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4 장 조사심판과 재림소망
 구속받은 사람들은 새 땅에서 세 번 놀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첫번째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 땅에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성도들 중에 어떤 사람이 거기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당황과 혼돈 가운데 어떤 사람은 묻는다. “스미드 씨 같이 경건한 사람이 어떻게 잃어 버린 바 되었을까?” 두번째로는 대분분의 사람들이 결코 하늘 왕국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죄인들 중 몇이 있는 것을 알아채곤 놀랄 것이다. “몇 년 동안 교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모리스 부인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을까?” 하면서 몇 사람은 이상히 여길 것이다. 세번째는 이 모든 것 중 가장 기뻐 놀라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254.1)
 어떤 사람에게는 영생을 제공하고 다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경험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표준들에 대한 놀라움은 하나님의 공정성에 대해 의심과 불신의 느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감정들이 지속되도록 버려둔다면 새 땅의 영원한 완전은 그런 감정으로 위협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다시 일어날 수 있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명은 헛되게 될 것이다. (254.2)
 새 땅의 영원한 안정은 그 곳 거민들의 하나님께 대한 의심 없는 신뢰와 사랑과 순종의 태도에 달려 있다. 이 태도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요 단지 자발적일 것이다. 자신의 피조물들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실뢰를 얻고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께 사용하시는 하나의 의미심장한 방법은 그들이 그분의 심판의 공정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적절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 고려해 볼 많은 성경의 장, 절들은 사람들과 천사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그의 최후의 심판 과정에 세상의 도덕적 존재들이 참여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초청을 말하고 있다(단 7:10, 22, 26; 마 19:28, 12:41, 42; 고전 6:2, 3 참조). 역사적으로 하늘과 인간 존재들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서 담당할 역할에 대해 거의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우선적으로 그 핵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일어날 마지막 심판의 집행적인 국면에 있었다. 비록 이 국면이 주로 어두운 운명의 날로 보여졌지만 그날에 그리스도께서는 악한자를 형벌하시므로 자신의 원수를 갚으실 것이다. (254.3)
 본 장의 목적. 본 장의 목적은 재림시 심판에 선행하고 또 이어지는 사법적 소송 과정의 성서적 이해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간략한 분석이 마지막 심판의 사법적 소송에 대해 함축적이고도 명백하게 언급한 가장 의미심장한 장, 절들에서 주어질 것이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은 이 주제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의 신학적 중요성을 반영할 것이다. 이 연구는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1. 마지막 심판의 재림 전 국면

