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9장 신약의 관점에서 본 이스라엘의 지역적 약속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이분법적1 접근에 대한 세대주의의 주장은 각각을 위한 희망을 분리하여 제시하고 종말론을 나누어 놓는 것에서 가장 현저하게 드러난다. 이 견해를 따르면 교회는 오직 하늘만을, 이스라엘은 그들의 영원한 유업으로 오직 팔레스타인만을 소망할 수 있다. (147.1)
 세대주의는 신명기 30:1-10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팔레스타인 언약”2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약속된 땅의 경계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지정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 신 11:24 참조). 중동에 있는 육적 이스라엘에 대한 운명은 이사야 32장에 더 널리 펼쳐져 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내 백성이 화평 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사 32:1, 18). (147.2)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언약과 날카롭게 대조하면, 교회는 오직 하늘만을 그들의 운명과 희망으로 주장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엡 1:3) 셨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엡 2:6) 신다. (147.3)
 존 다비(John Darby)는 1868년 문자적 해석에 기초하여 이사야 32장에베소서 2장을 현저하게 대조하면서 “분명한 세대의 변화”3를 추론하였다. 그로 인하여 그는 지상에서의 의와 평화의 왕적 통치는 오직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147.4)
 오직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만 약속된 땅
 구약은 부조들과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땅을 시종일관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는 은혜로운 선물이나 축복 등의 신학적 언어로 묘사한다(창 12:1, 7; 13:14-17; 15:18-21; 신 1:5-8; 시 44:1-3). 말하자면, 땅 그 자체가 “땅에 대한 여호와의 창조와 소유권을 상징하기 위해”4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레 25:2)는 요청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한(민 35:34) “그의 거룩한 땅”(시 78:54)이었다. 이스라엘 땅의 거룩함은 전적으로 그 자체의 것이 아니라 파생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땅, 도성, 그리고 성전의 운명은 여호와에 대한 이스라엘의 종교적 관계에 의존하고 있었다(레 26장 참조).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심판을 수반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땅이요. 기업이기 때문이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언약의 백성과 그의 땅 모두 궁극적으로 여호와께 달려 있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땅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를 주장할 수 없었고, 자 기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으며, 절대적인 소유로 땅을 우상화 할 수도 없었다.”5 이스라엘은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열 지파에게 “저희가 여호와의 땅에 거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이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호 9:3)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다.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48.1)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가증히 만들었으며(렘 2:7)
(149.1)
 여호와에 대한 이스라엘의 의무는 근본적으로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렘 3:19; 비교 2:8; 시 105:43-45)이다. 비록 땅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지만, 언약의 백성은 그들이 여호와께 순종할 때에야 그 하나님의 땅에 거하며 머무를 수 있었다(신 4:40; 사 1:19). 선물은 주는 자가 없으면 받을 수 없다. 이러한 신학적 차원이나 조건이 없이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존재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즉 신정(神政)일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언약의 하나님께 불충하였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의 기업을 이스라엘에게서 도로 취하셨다(렘 17:1-4; 15:13-14). 구약에서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방 중에 흩어지는 것과 그 땅의 황폐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사 1:5-9; 렘 4:23-26). 믿음의 열매가 없는 이스라엘을 거절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땅도 더 이상 그의 축복 아래 두지 아니 하시고 거절하셨다. (149.2)
 신정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존재는 팔레스타인 거주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포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의 축복을 철회하시면서 초래된 것이다. 이 진리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 모두와 맺은 은혜로운 “새 언약”의 약속으로 확인된다.6 이 새 언약은 앗수르와 바벨론 포로의 땅으로부터 돌아오는 새 출애굽과, 조상들의 땅에 새롭게 정주하는 것(렘 30-32장)과, 다윗보다 더 위대한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놀라운 예레미야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신실하심은 불순종한 지파들에 대한 그의 심판 중에서와 심판을 통해서도 여전히 계속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149.3)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로부터의 이스라엘 귀환의 조건은 여전히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 10:21; 참조. 사 4:26; 렘 3:12-13; 31:21-22). 이 예언적 신탁들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여호와 없이는 팔레스타인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디폴드(Peter Diepold)가 구약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비록 땅은 여호와의 은혜로운 선물이지만, 아직도 그 선물은 여호와의 뜻의 계시에 순종할 때에 실현될 수 있다.”7 (149.4)
 예레미야의 새 언약 약속의 새로움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순종과 하나님을 아는 경험적 지식의 영적 요구들이 충족된 새로운 이스라엘을 그의 주권적 은혜로 준비시키실 것이라는 놀라운 보증이다. 그와 같은 약속은 종말론적인 약속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레미야 30-32장의 약속에서도 약속의 땅에서의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새 언약의 관계가 없이는 실현될 수 없었다. 구약에서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세속적 정치적 회복은 아무데에서도 그려져 있지 아니하다. 오직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새로운 다윗을 통해 여호와께서 유일한 주와 통치자로 인정을 받을 때에만 이스라엘은 충성스러운 남은 자 즉 하나님의 이스라엘로서 팔레스타인에 거하게 될 것이다(사 9:7; 11:10-12; 겔 37:21-27; 렘 23:5-8). 그 때에 그 땅은 이전의 죄 된 모습이 아니라 공의와 평화 속에 회복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셰키나의 영광이 그의 백성 가운데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겔 37:27-28). (150.1)
 성서적 종말론의 통일성
 성서적 종말론의 다양한 국면들을 독자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대신에 우리는 진정한 해석자이신 그리스도와 또 신약의 기자들이 어떻게 평화와 의를 위한 구약의 희망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살펴 볼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에게 “천국”을 약속하셨고(마 5:3; 눅 6:20 참조), “온유한 자”에게 “땅”을 허락하셨다(마 5:5). 여기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론이 유도된다.

   (1) 예수께서는 그의 영적 제자들에게 하늘(혹은 하나님)8 왕국과 함께 전체를 기업으로 주셨다.

   (2) 그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최초의 약속에서 새롭게 땅을 포함시켜 확대하므로 이스라엘의 지리적 유산을 교회에 적용시키셨다.

 옛적 이스라엘에서 다윗은 악인의 핍박을 견디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옹호하실 것이라고 보증을 주었다. (150.2)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시 37:11, 29).
(151.1)
 분명히 그리스도는 시편 37편을 새롭고도 놀라운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다.

   (1) 이 “땅”은 다윗이 생각한 것보다 더 크다. 그 성취는 재창조된 아름다움 속에 전체 지구를 포함한다(사 11:6-9; 계 21-22장).

   (2) 새 땅은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받아들인 열방의 모든 온유한 자가 상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우주적 교회를 포함시킨 것이 이스라엘의 지역적 약속을 영적으로 해석한 것이 단연코 아니다. 반대로 그는 지역의 범위를 전 세계로 확대한 것이다. (151.2)
 사도 바울은 지역적 언약의 약속을 예수님과 같이 처음부터 우주적인 것이요 은혜의 선물로 이해한다(롬 4:13).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5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 강조 첨가).
(151.4)
 바울은 전 세계에 이르는 땅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이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의하여 주어질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하나님의 초청은 제한이 없는 것이었다. (15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 13:14, 15-16).
(152.1)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팔레스타인 땅을 일종의 계약금이나 담보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은 한 민족 이스라엘에게 셀 수 없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수용하기 위해 필요한 더 넓은 지역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자손에 대한 약속과 그 자손을 위한 땅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이 약속들은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수 21:45)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래로 점진적으로 성취되어 왔다. 카이 저(W. C. Kaiser, Jr.)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1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