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9장 신약의 관점에서 본 이스라엘의 지역적 약속
 그 이전에 차지한 것은 모두 약속의 “전시, 확인, 그리고 확대”로 이해되었던 것처럼 이것은 순서상 미래에 있게 될 온전한 땅 양도의 증거나 담보가 된다.9 (152.3)
 바울은 아브라함을 전 세계의 열방 중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 간주하였다(롬 4:13; 16-24 참조).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믿는 유대인과 믿는 이방인)의 아버지이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는 대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롬 4:16)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한” 땅과 후손에 관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것은 문자주의 해석학에 따른 것이 아니라, 바울의 신학적 주석에 따른 것이다. 땅은 세상이 되었고, 나라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로마서 4장에 대한 풀러(D. P. Fuller)의 결론 즉 “바울은 아브라함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방의 조상이 된다고 이해하였다”10는 것은 정확하다. 이것은 약속된 땅과 세계는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롬 4:16)는 바울의 진술과 일치한다. 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해지며 그를 통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믿는 자에게 보증이 된다. 결국, 이스라엘의 언약은 그것을 받을 자가 자격을 갖추 었느냐에 관한 부분에서 조건적이다. 그 조건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믿는 믿음이다. (152.4)
 이러한 결론은 세대주의자 펜티코스트(J. Dwight Pentecost)의 다음과 같은 확언에 불리한 영향을 끼친다. “땅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이 언약은 무조건적인 언약으로 간주되어야 한다.”11 반면에, 새 스코필드 주석 성경(NSRB, 251쪽)은 신명기 30:1-10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면서 그 조건적 성질을 인정하였다. “팔레스타인 언약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조건을 제시한다.” (153.1)
 카이저(W. C. Kaiser)는 이러한 긴장을 다음과 같은 가장 적절한 표현으로 설명하였다. “조건은 약속에 더해진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킴으로 혜택을 받게 될 참여자들에만 더해진 것이다. 그 약속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그 축복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의 영적 조건에 달려 있다.”12 수혜자 측에 부여된 이런 조건적인 측면은 하나님의 왕국 즉 구속된 지구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의, 무조건적인 토대를 어긴 것이 전혀 아니다(사 11:6-9; 암 9:13-15). 이사야는 이것을 우주적인 용어로 묘사한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사 65:17-18; 66:22과 비교). 여기에서 선지자는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을 위한 영광스러운 기업으로서 하늘과 땅을 함께 묶는다. 신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후손들이 믿음으로 팔레스타인 정복이나 예루살렘 재건보다 훨씬 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어떤 것을 기대하였다는 것을 힘주어 선포한다. (153.2)
믿음으로 저[아브라함]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이 사람들[영적 이스라엘]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9, 10, 13, 15, 16, 강조 첨가).
(154.1)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한 종말론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함께 묶어준다. (154.2)
 문자주의 해석학의 부적절성
 예언에 있어서 민족적 지리적 문자주의 해석학은 예언은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시간보다 앞선 역사라는 가정 위에 기초한 것이다. 결국 그것은 미리 사진처럼 정확히 그린 것을 예언적 묘사라고 간주한다. 이러한 가정은 “사람의 마음으로는 생각지 못하고”(고전 2:9; 사 64:4)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다가 올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용납할 여지가 없다. 문자주의는 증대되는 표상을 지닌 고유한 성서적 구조를 부인한다. (154.3)
 그리스도는 비천한 가운데에 오셨다. 그러나 그는 요나보다, 솔로몬 보다, 성전보다 크신 분이시다(마 12:40, 42, 6). 그는 이스라엘의 왕, 선지자, 제사장과 문자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닌 한 메시아를 기대하는 유대의 희망을 훨씬 더 고양시키셨다. 거룩한 메시아로서 그는 그러한 고대의 원형들보다 무한히 높은 분이시다. 이미 그의 비천한 성육신에서 그러하셨고 특별히 그의 오시는 영광중에서 그러하실 것이다. (154.4)
 이스라엘의 신정적인 왕들에 대한 정확한 재현이 기대되지는 않는다. 만일 오실 더 크고 더 좋은 것의 표상으로 이해된다면, “나타난 것은 대부분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것이어야만 한다.”13 그러므로 우리들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도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과 죄를 다루시는 그의 길을 예증으로 보여주시는 축소판 세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씨에게 약속하신 땅은 ∙∙∙ 세계의 표상이었다”(롬 4:13).14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전체적인 시야는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것으로서 하늘과 땅을 취하는 우주적인 차원으로 증대되는 것이었다(사 65:17; 24:21-23). (154.5)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리적 약속에 대한 종말론적 적용을 위한 결정적인 원칙은 그리스도와 신약 전체가 이 언약의 약속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이스라엘의 제한된 성지를 우주적으로 확대하는 것을 가르치는 전형적인 구절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 중에서 찾을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서 선지자이시라고 인정하면서 사마리아 산(그리심 산)과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 산 중에 어느 산이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냐고 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말을 믿으라, 이 성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고 하셨다. 