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4 장 조사심판과 재림소망
 행위의 책과 생명책 사이에 있는 관계는 명확지 않다. 어스틴 M. 페레르(Austin M. Farrer)는 그들 자신의 이름들이 생명책에서 빠져 있는 자들은 그들의 생애의 기록을 담고 있는 그 책들을 확인함으로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적절히 제시한다.16 (273.3)
 이러한 입증은 성도들에 의해 행해지는 심판 과정의 일부로 보여진다. 본장의 서두에서 진술한 것처럼 하나님의 왕국에 올 것으로 기대했던 “성도들 중 더러가 빠져 있고 거절을 받았던 ”죄인들 중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행위의 책은 왜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빠져 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 후 심판의 주요 기능은 재림 전 심판의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존재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273.4)
 3. 재림 전 심판과 재림 후 심판의 한계
 유사성. 마지막 심판의 재림 전과 재림 후 국면 사이의 비교는 여러 유사점들과 또 여러 상이 점들을 제시한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재림 전 심판에 대한 묘사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재림 후 심판에 대한 설명 사이에는 개념적으로 비슷한 점이 있다. 예를 들어서, 라드(G. E. Ladd)는 두 구절속에서 보좌가 보이고, 심판을 베푸며,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성도들이 나라를 받는 것들이 언급되어 있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들에 책들이 열려졌었고 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작은뿔— 사단)의 멸망이 추가될 수 있다.17 (273.5)
 그것에는 기능적인 유사성도 있다. 재림 전 심판과 재림 후 심판은 모두 마지막 보상이나 또는 형벌을 승인하시는 하나님의 집행 행위 전에 있는 하나의 재판 과정이다. 둘 모두는 도덕적인 인간들로 하여금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또 다른 사람에게는 정죄를 주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평가하고 수렴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둘 모두는 지적이며 도덕적인 존재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다. (273.6)
 상이점. 어떤 상이 점도 있다. 재림 전 심판은 타락하지 아니한 하늘에 있는 존재들이 참석하 가운데 거행되는 반면, 재림 후 심판은 구원받은 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해진다. 재림 전 심판이 구원받는 신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드러내는 반면, 재림 후 심판은 형벌받는 불신자들에게 당신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낸다. 재림 전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의로운 자 들에게 영생을 주심으로 끝나지만, 재림 후 심판은 악인들을 영원히 멸망킴으므로 종결된다. (273.7)
 제 3 부 마지막 심판의 결과
 1. 두 결과
 두 부활. 마지막 심판의 재림 전, 재림, 그리고 재림 후의 국면에 대한 앞에서의 연구에서 두 결과, 즉 구원받은 자를 위한 영생과 구원받지 못한 자를 위한 영원한 죽음에 대해서 이미 언급했다. 이 진리는 요한복음 5장 28절부터 29절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조하는 형태로 그리스도께서 설명하고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말씀 속에서 두 부활, 곧 하나는 생명으로, 다른 하나는 형벌로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한 사건으로 제시하고 계시는바, 그 이유는 자신의 관심은 그러한 사건들의 순서나 방법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궁극적인 결과를 강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74.1)
 그러나 계시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있을 “복되고 거룩한 자”(20:6)의 부활과 천년 후에 있을 “그 나머지 죽은 자들”(20:5의 부활 사이에 일천년의 시간의 간격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첫째 부활은 근본적으로 구원받은 자에 대한 재림 전 심판의 결과이고, 둘째 부활은 구원받지 못한 자에 대한 재림 후 심판의 결과이다. (274.2)
 형벌의 성격이 불일치함.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 심판 때에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실 영생의 보상에 관해서 하나의 보편적인 일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에게 주어지는 형벌의 특성에 관해서는 현저한 불일치가 존재한다. 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에 대해서 오늘날 세 가지의 상이한 견해가 주장되고 있다. 그것들은 보편구원설(universalism), 영벌설(eternal punishment), 그리고 전멸설(annihilationism)로 알려져 있다. 간단히 그러한 상이한 견해들을 연구해 보자. (274.3)
 2. 보편 구원설
