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4 장 조사심판과 재림소망
 비슷하게,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하는 하나님의 소망(desire)이 불신실한 자에게 “파멸과 멸망”이 다가올 마지막 심판의 사실과 함께 표현되고 있다(딤전 6:9, 10, 5:24, 4:8 참조).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시지만 그러나 비록 심한 고통이 원인이 되기는 하지만 자신이 제공한 것을 거절하는 자들의 자유를 존중하신다. (276.1)
 영원한 고통.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를 위한 영원한 고통의 교리가 하나님의 공의와 낙원의 매우 평화롭고 기쁜 특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불가능하다는 논증은 타당성이 있는 듯한 논증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증은, 아래에서 보게 되겠지만, 악한 자의 최종적인 형벌의 특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는데 기인한다. 보편적 구원은 영원한 고통이 그릇되었기 때문에 옳은 것은 아니다. (276.2)
 구제하는 형벌. 세번째는 사망 후에 구제하는 형벌이나 또는 점진적인 변형에 대한 문제는 성경과는 전혀 동떨어진 문제이다. 각 사람의 운명은 임종시 확실하게 고정된다. 이 원칙은 그리스도에 의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명백하게 설명되었다(눅 16:19~21).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분명하게 진술되어 있다. 성급한 죄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상되는 심판”“두려울 것인바” 그 이유는 그들이 보편적인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고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히 10:26, 27). (276.3)
 비그리스도인. 네번째는 그리스도의 기별을 알고 반응할 기회가 없었던 자들의 항변에 대해서, 구원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라는 믿음은 포기하거나 모든 비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고통에 넘겨진다라고 믿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이미 주목해온 것처럼, 특권을 적게 받은 자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반응하는 자신들의 신뢰에 기초하여 구원을 얻기도 한다. (276.4)
 결론. 그러나 보편구원설은 비록 얼핏 보기에는 매력적일지 모르나,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죄를 감싸거나 인간의 자유를 한정하므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구원과 자유를 준비하시므로 나타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류이다. 이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것을 거절하는데 따른 위험을 담고 있는 유명한 구절에서 적절하게 설명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276.5)
 3. 영원한 형벌
 전통적인 견해. 보편적 구원론자들을 배척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의 운명에 대해 일 반적으로 다음의 두 견해, 즉 영원한 고통의 형벌 또는 전멸 중 하나를 택하고 있다. 영원한 형벌 교리는 초기 기독교회에서 발생한 전통적인 교리로서 수세기에 걸쳐 우세해 왔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로마 가톨릭과 역사적인 오랜 주요 개신교회들이 일반적으로 불신자들의 영원한 형벌의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이 견해는 마지막 심판 때에 정죄 받는 자들은 영원한 형벌로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고통은 박탈하는 것과(poena damni) 그리고 단호한 것(poena sensus)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자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영원한 분리와 격리이며, 후자는 불과 마귀 등에 의한 절망적인 내적 고문과 영원한 고난에 의해 야기된 상상할 수 없는 영원한 고통이다. (276.6)
 영원한 형벌의 근거. 영원한 형벌에 대한 신앙은 다음의 세 논증, 즉 죽음 후에도 영원히 살아 있다고 가정하는 영혼은 무조건적인 불멸에 대한 신앙, 하나님의 공의는 한 순간의 죄도 자기 생애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아야 되는바, 그 이유는 죄는 내버려 둘 수 없는 영원한 결과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라는 가정, “영”(마 25:46), “영원한 불”(마 18:8, 25:41, 유 7), 그리고 “영원한 멸망”(살후 1:9), “세세토록 올라가는 고난의 연기”(계 14:11, 19:3, 20:10 참조) 등에 대해서 말하는 성경 말씀들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277.1)
 이러한 논증에 대한 평가는 곧장 세번째 견해인 전멸설(annihilationism)과 관련해서 제시될 것이다. (277.2)
 4. 영원한 멸절
 정의. 멸절설(Annihilationism)은 성경이 악한 자와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에 대한 영원한 멸망 또는 영속적인 파멸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유지하면서 영원한 고통의 교리를 부정한다. 악한 자의 멸절설은 초기의 어떤 교부들과 그리고 16세기에 있었던 소시안파(Socinians)에 의해 이미 가르쳐졌다. 그러나 이 견해가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을 때는 19세기에 가서였다. 비록 다른 교회들도 같은 신앙을 나누고 있긴 하지만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도들이 일반적으로 이 교리의 주 해설자들로 간주되고 있다. 최근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의 책 영혼의 불멸이냐 죽은자의 부활이냐(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surrection of the Dead ?)에 영향을 받은 듯한 많은 학자들이 몇 형태의 멸절설을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스테펜 H. 트레비스(Stephen H. Trawis)는 자신의 최근의 책 나는 예수의 재림을 믿는다(I Believe in the Second Coming of Jesus)에서 “만약 영원한 형벌과 멸절설 사이에서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한다면, 나는 스스로 후자를 택하겠다”고 시인했다.20 (277.3)
