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4 장 조사심판과 재림소망
 “영원히”란 뜻.세번째, “영벌”(마 25:46), “영원한 멸망”(살후 1:9), “영영한 불”(마 25:41; 유 7), 그리고 “영원한 심판”(히 6:2)에 대한 신약의 말씀들은 반드시 영원히 진행되는 하나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원히”란 말은 자주 계속되는 과정보다는 오히려 영원한 결과를 언급한다. “영원한”(eternal, everlasting, forever)이란 영어 단어들은 “영원한 시대”를 문자적으로 의미하는 아이온(aion)으로부터 온 헬라 용어 아이오노스(aionos)를 상호 교환적으로 번역하기 위해 사용된다. (279.2)
 아이오노스(aionos)의 실제적인 용례는 문맥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악한 자가 형벌을 받는 불을 “영원한”(마 18:8, 25:41) 또는 “꺼지지 않는”(마 3:12) 것으로 말한다. 이 말씀은 악한 자가 꺼지지 않는 불 한가운데서 영원히 고통을 받을 것임을 거의 의미하지 않는다. 후자는 유다 7절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영원한 불의 형벌로”고통을 당했다고 말한 것에 의해 분 명해진다. 여기서 “영원한—아이오누”(aionou)는 분명히 결코 끝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완전하고도 영구적인 것을 말한다. (279.3)
 이것은 악한 자를 형벌한 “영원한 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죄와 죄인들의 마지막 흔적을 완전하고도 영원히 태워 버린다는 의미에서 영원이다. 분명히 불못이 “둘째 사망”(계 20:14, 21:8)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이미 본 것처럼, 그것이 최종적이고도 근본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생명의 소멸을 가져온다는 근본적이며 사실에 의해서 분명하게 지적되고 있다. (279.4)
 “영원한”의 문맥. 위에 진술된 원칙을 따라 악한 자가 당하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은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의 과정(proces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영원한 결과(results)를 가져오는 행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한다. “만일 ‘영원한’ 이란 단어가 신자들의 미래의 축복에 적용될 때 끝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면, 분명한 증거가 반대자에게 주어져 있지 않는 한 이 단어는 잃어버린 자의 미래의 형벌에도 사용되어 당연히 끝이 없다는 뜻이 되어야 한다.”23 (279.5)
 이와 같은 논리는 “영원한” 이란 의미는 수식하고 있는 대상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 대상이 하나님에 의해 신자들(요 3:16)에게 주어진 생명이라면 “영원한” 이란 단어는 분명히 “끝이 없는, 영원 무궁토록”을 뜻하는바, 그 이유는 성경은 신자들의 “죽을 것” 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5:53). (279.6)
 다른 한편으로 만약 해당되는 대상이 잃어버린 자의 “형벌” 이나 또는 “멸망” 이라면 그 “영원한” 이란 말은 단지 “영구적이고, 전적이며, 최종적인” 것을 의미하는바, 그 이유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악한 자가 영원한 고통을 받기 위한 불멸의 존재로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형벌은 자연적으로 불멸의 육체를 소유하거나 아니면 고난을 당하는 형벌의 날에 하나님께서 불멸의 몸을 주신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 조건들 중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279.7)
 하나님의 공의를 오해함. 넷째로, 영원한 고통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일시적인 생애 동안에 죄를 지은 자들에게 영원한 고통을 주셔서 자신을 옹호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내시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곡해하는 목적에 도움을 준다. 어떤 이들은 “악한 자가 만일 영원한 파멸에 의한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면 형벌로부터 행복한 해방이 될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전혀 형벌일 수가 없다”24라는 이론을 제기한다. 그러한 이론은 줄여서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에게 가하시는 공의로운 형벌은 그들에게 영원한 고통을 줄 것으로만 적용하기 때문에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280.1)
 하나님의 공의가 단지 영원한 고통의 형벌을 부과하심으로만 충족될 수 있다고는 거의 믿지 않는다. 공의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죽음의 형벌을 가장 큰 벌로서 부과 할 수 있는 가장 엄격한 형태의 형벌로 간주한다. 공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불의한 자가 실제로 파멸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틀림없이 분명하다고 믿을 만한 이유는 없다. 이것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잃어버리는 자의 고난의 “등급”을 결정하는 것은 책임의 정도라는 원칙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징벌의 고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잃어버린 자의 멸절로 끝날 것이다. (280.2)
 영원한 우주 이원론. 다섯번째로, 영원한 고통은 우주 이원론(cosmic dualism)의 영원한 존재를 전제로 한다. 하늘과 지옥, 행복과 고통, 선과 악은 서로가 나란히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계 21:4)가게 될 새 땅에 대한 예언의 계시와 이 견해를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나 만약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처럼 잃어버린 자의 고뇌와 고통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야에 있다면 어떻게 애통하는 것과 고통당하는 것이 잊혀질 수 있겠는가(눅 16:19~31). (280.3)
