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4 장 조사심판과 재림소망
 “행위”는 마지막 심판의 기준이 되는바 그 이유는, 이미 본 것처럼, 그것들이 믿음을 실증해 보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딛 2:12, 13)자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282.1)
 우리의 생애에 중대함.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매일의 생애를 살아가는 방법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심판은 우리의 매일의 생애에 중대성을 부여해 준다. 우리의 날마다의 사상, 언어, 행위 그리고 태도는 영원을 결정한다. 그 기록들이 마지막 심판날에 점검을 받게 될 때 매일의 생애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나타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덕적 원칙을 무시하면서 자아 중심적인 생애를 살아왔는가, 아니면 그분의 도덕적 가치를 반영하면서 하나님 중심적인 생애를 살아왔는가? (282.2)
 인류는 마지막 심판의 기별을 들어야할 필요가 있다. 벨릭스 총독이 자신에게 설교하도록 바울을 초청했을 때 그 사도는 팔레스틴의 사회적인 불편이나 또는 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행 24:25) 강론하는 기회로 사용했다. (282.3)
 이 셋은 상호 관련을 맺고 있는바 그 이유는 사람이 의롭고 절제하며 살도록 촉구하는 것이 마지막 심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촉구에 의해 “벨릭스가 두려워” 했으나 그는 그것을 무시해 버리기로 선택했다. 벨릭스와 같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심판에 대해 듣기를 원치 않고 오히려 그것이 결코 자신들의 부도덕하고 부절제하는 행위를 계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假定) 하에서 살아가기를 좋아한다. (282.4)
 근신하는 생애의 결과. 하루는 로마에 있는 폰티피컬 그레고리안 대학교(Pontifical Gregorian University)의 한반 동료인 캐퓨친 승려(프렌체스코회의 일파임)에게 왜 어떤 묵주들에는 작은 해골이 붙어 있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때 죄를 덜 짓는 경향이 있다”라고 대답을 했다. 가톨릭 신학에는 죽음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 심판의 때인바, 그 이유는 개개인이 영원한 보상이나 또는 형벌을 받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282.5)
 우리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가톨릭의 시간 적용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심판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생애에 훌륭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마도 우리는 해골을 가지고 다니는 대신 볼 수 있는 자리에 “마지막 심판을 기억하라” 라는 표어를 달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생애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생각나게 할 수 있다. (282.6)
 2. 개인의 가치를 보여 주심
 하나님께서는 각자를 중요하게 보심. 재림 전 심판과 재림 후 심판에 대한 계시의 말씀이 우리의 “이름들”, 사상, 자제와 행위가 기록되어 있는 “책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큰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람들이 자주 기계 속에 있는 톱니 바퀴나 컴퓨터 안에 있는 숫자들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신원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를 고무시킨다. 그분께서는 각 신자들의 이름을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계 13:8)에 기록하셨다. 성경에서 이름은 종종 그것이 지명하는 사람의 품성과 인격을 나타낸다(출 6:3; 행 1:15; 계 3:4).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이나 이름에 의해서 아실 뿐만 아니라 전인(全人)으로 아시며 또 우리의 전인격에 대한 완전한 기록을 보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우리의 생애의 의미와 운명은 교회와의 인연, 가족 관계 또는 속해 있는 종족 등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우리의 인격을 꼴 짓는 가치와 결정들에 의해 좌우된다. (282.7)
 하나님께서는 매 행동을 중요하게 보심.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부여하신 중요성은 단 하나의 결정과 행동에까지 확장된다. 마지막 심판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시야에서 무 가치 하거나 하찮은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비록 “무익한 말”(마 12:36)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심판의 조사 국면에서 고려가 된다. 그 이유는 부주의하고 생각없이 한 말이 종종 우리의 내적 자아를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부주의한 말”이 때로는 “심각한 말”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이 어쩌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283.1)
 생애에서의 도덕적 가치. 마지막 심판에 더 크게 내포되어 있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행하고 생각하고 또 말하는 모든 사상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우리의 생애를 더욱 가치있게 만드는 중요한 것들이다. 냉수 한 컵을 주는 것과 같은(마 10:42, 25:35~40) 심히 하찮은 행위 조차도 주목을 끌지 못하고 지나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행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에 엄숙함과 중요성의 의미를 부과하고 있다. (283.2)
 때로는 비록 우리의 가장 높은 동기와 최선의 노력조차도 오해되는 듯이 보이는 때가 있다. 심판은 우리에게 인간의 오해와 비평을 직면하는데 용기를 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공공연한 행위와 은밀한 행위를 아시고 주목하신다는 것을 재확신시키신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시야에서 무시되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마지막 심판날에 적절한 고려를 받게 될 것이다. 요약하자면, 마지막 심판을 생각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이 사건이 우리의 생애에 주고 있는 두려움과 장엄함, 그리고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의식을 강탈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283.3)
 3.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옹호