 다른 두 형태. 이 교리는 적어도 두 개의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 따르면 불신자의 전멸설은 존재를 끝내는 자신들의 사망의 순간에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도에 따르면 구원받지 못한 자의 영원한 멸망은 마지막 심판의 재림 후 국면(천년기의 끝)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 때에 죽은 불의한 자는 부활해서 고통의 형벌 기간이 지난 후에 소멸될 것이고 그로 인하여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77.4)
 멸절설의 근거. 마지막 심판 때에 불신자들이 전멸한다는 신앙은 적어도 네 가지의 주요 성서적이고도 철학적인 이유들에 기초한다. 첫째, 성경은 몸이 죽은 후에 독립해서 계속적으로 존재하는 불멸의 영혼을 인간이 소유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 신앙은 헬라의 인간학(인간의 특성)에서 온 것으로, 그것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자연적이고도 선천적으로 불멸하는바 몸이 죽은 후에는 독립해서 산다는 것이다. 이 철학적인 이원론이 영원한 고통의 기독교리를 발생시켰다. 죽을 때 불신자의 영혼은 몸으로부터 떠나 영원한 고통을 받기 위해 지옥 속으로 던짐을 받으며, 한편 신자들의 영혼은 행복의 낙원으로 안내된다. 그러한 견해는 재림과 부활 그리고 마지막 심판을 불필요하게 만드는바, 그 이유는 죽을 때에 각 사람은 이미 영원한 형벌이니 또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또한 왜 대부분의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신학 지침서가 부활과 마지막 심판을 다루는 장에서 혼란을 빚고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 사건들의 목적은 매우 모호한바, 그 이유는 그것들의 결과는 이미 죽을 때에 크게 예상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277.5)
 조건적 불멸설. 성서적 인류학은 사람을 정신·신체적 단일체(Psychosomatic untiy), 즉 죽은 후에 영혼이 독립해서 살아 있다는 것을 배제하는 몸과 혼의 단일체로 인식하고 있다. 죽은 후의 생명이란 전인(全人)의 부활이다. (278.1)
 이 부활은 성경에서 몸을 떠난 영혼과 부활한 몸 사이의 재결함으로 제시되지 않고 “잠자는 자들” 또는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의 전인(全人)이 생명을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살전 4:13, 16). (278.2)
 신약은 하나님께서만이 “죽지 아니함”(딤전 6:16)이 있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조건적인 불멸”의 존재이다. 다시 말하자면 파루시아 때에 불멸의 선물을 받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러한 선물을 본래부터 부여받아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불신자들이 영원한 고통을 당할 수 있는 길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지막 심판날에 불멸로 첫번째 부활을 시키고 난 후 그 다음 영원한 고통을 그들 위에 부과하는 때이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죽은 불의한 자들이 불멸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고통의 형벌을 경험해야 된다고 제시하지 않는다. (278.3)
 영원한 멸망의 표현. 두번째, 악한 자의 운명을 “불”(마 25:41, 3:12, 5:22; 벧후 3:10~12; 계 20:10, 14, 15), “멸하다” 또는 “파멸”(마 10:28; 눅 13:3; 요 3:16, 10:28; 빌 3:19; 살후 1:9) 그리고 “사망”(요 5:24, 8:51; 롬 6:23; 히 2:14, 15; 약 1:15; 계 2:11, 20:14, 21:8)으로 으레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표현은 분명히 의식적인 존재의 지속적인 형태라기보다는 오히려 멸절설을 제시하는 표현들이다. (278.4)
 요한계시록이 네번이나 “둘째 사망”(계 2:11, 20:6, 14, 21:8)이란 구절을 악한 자의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최종적이고도 영원한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많은 악한 자들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고 말하고 있다. (278.5)
 “둘째 사망”이란 구절은 종종 탈굼(Targum)—구약을 아람어로 번역 주해한 것-에서 악한 자의 뒤집을 수 없는 최종적인 사망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곤 한다. 예를 들어 탈굼은 신명기 33장 6절을 다음과 같이 읽는다. “르우벤은 이 세상에서 살고 악한 자가 오는 세상에서 죽는 두번째 사망에서 죽지 말지어다”21 (278.6)
 이사야 65장 6절에 대한 다른 탈굼은 놀랍게도 요한계시록 20장 14절21장 8절과 흡사하다.22 믿음이 없는 유대인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들의 형벌은 온 종일 불이 타고 있는 지옥(Gehenna) 에서 있을 것이다 ∙∙∙ 내가 그들의 육체를 둘째 사망에서 구원하리라.” 비정경 문서(nonbiblical literature)에서도 이와 비슷한 예들은 계시록에 있는 “둘째 사망”이란 구절이 악한 자의 존재의 최종적이고도 뒤집을 수 없는 존재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27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