 2. 마지막 심판의 재림 후 국면

 3. 마지막 심판의 결과

 4. 마지막 심판의 신학적 의미 (254.4)
 제 1 부 마지막 심판의 재림 전 국면
 1. 심판의 실재에 대한 성서적 강조
 실제가 양상보다 중요하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동적인 면이 아닌 그것의 필연성과 종국성이다. 성경 기자들에게 마지막 심판의 실재성(reality)은 그것의 양상(modality) 보다 더욱 중요하다. 이런 관찰은 재림과 부활 같은 다른 성서의 진리들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와 대부분의 신약 기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의 믿는 자들의 부활과 천년기 끝에 있을 불신자들의 부활은 다르게 취급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255.1)
 예수님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그 시간’을 말씀하신다(요 5:28, 29).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선행 자와 악행 자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날 것으로 나타내신다(마 25:32; 눅 11:32). 그러나 사도 요한은 전자를 천년기의 시작에 후자를 천년기가 끝난 후에(계 20:4, 5) 놓음으로 두 부활을 구별한다. (255.2)
 사실이 국면보다 중요하다. 과학적인 현대인의 마음에는 이 두 말은 분명한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서 기자들에게는 부활의 실재성이 그것의 양상보다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조화시키는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다. 사실 대부분의 부활에 대한 인용문들은 그 사건의 국면보다는 오히려 그 사실을 말하고 있다. (255.3)
 같은 원칙이 마지막 심판에 대한 성경 말씀들에도 적용된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의 양상보다는 실재성종국성을 강조하는데 관심이 있다. 부활의 경우처럼 마지막 심판에서도 마지막 심판의 재림 전 국면과 재림 후 국면을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몇 성경절들이 있다. 이 성경절들의 연구는 마지막 심판에 대해 더욱 충분한 동적 이해를 제공한다. (255.4)
 2.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재림 전 심판
 상급의 개념. 재림 전 심판 개념은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에서 기초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가정이다. 그런 개념은 심지어 심판이란 기술적 용어가 사용되지 않은 수많은 절들에도 함축되어 있다. 예수님은 자주 사전 평가적 심판을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것과 잃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255.5)
 마태복음 5장에서 각 복(福)들은 상급의 약속들을 포함한다. 예수는 46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같은 개념을 복음서를 통해 다음 장, 절에서 여러 번 찾아볼 수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 6:1, 6:2, 4, 5, 16, 18; 10:41, 42; 막 9:41; 눅 6:23, 35 참조). (255.6)
 상급의 때. 약속된 보상이나 형벌을 위한 때는 분명히 재림으로 제시되어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25:31, 32 참조). 이것과 비슷한 구절들에서, 재림은 각 사람에 해당하는 평가를 위한 것이 아니고 상급이나 형벌을 받는 때로 인식되어진다. 예수님의 말씀 중 어느 한 구절도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조사하고 결정하기 위해 그의 재림시에 전통적인 대법정에 그가 앉으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255.7)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때는 상급이나 형벌을 주시는 때이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리는 평가적 진행이 재림 전(before)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므로 그들에게 해당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해 각 사람의 행동과 태도를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피조물에 대한 정보의 부족에 처할 염려가 없기 때문에, 이 주장은 약간의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과 다른 성서 기자들은 행동뿐만 아니라 말들도 조사해야 하는 심판을 말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256.1)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이 조사에 목적은 하나님께서 각사람에 대한 진리를 확신케 하기 위 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이 진리를 그의 도덕적 존재들에게 설명하고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직접적인 관심은 하나님의 조사심판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실제성과 타당성을 아는 것에 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소송을 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날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 오신다는 사실이 재림 전 심판 속에 가정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해 왔다. (256.2)
 인간의 책임. 재림 전 심판의 개념은 인간의 책임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함축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책임의 범위가 행동뿐만 아니라 모든 부주의한 말(마 2:36)도 포함된다고 말씀하신다. 바울도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인간의 비밀”(롬 2:16)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썼을 때 같은 생각을 표현한다. 이 땅에 살았던 수십억 사람들의 행동을 철저히 조사한다는 것은 재림 전 사법적 절차를 가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재림시의 심판은 우선적으로 사법적 조사의 과정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판결 혹은 분리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256.3)
 몇 비유에서 그리스도는 마지막 심판에서의 인간의 책임 원칙을 예증한다. 예를 들면 마태 복음에서는 책임의 영역을 예증하는 세 비유가 감람산 설교에 이어 주어진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강조는 우리의 영적인 준비를 위한 책임에 있다(마 25:1~13 참조). 달란트의 비유에서, 책임의 영역은 시간, 돈, 기술같은 우리의 자원에 대한 청지기 직분에 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책임의 영역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책임에 있다(마 25:31~46 참조). (256.4)
 부활한 죽은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음. 각 인간 존재의 책임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요 5:28, 29)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부르기 전에 분명히 결정된다. 생명의 부활이나 심판의 부활은 조사심판의 끝을 전제로 하는 그리스도의 집행심판을 나타낸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백성들이 심판받기 위해 부활할 것이 아니고 이미 심판받았기 때문에 부활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만약 영원한 생명이나 사망으로 부활한 사람들이 여전히 심판을 받는다면 심판 자체가 열리기도 전에 심판의 결과가 부여되는 모순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256.5)
 “심판의 부활” 국면은 실제적으로 “정죄의 부활”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의 부활”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새국제어역(N. I. V.) 영어 성경에서 정확하게 나타난다. “선을 행하는 자들은 살기 위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정죄되기 위해 일어날 것이다” [역자 번역]. “누가 살기 위해 일어나고, 누가 정죄되기 위해 일어날” 것인가를 결정하는 심판은 분명히 부활 사건 이전에 일어난다. 이 사상은 “저 세상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을 자들”(눅 20:35)이라고 그가 말한 사두개인과의 대화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표현되었다. (2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