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바르나바스 서신」(Epistle of Barnabas)이 나오게 되는 2세기 초부터 알렉산드리아에는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역사를 논의 하면서 유대인들이
“항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이었다”고 말했다.
16 그리고 그는 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영업을 하지않고 또 그들의 시간을 율법을 듣는 일로 사용하는 대신에 극장에서 오락을 즐기는 일로 사용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 키릴(Cyril. 412-444)의 치세 기간에 기존의 긴장 관계가 더 악화되었다고 말했다.
17 유대인들은 교회를 불태우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하였다. 키릴은 그의 독특한 호전성을 가지고 이에 대응하였다. 전집정관 오레스테스(Orestes)의 시대로부터 이 도시에 거주해 왔던 유대인들이 이 도시로부터 추방되었으며 그들의 모든 소유가 박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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