 본 장에서 정의된 마지막 심판에 대한 성서적 개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중요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성경은 마지막 심판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죄의 문제를 끝내신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공정한 우주적인 심판을 집행하시는데 필요한 정보를 모으는 재판장의 절차를 필요로 하시는가? 성경은 왜 하늘과 땅의 거민이 도덕적 존재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사법적 절차에 동참한다고 언급하고 있는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은 이런 질문들에 주어진 대답들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들이 선과 악의 현재의 쟁투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해결책을 이해하고 감사를 돌리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283.4)
 하나님은 새로운 정보를 찾지 않으심. 우선 마지막 심판의 조사 국면은 아직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지 않는 어떤 정보를 공급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마지막 심판에 사용되는 책들의 저자이시다. 하늘에 있는 기록들은 하나님 편에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 존재자들에게 이 지식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조사심판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찾지 않으시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재림 후 심판이 있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 중 하나이다. 우리가 본 것 처럼 이 심판은 구속받은 인간이 불의한 자를 구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잃어버린 자들이 신자들의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계 20:5) 하나님께서 벌써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였다는 것을 매우 명백히 한다. (284.1)
 그러나 천년기 끝에 있는 그들의 마지막 멸망 전에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은 자들에게 그분의 심판이 공의롭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그들의 기록을 점검하는 기회를 주신다. 신자들이 영원한 구원으로 보답을 받고 불신자들이 영원한 멸망으로 형벌을 받기 전에 하나님은 자신의 도덕적 피조물(moral creatures)이 자신의 심판의 근거를 평가하도록 초청하신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284.2)
 하나님은 심문당하지 않으심. 어떤 의미에 있어서 마지막 심판의 조사 국면에서 “심문” 가운데 있는 자는 구원받은 자들이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시다.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또 도덕적 존재자들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그분의 결정은 자비와 공의 속에서 나타난다. 그렇지만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판을 자신의 피조물들이 면밀히 조사하도록 부탁하시는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주 앞에서 도덕적으로는 “심문”을 받아야할 책임이 없다. 첫째, 그는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도덕적으로 빚을 지지 않았다. 그는 우주나 인간을 만드실 때 결점이 있도록 만들었다고 자백해야 할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주에 대한 자신의 통치에 불공정함이 있다고 인정해야할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다. (284.3)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책임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신바 그 이유는 자신이 피조물들을 자유로이(freely) 창조하셨고 구속하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세상을 자유로이 창조 하셨으므로 어떤 사람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고 완전히 뒤집어 엎으시므로 자유로이 그것을 해체하실 수 있다. 세번째로, 비록 하늘이나 지상거민들이 하나님의 창조나 또는 행정에서 어떤 흠을 찾았다 할지라도—어리석은 가설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폐위시키거나 다른 하나님을 그 자리에 앉힐 수는 없다. (284.4)
 세상이 하나님의 정부의 공의를 받아들이든지 또는 거절하든지 간에 이것이 그분의 주권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주의 주권을 가진 통치자로 있게 될 것이다. 위험스런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안전이 아니고 세상에 있는 도덕적 존재들의 안전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심문을 받고 있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고 도덕적인 우주이다. 만약 후자가 배심원으로서 피고이신 하나님께서 불공정하다는 것을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결정적인 형벌에 직면해야 될 사람은 정작 피고가 아니고 그 배심원이다. (284.5)
 하나님께서 심문을 받으심. 그러나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덕 세상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다. 여러 이유들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와 구속, 그리고 처벌 행위 때문에 기꺼이 설명하기를 기대하신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선택의 원칙에 따라 처리하시기를 택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도덕적 피조물들에게 자신의 사랑과 공의, 그리고 사단의 적개심과 부당함 사이에서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의 자유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도덕적 존재자들이 자신의 도덕률과 재판 행위를 시험함으로 이 자유를 실행하도록 초청하신다. (285.1)
 두번째는 하나님은 사랑의 원칙 위에서 처리하시기를 선택하셨으며 강요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완전한 자유 속에서 자신의 사랑을 보답할 수 있는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들(free moral beings)의 세계를 창조하시도록 동기를 유발시킨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이 제한된 세계로 들어오셔서 도덕적 존재들이 사단의 적개심보다는 자신의 사랑을 선택하는데 가장 큰 자극을 준비하시기 위해 인간의 육체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시도록 동기를 유발시킨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하나 님으로 하여금 도덕 세계를 세밀히 조사하기 위해 자신의 재판 기록부를 제출하셔서 자신의 사랑과 공의가 충분히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도록 동기를 유발시킨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2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