철저하 게 메시아적이다”23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볼드윈(J. G. Baldwin)은 그녀의 주석을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내렸다. “비록 재림도 심판 속에서 그려지지만, 그리스도의 초림이 앞을 내다보는 초점이다.”24 이 견해는 다니엘 9:24-27의 메시아적 예언의 두 가지 국면, 즉 24절의 6중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메시아가 오시는 것에 관한 중심 초점과 “종말”(27절)에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질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모두 정당하게 취급한 것이다.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초림(그의 침례, 죽으심과 부활)이 이 웅장한 메시아적 예언의 6중 목표 중 어떤 것도 이룬다는 것을 단정적으로 부인한다. (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