 정의. 보편구원설(Universalism)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실 것이므로 실제로 아무도 마지막 심판 때에 영원한 고통이나 멸망으로 정죄 받지 않을 것 이라는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은 3세기에 오리겐(Origen)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고 현대에도 꾸준히 지지를 받아 왔으며 특히 프레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모울(C. F. D. Moule), 로빈슨(J. A. T. Robinson), 미가엘 파터노스터(Michael Paternoster), 마이클 페리(Michael Perry) 그리고 존 히크(John Hick) 같은 사람들의 저서를 통해서 지지를 받아왔다. 이런 사람들과 또 만인구원설을 지지하는 다른 저자들에 의해 제기된 논쟁들은 모두 신학적이며, 또 철학적인 것들이다. (274.4)
 신학적인 논쟁. 신학적으로는 세계적인 구원의 소망을 제시하는 듯이 보이는 “보편구원론 자들의 구절들”(universalist passages—딤전 2:4, 4:10; 골 1:20; 롬 5:18, 11:32; 엡 1:10; 고전 15:22)에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들에 기초하여 보편구원론자들은 만일 모든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딤전 2:4)는 하나님의 뜻은 좌절되고 파괴될 것이라고 논쟁한다. 단지 모든 인류의 구원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한한 인내로 사랑의 승리를 증명해 보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274.5)
 철학적 이유들. 철학적으로는 보편적 구원론자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짧은 몇 년 동안에 지은 죄로 인해 수백만의 사람들이 영원한 괴로움으로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실 것이라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야퀴스 엘룰(Jacques Ellul)은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질문을 하므로 이러한 견해를 놀랍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놀라운 사랑의 교항곡인 새 창조가 진노의 세상 곁에(beside)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하나님은 여전히 이중 얼굴—하늘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의 얼굴과 이 ‘지옥’을 향한 진노의 얼굴—을 가지고 계신가?” (275.1)
 로베인 게리(Ramain Gary)가 튤립(Tulipe)에서 탁월하게 묘사한 낙원이, 수백만명이 수용소에서 죽었는데도 사람들이 요동하지 않았던 곁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일 수가 있겠는가? 그는 고통이란 포로 수용소가 아니라 매우 평화롭고 매우 행복한 수용소 곁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 이라고 말했다.18 (275.2)
 연옥(練獄)의 과정. 더 나아가, 보편론자들은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은 기독교의 기별을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무수한 수백만의 비그리스도인들을 영원한 괴로움으로 정죄하시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논박한다. 어떤 보편론자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죽은 후에 “연옥”의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변화되도록 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신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275.3)
 이런 견해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연옥 교리를 수정(revision)한 것으로서 이 구제의 과정은 단지 신실한 자들의 영혼에게만 제한하고 있다. 보편론자들은 이 특권을 불신실한 자의 영혼 에게도 확대한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께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사랑에 반응을 보이고 또 영생을 위한 자신의 임재를 기뻐할 때까지 모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계속하신다는 것이다. (275.4)
 호소력 있는 견해. 신학적이고도 철학적인 보편 구원설의 논증이 그리스도인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낀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을 구 원하시는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너무 보복적이셔서 수백만의 사람들 은 — 특히 무지 가운데서 살았던 자 — 영원한 고통으로 형벌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기를 혐오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승리를 고양시키고 영원한 고통을 부가하시는 보복적인 하나님이란 비성서적인 개념을 단호히 거절하는 보편구원론자의 관심에 대한 고마움은 이 교리가 성서적 가르침에 대한 심각한 곡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의 눈을 멀게 하지 말아야 한다. (275.5)
 소망, 그러나 사실이 아님. 무엇보다도 첫째로 “보편 구원 구절들”은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 목적에 대한 범위는 말하고 있으나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의 사실(fact)을 말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 1장 19절부터 23절에서 “만물을 자기와 화목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믿음 가운데 거하며 준비한 골로새교인들을 포함한다고 말한다.19 (2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