 괴로운 형벌의 고통을 영원히 당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구원 받지 못한 자의 진영에 있다 할지라도, 단지 새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파괴하는 데만 이바지 할 것이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우주에서 영원한 실체로 남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결코 “만유의 주”(고전 15:8)가 될 수 없을 것이다. (280.4)
 위에서 연구한 빛 속에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의 결과는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구원도 또한 구원받지 못한 자를 위한 영원한 형벌도 아니고, 의로운 자를 위해서는 영생을, 또한 불의한 자를 위해서는 영원한 멸절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 견해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일관되게 해석하도록 하며 또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더욱 고양시킨다. (280.5)
 제 4 부 마지막 심판의 신학적 의의(意義)
 마지막 심판의 다양한 국면과 결과에 대한 연구는 그것의 전반적인 의의(意義)에 대한 의문을 일으킨다. 이 마지막 심판의 교리가 하나님의 속성, 우주와의 관계, 선과 악의 쟁투의 결과, 인간의 생명과 행위의 가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와 우리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견해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우리는 마지막 심판의 교리에 대한 신학적인 네 가지 주요 암시를 고려함으로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280.6)
 1. 초월적인 도덕적 질서
 우리의 세상을 보호하심. 마지막 심판은 무엇보다도 우주에는 초월적인 도덕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우주에는 지고(至高)한 도덕적 지배자(supreme moral arbiter)가 있어서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기별은 세상이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 시대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281.1)
 종종 무질서, 증오, 부도덕, 전쟁 그리고 인간의 생명과 재산의 파괴가 성행할 때 심판에 대한 기별은 개개인과 온 세상의 영원한 운명이 어떤 광적이고 우매한 세력의 손에 있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재확신시킨다. “그분께서는 온세상을 자신의 손에 쥐고 계신다.” 인간의 운명의 두루마리는 어린양의 손안에 안전하게 놓여 있다(계 5:7). (281.2)
 각 개인의 완전한 기록에 근거하여 수많은 존재들이 참여한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행해진 심판은 이 우주를 통제하는 도덕적 질서가 있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그 질서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모든 사람들과 모든 체제들을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결코 하나님은 어리석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마지막 심판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드러낼 것이고 그것에 따라 그들을 벌할 것이다. (281.3)
 인간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함. 우주를 통제하는 도덕 질서를 보여줌으로, 마지막 심판의 교리는 인간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참된 인간이 되려는 것은 도덕적 민감성, 도덕적 책임감 그리고 도덕적 선택권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도덕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도덕과 문명의 질서가 전적으로 파괴되고 또 인간 자신이 스스로 법(法)인 세상에 사는 것은 간담을 서늘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마지막 심판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덕 원칙을 형 없는 것으로 경시할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나게 하는바 그 이유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고후 5:10)아야 하기 때문이다. (281.4)
 도덕 질서의 실체가 우리의 모든 행위, 결정 그리고 선택을 의미심장하게 만드는 심판에 대해 입증되는 것은 그것들이 직접적이고도 궁극적인 결과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 원칙들을 파괴하는 것은 무시되거나 가볍게 취급될 수 없는바, 그 이유는 그것이 우주의 도덕적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의 행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반역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사 59:2) 자아 파멸의 길을 가도록 했다. 마지막 심판은 우주에 항구적인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파멸의 반역을 끝내시는데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낸다. (281.5)
 신앙의 본질. 마지막 심판은 우리에게 말과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구체화하도록 도전한다. 그것은 우주의 도덕적 통치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앙 고백에 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실천하는데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회상시킨다. 마지막 심판 때에 그리스도께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 ∙∙∙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마 7:21)만을 자신의 왕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2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