메시아가 오신 이래로 이제 그가 거룩한 장소이며, 모든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은 그에게로 모인다(마 11:28; 23:37). 그리스도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선 언하셨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시면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도 하셨다. 그리스도는 종말론에서 있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희망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을 나누지 않으셨다. 열방으로부터 나온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들은 “한 목자” 아래 “한 우리”에 함께 있게 될 것이다(요 10:16). (155.1)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약속들을 적용할 때 반드시 고려하는 한 가지 기본적인 원칙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새 언약의 백성들 중에서 이전의 민족적 제한이 제거된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중동 중심의 지리적 제한의 제거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거룩한 곳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에 대한 신약의 적용이다. 신약은 이전 예루살렘의 거룩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대체하였다. 그것은 이전의 지리적 거룩함을 “그리스도화” 하여 그 한계를 초월하였다. 이것은 신약이 이스라엘의 지리적 약속을 거절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확인된 것이다. (155.2)
 신약과 구약의 종말론의 근본적인 연속성은 히브리서에서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도는 새 언약의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히 12:22-24)께 나아간다고 확신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통하여 이제 교회는 믿음으로 하늘 성전으로 계속 나아가고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히 4:16; 10:19-22). (156.1)
 기독교 예배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이스라엘 예배와 비슷하거나 병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이스라엘의 표상과 그림자의 근본적인 성취로 선포된 것이다. 이러한 히브리서의 이미지와 용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점진적 계시와 역사적 실현을 통해(히 1:1-3) 거룩한 예배의 근본적인 통일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는 목적을 이루고 있다. 현재의 영적 성취가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 약속들의 묵시적 완성을 폐지하거나 취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복음적 해석학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로 그 모든 것을 단번에 영원히 변화시키셨다. (156.2)
 히브리서에서 구약의 용어들과 중동 이미지가 계속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하거나 연기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경험하고 있으며(히 6:5) 그 묵시적 절정의 때에 훨 씬 더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성취될 것(히 13:14)임을 보증하는 것이다. (156.3)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그리고 교회에 대한 우리의 희망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자손들은 현재의 죄 된 상태에 있는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더 나은 하늘 도성을 약속받았다(히 11:10, 16).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넘어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보았다. 더 나아가 이 영원한 유업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집들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제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스라엘과 교회는 한 기업 안에서 연합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교회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이스라엘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40). (156.4)
 이 사도의 편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들에게 약속하신 새 언약(렘 31:31-34)을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적용한다(히 8:1-13). 저자는 심지어 모세 언약은 이제 낡았고, 레위기 법은 폐했으며, 지상 성전은 그 희생 봉사와 함께 그리스도에 의하여 쇠하여졌다고 밝힌다(히 8:13; 10:9). 모든 신자들은 그들의 눈을 은혜의 보좌에 앉으신 왕—제사장이신 예수께로 향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이제 진정한 중보는 지상성전에서 하늘 성전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밝혀주셨기 때문이다(히 9:8; 10:19-22).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는 영원한 안식처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생생한 안식으로 들어간다. (157.1)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히 12:28)으며 “오직 장차 올 것”(히 13:14)을 찾는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과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가 너무나 확실하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야 하는 영적 조건을 낡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분명한 용어로 다가올 메시아적 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들을 강조하셨다. (157.2)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하나님의 나라, 눅 13:28)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갉이 있으리라(마 8:11, 12; 눅 13:28, 29과 비교).
(1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